산은 취한 듯 보였다. 우영의 아버지도 술에 거나하게 취한 때면 저답지 않은 행동을 하곤 했었다. 폭력적으로 변해 가게 집기를 모조리 집어던지거나, 세상에 무서울 게 없는 듯 큰소리로 욕을 지껄이곤 했다. 산도 그래 보였다. 제 아버지와 같이 저열한 인간처럼 행동했단 것이 아니라, 평소의 그답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는 신발을 벗지도 않고 우영의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세게 입을 맞추었다. 사고가 정지하는 것 같았다.
伞看起来像是喝醉了。友荣的父亲在喝醉的时候也常常做出一些不像他自己的行为。他会变得暴力,把店里的东西全都扔掉,或者像这个世界上没有什么可怕的东西一样大声咒骂。伞看起来也是这样。这并不是说他像友荣的父亲那样行为低劣,而是说他不像平时的自己。他甚至没有脱鞋,就把手臂搭在友荣的肩膀上。在友荣来得及反应之前,他就狠狠地吻了上去。思绪仿佛停止了。
몇 달씩이나 그를 관찰하며 좇아왔지만, 몇 년씩이나 그에 관해 생각하곤 했지만. 공식적으로 우영과 산은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담배를 몇 번 나눠 피운 이웃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이 남자는 저를 쓰러트린 뒤 올라타고 있을까. 어째서 오래도록 저를 갈구해왔다는 듯 숨을 몰아쉬고 있을까. 정장이 아닌 검은 티셔츠를 입은 산의 몸이 우영에게 맞닿았다. 우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얇은 천 아래의 체온을 감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아랫입술이 깨물린 순간, 결국 이성을 잃고 말았다. 짜릿한 통증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지는 듯했다. 곧장 자세를 바꾸어 그를 바닥에 눕혔다. 서툰 키스는 비릿하고 달았다. 그의 턱에 비벼진 건 온통 제 입술에서 흐른 피였다.
几个月来一直观察并追随他,几年间总是想着他。但正式来说,友荣和伞只是点头之交。只是偶尔一起抽烟的邻居而已。可是为什么现在这个男人把我推倒在地并骑在我身上呢?为什么他像是渴望了我很久似的喘着粗气呢?穿着黑色 T 恤而不是西装的伞的身体贴近了友荣。友荣紧紧闭上了双眼,努力不去感受薄薄衣料下的体温。然而,当下唇被咬住的瞬间,他终于失去了理智。那种刺痛感瞬间蔓延全身。他立刻改变姿势,把他压倒在地。笨拙的吻带着腥甜味。他的下巴上沾满了从我嘴唇流出的血。
돌이켜보면 그때 산의 숨결과 몸에서 술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음에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제아무리 만사에 냉소적으로 굴어봤자 우영은 밤마다 산을 떠올리며 수음하는 애새끼였다. 감정에 못 이겨 치기 어린 선택을 하고 마는 놈이었다. 그 누가 정신을 차릴 수 있었겠는가. 수년간 갈망했던 이가 저와 혀를 섞고 있었다. 땀에 젖은 얼굴을 하고, 자신이 만지는 대로 신음하고 있었다. 우영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의 목덜미에 붙은 반창고를 떼어내고 상처 위로 다시 제 이를 박아 넣는 순간에도, 이 상황이 정상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심을 품지 못했다.
回想起来,那时即使没有闻到伞的呼吸和身体上的酒味,我也没有觉得奇怪。不管怎么对万事冷嘲热讽,友荣每晚都会想起伞并自慰。他是个无法控制情感,做出幼稚选择的家伙。谁能保持清醒呢?多年来渴望的人正在与自己舌吻。满脸是汗,随着自己的触碰而呻吟。友荣觉得自己像是在做梦。即便是在撕掉他脖子上的创可贴,再次把牙齿嵌入伤口的瞬间,他也没有怀疑过这种情况是否正常。
‘산…….’ ‘伞…….’
