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년에 갔다 올해 돌아온 뱀의눈~,,,
기존 포스트와 줄기 및 스토리 동일하나 전체적으로 어색한 표현 수정하고 묘사도 약간 수정했습니다.
크게 달라진 게 없어서 이전에 구매하셨던 분들께 강력 추천은 못 드리겠는데 그냥 개인적으로 흡족하네요... 좀 더 자연스러워짐...
여기서만 봐주세요.
시간 당 오천원.
낡은 천막 사무실 안에서 들은 답변은 실로 황당했다. 내가 벙쪄서 말을 못 잇자 껌만 쫙쫙 씹던 그 단장이란 인간이 피실피실 웃었다. 노동법을 저 껌과 함께 씹어먹었나. 뭐가 처 당당한지, 라면국물 튄 계약서를 면전에 팔랑대며 왈왈 짖는다.
“싫으면 나가. 일하겠다는 사람 많아.”
“여기서요?”
내 말에 퍽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갑자기 두꺼비 같은 눈을 부릅뜨고 삿대질을 하려다 만다. 하잘것없는 삼류 서커스단에도 프라이드가 있나? 영 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을 짓자 당장이라도 쫓아낼 기세로 직원을 부른다. 난 재빨리 비굴하게 미소지었다.
“아, 죄송해요. 할게요. 뭐부터 할까요?”
“거 사인하고, 일은 얘가 알려줄 테니 말 잘 들어라.”
날 쫓아내려고 뛰쳐들어온 직원이 머쓱하게 손을 거뒀다. 고갤 들어 쳐다보자 시선이 마주친다. 짦은 단발머리를 밝게 탈색한 키 작은 여자. 옷을 보니 가죽이다. 여기 수인도 있다고 들었는데 이런 거 입어도 되나? 난 포스터에 인쇄되어 있던 각종 동물들을 떠올리며 가죽재킷을 훑었다. 직원이 제법 상냥하게 웃는다.
“따라오세요. 숙소랑 업무 안내해드리죠.”
“네. 사인 좀 하고…”
“가면서 해요.”
직원은 부드러운 말투와 딴판인 거친 손길로 내 옷깃을 잡아끌었다. 졸지에 허접한 계약서 한 장 들고 질질 끌려가는 꼴이 되었다. 문을 닫는 순간 단장이 얄밉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뱀의 눈
우린 여러 천막이 즐비한 흙길을 걸었다. 여기저기서 산책하거나 쉬는 단원들도 있고, 천막 안에만 박혀있는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 표정이 좋지 않다. 하지만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힘들 거라고 예상했으니까.
지금 말 뗀 사람 중에 국가를 국가라고 부르는 이는 찾아볼 수 없다. 학교, 법, 의료기관, 뭐 이런 안정적이고 든든한 단어는 벌써 역사책 속으로 사라졌을 정도니. 아직까지 출판되는 역사책이 있긴 한가? 사정이 그렇다보니 최저임금은커녕 밥만 얻어먹고 일하는 사람도 많다. 얼마 전까지 그거 잡는다고 라디오로 백방 떠들어댔는데 뭐, 결과는 정치인 두엇이 암살당하고 손 떼는 것으로 끝났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는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 일이라 잘 모른다. 어렸을 적 구연동화 듣듯이 들었는데, 수인이 등장하고서부터 모든 게 개판이 되었다고 했다. 언제 어떻게 출현했는지 모를 그들은 제 정체성의 반을 차지하는 동물의 습성을 유지하고 싶다며 많은 걸 요구했고, 인간들은 당연히 그런 불편을 감수하기 싫어 항의로 받아쳤으며, 그렇게 편 갈라 싸우던 게 점점 각계각층으로 번져서 대공황이 올 뻔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국가에서 내놓은 대책이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수인 격리.