너무 곧아 부러질까 겁이 나는 사람이었다. 원하는 대로 쥐고 휘어트릴 생각 같은 건 해본 적도 없었다. 다만 우영은 언젠가 산에게 고백하고 싶었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K는 어째서 치료되지 못했는지. 다른 가족들은 어디에 있는지. 원래부터 혼자였는지. 지금은 무슨 일을 하는지……. 우영은 보균자가 되어버린 그의 삶이 이전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했고, 한 번이라도 저를 이웃 이상으로 느껴본 적이 있는지 궁금했다.
他是一个让人害怕会因为太过直率而折断的人。 从未想过要按照自己的意愿去掌控或扭曲他。 只是友荣曾经想向伞告白,想听他的故事。 为什么 K 没有得到治疗。 其他家人在哪里。 一直以来都是一个人吗。 现在在做什么工作…… 友荣对成为携带者后他的生活与以前有何不同感到好奇,也好奇他是否曾经把自己视为邻居以外的人。
그의 모든 것이 알고 싶었다. 나 말고 다른 남자와 해본 적이 있는지. 아니, 그 이전에 남자를 사랑해본 적 있는지. 정말 당신의 삶엔 온통 K뿐이었는지. 다른 이가 비집고 들어설 틈은 없는지. 그날… 왜 제게 담배 한 모금을 요구했는지.
他的所有事情我都想知道。他是否和我以外的男人有过交集。不,之前是否爱过男人。你的生活中是否真的只有 K。是否没有其他人能插足。那天……为什么向我索要了一口烟。
둘 곳이 없어 쌓아둔 박스 위로 산이 몸을 숙였다. 흥분한 우영은 중심축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마룻바닥에 무질서하게 짐이 쏟아졌다. 계절 지난 옷과 일기장 같은 것들이었다. 산은 여전히 갈급한 듯 우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차가운 손끝이 볼에 닿자 우영은 문득 그의 심장이 뛰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다. 제 심장은 터질 듯 박동하고 있었으니까. 목과 가슴팍을 따라 혀를 미끄러트린 우영이 산의 왼쪽 가슴에 귀를 대었다. 다행히 심장은 뛰고 있었다. 아주 약하게.
找不到地方放置的箱子上,伞弯下了身子。兴奋的友荣完全失去了平衡。地板上乱七八糟地掉落了一些东西,像是过季的衣服和日记本。伞仍然急切地向友荣伸出手。当冰冷的指尖碰到脸颊时,友荣突然担心起他的心脏是否还在跳动。因为他的心脏正剧烈地跳动着。友荣顺着脖子和胸口滑动着舌头,把耳朵贴在伞的左胸上。幸好,心脏还在跳动。虽然很微弱。
산은 그 후로도 몇 번 더 제 아래에서 몸을 떤 이후에야 겨우 잠들었다. 우영은 떼어냈던 반창고를 다시 붙이려 애쓰다 말고, 젖은 수건으로 그의 몸을 닦아주었다. 산의 몸 곳곳은 의아할 정도로 상처투성이였다. 한 번도 아문 적이 없는 듯 처음 난 그대로, 벌어진 상처가 다물릴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누렇게 뜨고 시퍼렇게 변한 환부를 수없이 마주하고 나서야 우영은 깨달았다.
伞在那之后又在我身下颤抖了几次,才终于睡着。友荣试图重新贴上撕掉的创可贴,但最终放弃了,用湿毛巾擦拭他的身体。伞的身体到处都是伤口,令人惊讶。那些伤口似乎从未愈合过,裂开的伤口没有丝毫愈合的迹象。在无数次面对那些发黄和变青的伤口后,友荣才意识到。
최산은 약을 먹지 않는다. 崔伞不吃药。
언제부터였을까. 대체 몇 달이나 거른 것일까. 낫지 않는 상처와 들끓는 충동, 발작적인 호흡, 식욕과 분간되지 않는 성욕까지 모든 게 익숙했다. 산은 약을 먹지 않은 것이다.
从什么时候开始的呢。究竟已经漏服了几个月的药呢。无法愈合的伤口和沸腾的冲动,痉挛的呼吸,无法分辨的食欲和性欲,这一切都变得熟悉。伞没有吃药。
틀림없었다. 보균자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 정신이 오락가락한 게 확실했다. 매달 말일 트럭에 줄을 서 그토록 비싼 돈을 주고 타온 주제에. 약을 삼키지 않고 찬장 안에 방치한 것이다. 우영은 누구보다도 이 증상을 잘 알았다. 산은 강제로 치료되느니 좀비가 되길 선택한 것이었다.
毫无疑问。由于没有履行感染者的义务,精神恍惚是显而易见的。每个月底排队上卡车,花了那么多钱才来的。药没有吞下,而是被放在橱柜里。友荣比任何人都清楚这个症状。伞选择成为僵尸,而不是被强制治疗。
7.
반창고 다섯 개. 그건 우영이 산과 몸을 섞은 횟수였다. 두어 개는 직접 떼어냈고, 몇 개는 그가 떠나간 자리에 떨어져 있었다. 우영은 그걸 소중히 주워 간직했다. 산과 자신 사이의 증표라도 되는 양 잘 말린 뒤 봉투에 넣어 보관했다.
五个创可贴。那是友荣和伞亲密接触的次数。有几个是他亲自撕下来的,还有几个是伞离开后掉在那里的。友荣珍惜地捡起来保存好。就像是他和伞之间的证明一样,小心翼翼地晾干后放进信封里保存。
산은 비교적 눈에 띄는 목덜미의 상처에만 반창고를 붙이고 다녔다. 도 넘은 장난을 치는 동료가 있다면 분명 지난밤의 행적을 추궁하는 농담을 던졌으리라. 그런 때에 산은 어떻게 반응하는 편일까. 의외로 의연하게 부정할지도 몰랐고, 얼굴을 붉히며 어물쩍 넘어가려 할지도 몰랐다. 무엇이 되었든 우영은 그 흔적에 제 잇자국도 포함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어련히 느꼈어야 할 죄책감마저 느끼지 못했을 만큼 말이다.
伞只是给比较显眼的脖子上的伤口贴了创可贴。如果有过分开玩笑的同事,肯定会开玩笑地追问昨晚的行踪。在那种情况下,伞会怎么反应呢?也许会出乎意料地镇定否认,也可能会脸红着含糊其辞地想要蒙混过去。不管怎样,友荣对那些痕迹中有自己的牙印这一事实感到满意。甚至连本该感受到的罪恶感都没有感受到。
정신없이 산과 몸을 섞는 도중에 아버지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가 밖으로 나올까 신경이 쓰였고, 산에게 그 모습을 보일까 조금은 두렵기도 했었다. 하지만, 죄책감을 느꼈던가? 그 질문에는 확실하게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사실 우영은 죄책감을 느꼈어야 마땅했다. 그게 도리였고 이치였다.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데도…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러운 자식. 죽어 마땅한 자식. 아버지가 의식이 있었다면 제게 그리 퍼부었을 거라고. 저를 혼자 두고 떠난 이유도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精神恍惚地与伞交缠在一起时,如果说完全没有想到父亲,那就是在撒谎。他是否会突然出现让我感到紧张,也有些害怕伞会看到那一幕。但是,我感到内疚了吗?这个问题很难明确回答。事实上,友荣本该感到内疚。这是理所当然的,也是合乎情理的。虽然心里明白……但总是忍不住这样想。肮脏的孩子。该死的孩子。如果父亲意识清醒,他会这样责骂我。他独自离开我的原因也不会有不同。
아버지는 자식인 제게 도리를 다한 적이 없었다. 부모들이 으레 그러하듯 이치를 가르치거나 잘못을 포용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누굴 탓하겠는가. 우영을 이리도 무정하게 만든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제게 식칼을 겨누며 위협한 이후로, 그가 휘두른 칼날에 끝내 귓볼이 베인 이후로 우영은 그의 보호자가 되기를 포기했다. 약 먹이기를 관두었다. 그러자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아버지를 제 세계에서 지워버릴 수 있었다. 방 안의 그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투명 인간보다 못한 것처럼 산의 위에서 신음하고 사정할 수 있었다.
父亲从未尽到为人父的责任。他从未像其他父母那样教导我道理或包容我的错误。那么,我又能责怪谁呢?是父亲让友荣变得如此无情。自从父亲用菜刀威胁我,并最终在他的刀刃下割伤了我的耳垂后,友荣放弃了成为他的保护者。他停止给父亲喂药。于是,我发现要将父亲从我的世界中抹去并不难。就像他在房间里不存在一样。就像比隐形人还不如一样,他可以在伞的上方呻吟和乞求。
‘챙겨 먹지 않아도 돼. 난 괜찮아.’
정말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가끔 나던 방문 긁는 소리가 더는 들려오지 않게 되었어도. 제 것을 제외한 집 안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어도. 냉동고의 음식이 더는 줄지 않아도. 쌓여 가는 약 봉투가 찬장 가득 자리를 차지해 더는 공간이 없게 되었을 때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정말 괜찮아. 먹지 않아도 별일 없었어.’
우영은 무감했었다. 깨어난 산의 입에서 언젠가 아버지가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이 흘러나오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계속 약을 거부하겠다는 말이에요?’
‘…….’
‘그건 불법이에요. 약을 먹지 않으면…’
‘하지만 우영아, 난 정상인 걸.’
‘…….’
‘난 괴물이 아냐.’
산의 음성은 단호했다. 난 괴물이 아냐. 우린 괴물이 아냐. 우영이 사랑하고, 또 사랑했던 어조였다. 흔들림 없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다 우영은 문득 방 안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언젠가부터 아버지에겐 약이 오히려 자신에게 해가 되고 있다는 광적인 믿음이 피어올랐었다. 늙은 노인 빨리 죽어 뒈져버리라는 거지. 천천히 피 말려 죽이려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어? 이딴 걸 먹이는 나라도, 센터도, 심지어는 저의 아들도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우영은 점차 지쳐갔다. 음식 살 돈을 아끼고 별별 수모를 참아가며 일한 수당으로 받아온 약 아니던가. 과태료를 내긴 싫었다. 쫓겨나긴 더더욱 싫었다. 얻어맞고 쥐어뜯기고 물린 후에도 약을 먹이려 했었다. 그러나 끝내 아버지는 정신이 나갔고, 식칼을 들어 자식의 살갗을 베었다. 뜻한 대로 목이 그였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난 괴물이… 아냐.’
그제야 우영은 고요한 아버지의 방이 무서워졌다. 안에서 잠겨버린 문을 생각하자 목이 조여오는 듯했다. 아버지의 증상을 신고한다면 우영은 곧장 거리로 내몰릴 것이다. 더는 산과 같은 층에 살지 못할 것이다. 영원히 감염되지도, 보균자가 되지도 않을 테니 추위와 배고픔에 떨다 죽게 될 터였다.
그러나 저의 죽음보다 앞서 두려운 것이 있었다. 산이 저의 아버지처럼 변하는 것. 영영 고요해지는 것. 그런 상상만으로 우영은 숨을 쉬기 힘들어졌고, 급기야 가만히 앉아 있는 일조차 버거워졌다.
‘맞아요. 당신은 괴물이 아니에요.’
……하지만 썩어가고 있어요.
차마 그 말을 산에게 할 수는 없었다. 당신은 지금 썩고 있어요. 약을 먹어야 치유될 거예요. 사실을 말해준다 해도 산은 끝내 부정할 것이다. 그가 약을 거부하는 이유는 명확했으니까. 언제든 좀비가 될 수 있단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K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 병에 자신이 여전히 감염되어 있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산은 인정이 죽음보다 두려운 듯했다. 약을 먹지 않음으로써 모든 일을 부정하려 하는 것이었다. 감염을, 재난을, 이 세계의 종말을 부정해보려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날 위해 살아주면 안 돼요?’
이미 죽은 그에게 우영은 아이처럼 간청했다. 날 위해 살아줘요. 무서워도. 자신 없어진 세상이라 해도. 더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도. 날 위해서 살아주세요. 제발. 우영은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어쩌면 정말 자신이 없는 건 저인지도 몰랐다.
한참을 가만히 침묵하던 산이 기능하지 않는 폐로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어느 때보다도 그의 박동 소리가 명확하게 들렸다. 쿵쿵. 그리고 쿵쿵.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담배 한 모금만 줄 수 있을까?
사려 깊은 요청에 우영은 결국 눈을 감았다.
8.
죽지 않는 인간은 없다.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상식적인 세상에서 죽음은 결국 언제 찾아오느냐의 문제였다. 어떤 이에겐 너무 빨랐고, 어떤 이는 기다리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찍 죽어도 딱히 아쉽진 않을 것 같다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젠 모든 것이 바뀌었다. 멸망한 세상에서 죽음은 더 이상 공평하지 않았다. 우영은 더 이상 죽고 싶지 않았다. 죽었음에도 죽지 못한 산을 두고 저 혼자 죽고 싶지 않았다.
발끝에 채는 돌을 굴리고 또 굴리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이 둥글었다. 전기가 완전히 나갔을 때에는 해와 달의 움직임으로 시간을 가늠하곤 했었다. 그때는 이렇게 골목 어귀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산의 손을 잡고, 그와 혀를 섞고, 그의 품에 안겨 잠드는 날이 올 거라고는. 그러니 절망적인 상상 따위 그만두는 편이 좋을 것이었다.
脚尖踢着石子,一次又一次地滚动着,抬头望向天空。月亮是圆的。完全停电的时候,人们常常通过太阳和月亮的移动来判断时间。那时,站在这样的小巷口等待某人是无法想象的。是啊,从未想过会有这样的日子。牵着伞的手,与他舌吻,依偎在他的怀里入睡的日子会到来。所以,最好还是停止那些绝望的想象。
한심할 정도로 초조하게 시계를 확인하던 우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번호를 물어볼 걸 후회가 되었다. 벌써 자정을 넘긴 지 한참이었다. 나쁜 일이 생긴 건 아닐 거라 애써 고개를 저어봐도 자꾸만 불안감이 치솟았다. 제 눈에 예쁜 것이 남들 눈에 못났을 리 없을 테니까. 게다가 산은 어딜 가든 알아보는 이가 있는 유명 인사 아니었던가. 어쩌면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다. 너무 무방비하게 그를 놓아두었는지도 몰랐다.
“…….” “……”
셔츠 깃에 상처가 스쳐 인상이 찌푸려졌다. 얼마 전 산이 물어뜯어 생긴 상흔이었다. 흥분한 탓에 아픔을 느끼지 못했던 우영은 다음 날 베개에 묻은 핏자국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산의 것과 달리 우영의 상처는 금세 아물어갔다. 문지르거나 닿으면 아팠지만, 몇 주 안 가 사라질 흉터였다.
衬衫的领口擦过伤口,皱起了眉头。不久前伞咬出的伤痕。因为兴奋而没有感到疼痛的友荣,第二天看到枕头上的血迹时大吃一惊。与伞的不同,友荣的伤口很快就愈合了。虽然摩擦或碰触时会疼,但几周后就会消失的伤疤。
우영은 주머니를 뒤져 새 반창고를 꺼냈다. 산의 목덜미에 붙여둔 것이 너덜댈 때면 언제든 새것으로 갈아주려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같은 자리에 상처가 나다니. 꼭 커플링을 나눠 끼기라도 한 듯 간지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었다.
友荣翻了翻口袋,拿出一块新的创可贴。每当贴在伞后颈的创可贴快要掉下来的时候,他总是会随身带着新的以便更换。居然在同一个地方受伤。就像是戴上了情侣戒指一样,让人感到有些痒痒的。
명이 다한 듯 깜박이는 가로등 아래에서, 우영은 작은 반창고의 종이 포장지를 벗겨내려 애썼다. 그리고 그때였다.
在似乎快要熄灭的路灯下,友荣努力撕开一个小创可贴的纸包装。就在那时。
“이건 내가 전문인데.” “这是我的专长。”
검은 정장을 입은 팔이 불쑥 뻗어 나와 반창고를 채갔다. 우영은 서둘러 옆을 돌아보았다. 고작 한나절 만에 훨씬 수척해진 듯한 산이 저를 보며 살풋이 미소 짓고 있었다. 그는 빼앗은 반창고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흔들었다. 목에 붙이면 잘 떨어지니까 이것보단 큰 사이즈가 좋을 거야. 약이 오르진 않았으나, 그건 우영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穿着黑色西装的手臂突然伸出来,拿走了创可贴。友荣急忙转头看向旁边。仅仅半天时间,伞似乎消瘦了许多,正看着他微微笑着。他把抢来的创可贴夹在手指间摇晃。贴在脖子上容易掉,还是用大一点的比较好。虽然没有生气,但这是友荣没想到的部分。
“이 시간에 왜 나와 있었어?”
“这个时间你为什么在外面?”
“…….” “……”
“설마 나 기다렸어?” “不会是等我吧?”
우영은 대답 대신 그의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몰라서 묻는 게 아닐 것이다. 자정을 넘긴 시각에 골목을 배회할 미친놈이 사랑에 빠진 정우영 말고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대체 어딜 갔었느냐고. 집에 오지 않고 무얼 했냐고. 주제넘게 원망 가득한 말이 쏟아질 것 같아 우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산을 당혹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友荣没有回答,而是低头看着他的鞋子。他不是不知道才问的。午夜过后在小巷里徘徊的疯子,除了陷入爱情的郑友荣,还能有谁呢。到底去哪儿了呢。为什么不回家,在做什么呢。满是责备的话似乎要倾泻而出,友荣咬住了嘴唇。他不想让伞感到困惑。
“나 기다렸구나.” “你在等我啊。”
“…….” “……”
“말하고 갈 걸 그랬다. 기다릴 줄 몰랐어.”
“应该告诉你再走的。我不知道你会等。”
우영은 괜히 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적였다. 담뱃갑과 라이터가 손톱과 부딪혀 달그락대는 소리를 냈다. 산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友荣无意识地把手伸进口袋里翻找。烟盒和打火机碰到指甲,发出叮当声。伞犹豫了一下,开口说道。
“묘소에 다녀왔어. 그 애 기일이라서.”
“我去过墓地了。因为今天是他的忌日。”
“…….” “……”
“연고도 없는 곳에 묻혔거든. 기차 타고도 한참이나 걸리더라.”
“被埋在一个没有任何联系的地方。坐火车也要很久才能到。”
죽은 연인을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산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더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듯 마른 눈가가 버석였다. 우영은 여전히 이름조차 모르는 K의 얼굴을 떠올렸다. 악의적으로 편집된 영상에서조차 아름다웠던, 산과 무척 잘 어울렸던 무용수를 떠올렸다. 그녀의 묘비에는 이름이 적혀 있을 것이다. 산의 입에서 수만 번 흘러나왔을,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死去的恋人不再想起,伞勉强地扬起嘴角。干涩的眼角似乎再也流不出泪水。友荣仍然想起那个连名字都不知道的 K 的脸。在恶意剪辑的视频中,她依然美丽,与伞非常相配的舞者。他想起她的墓碑上应该刻着名字。那个从伞口中流出过无数次的名字,应该被铭刻在那里。
“있잖아.” “你知道吗。”
“…….” “……”
“언젠가 나도 그 옆에 묻힐 수 있을까.”
“总有一天我也能埋在他旁边吗。”
우영은 저도 모르게 그를 끌어안았다. 정장 재킷 아래로 비쩍 마른 그의 몸 곳곳이 느껴졌다. 산이 저를 밀어내지 않았음에도, 우영은 더욱 힘을 주어 그를 안았다.
友荣不由自主地抱住了他。透过西装外套,他能感受到他瘦削的身体。即使伞没有推开他,友荣还是更用力地抱住了他。
산은 K의 옆에 묻힐 수 없을 것이다. 치료된 자와 치료되지 못한 자의 운명은 생과 사의 경계를 가로지르지 못했다. 산은 그녀의 옆에 묻히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영이 그리 둘 수 없었다. 그리 두지 않을 것이었다.
伞不能被埋在 K 的旁边。被治愈者和未被治愈者的命运无法跨越生死的界限。伞不能被埋在她的旁边。最重要的是,友荣不能那样做。他不会那样做。
“그런 말 하지 마요.” “不要说那样的话。”
우영은 끝내 발설했다. 놓으면 부서지기라도 할 듯 그를 꽉 움켜쥔 채로, 몇 번씩이나 삼키려 했던 말을 내뱉고 말았다. 어쩌면 인간이 가장 삼키기 어려운 것은 원망도 비명도 아닌 사랑이었다. 뜨겁게 달아버린 고백이었다.
友荣最终说出了口。仿佛一放手就会碎掉似的紧紧握住他,几次想要吞下去的话终于说了出来。也许人类最难吞咽的不是怨恨或尖叫,而是爱。这是一句炽热的告白。
“난 무서워요. 당신 없이 살아가는 게….”
“我害怕。没有你我该如何生活……”
우영은 두려웠다. 산이 변해버릴까봐. 아버지처럼 저를 떠날까봐. 이미 죽은 주제에 더 죽어버릴까봐 무서웠다. 산이 제 곁에 있어 주었으면 했다. 이전까진 그 누구도 그래 주지 않았으니까. 아무도 남아주질 않았으니까. 우영은 그를 원했다. 혼자이고 싶지 않았다. 끝나버린 세상에서라도 간절히, 사랑받고 싶었다.
友荣感到害怕。害怕伞会改变。害怕他会像父亲一样离开自己。害怕他会在已经死去的情况下更加消失。友荣希望伞能留在自己身边。因为直到现在,没有人这样做过。没有人留下来。友荣渴望着他。不想孤单一人。即使在这个已经结束的世界里,也渴望被爱。
“자신이 없어요…….” “我没有自信……”
맞닿은 가슴에서 약한 박동이 느껴졌다. 산은 말없이 우영의 어깨에 기대어 울다가, 두 팔을 둘러 우영을 안아주었다. 훌쩍이는 숨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겁이 나서. 자신이 없어서. 멸망해버린 이 세상이, 고요한 아버지의 방이, 아물지 않는 산의 상처가 너무 무서워서.
맞닿은 가슴에서 약한 박동이 느껴졌다. 伞默默地靠在友荣的肩膀上哭泣,然后用双臂环抱住友荣。抽泣的呼吸声在耳边回荡。动弹不得。因为害怕。因为没有信心。这个已经毁灭的世界,寂静的父亲的房间,伞未愈合的伤口,都让人感到无比恐惧。
“날 위해 살아줘요… 제발.” “为了我而活吧……拜托。”
서늘한 가로등 불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만이 타올랐다.
在寒冷的路灯光下,只有两个人的影子在燃烧。
이젠 정말,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现在真的,生死攸关,这就是问题所在。
─
*엔딩 크레딧으로 생각하고 들어주시면 좋습니다.
请把它当作片尾字幕来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