모든 수인을 특수거주구역에 격리시키고 인간들과 따로 관리하겠다는 방침. 지금 들어도 막장인데 당시 사람들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 사건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투쟁이 벌어졌고, 전시상황이 장기간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 여파로 경제가 무너지고 법치가 무너지고 국가존속이 어쩌고 저쩌고… 어려운 건 모르겠고, 하여간 대다수의 수인들은 극빈층이 되었다. 탄압하던 인간 쪽도 손해가 어마무시해서 몇 대가 지나도록 회복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다같이 죽은 꼴이다.
글로 보면 굉장히 짧은 이 역사가 지금 내 인생이 세워진 기반이다. 고작 이게, 순도 백퍼센트 인간인 내가 수인 서커스단에 기어들어와서 시간당 오천원 받고 일하게 생긴 이유라 이거다. 가족은 애저녁에 보호소에 날 버렸고, 내게 남은 건 미친 경쟁률을 뚫고 공무원이 되느냐, 아니면 쥐꼬리만한 돈으로 사람 개처럼 부리는 회사에서 일하느냐, 둘 중 하나뿐이었다. 인간으로서는.
극빈층에 내몰린 수인들이 형성한 지하세계엔 의외로 많은 돈이 몰렸다. 법망을 피해 거래하기 때문이다. 이런 서커스만 해도 사고팔리는 수인의 몸값이나 티켓 비용, 자질구레한 뒷거래로 오가는 돈 액수가 상상을 초월했다. 그야말로 0원에서부터 열 손가락 다 동원해도 못 세는 단위까지. ‘정상적인’ 직장을 구하면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돈. 물론 나의 경우는 이게 다가 아니지만,
“야. 내 말 듣고 있냐?”
끊임없던 상념이 한방에 훅 날아갔다. 정신차려보니 앞서가던 직원이 날 노려보고 있다. 어느새 눈앞에 크고 낡은 주황색 천막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듣고 있었어요.”
“그래? 내 이름 뭐야. 말해봐.”
“…정소연?”
“죽을래? 전소연이라고.”
날 선 말투가 아까완 딴판이다. 사장 앞이라고 모범적인 척했어? 배신당했다는 표정을 짓자 전소연이 코웃음친다. 얼굴도 모르는 엄마… 나 무서워.
“여기서 정신놓고 있다간 크게 다쳐. 큰코다친다고 안 했다. 크게 다친다고 했다, 어?”
“왜요? 여기가 폭력조직도 아니고.”
“넌 사람 모아놓고 쇼하는 데가 정상같니?”
전소연이 까칠하게 쏘아붙이며 천막 문을 휙 젖혔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누가 날 칼로 찌르나? 보호소 언니들이 수인 서커스단은 비교적 안전한 편이라고 했는데.
전소연은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버려두고 성큼성큼 앞서갔다. 천막 안에는 갖가지 생활용품, 화장대, 행거, 온갖 상자와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었고, 좀 더 깊숙이 들어가자 간이침대가 빽빽이 들어찬 구역이 나타났다. 그 위에 널부러져 코를 고는 사람들은 보호소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어보여서 점점 더 전소연의 말이 이해 가지 않았다.
“소연씨.”
“…민니라고 했지. 너 몇 살이냐?”
“잘 모르는데요. 이십대 초반? 중반?”
“너도 인간치고 곱게 자라진 않았구나. 어쨌든 부단장님이라고 불러. 여기 위계 확실하거든.”
“아 예… 근데 소, 부단장님은 인간 아니에요?”
“인간 맞아.”
소연이 손가락질로 내 침대를 알려주었다. 척 봐도 사용흔적이 있는 게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보호소보다 심한데.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꾸물대자 전소연이 눈을 부릅뜬다. 난 조용히 가방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이번주는 공연이 없어서 좀 한가해. 돌아다니면서 눈칫밥도 먹고 일도 배워. 난 바쁘니까… 우기야!”
전소연이 갑자기 잘 자던 사람을 발로 흔들어 깨웠다. 거의 퍽퍽 찌르는 수준이었다. 그 사람은 자다가 날벼락 맞은 것처럼 이불을 휙 걷어내더니 눈도 못뜨고 허둥지둥 일어섰다.
“부르셨어요?”
“여기 신입 들어왔는데 일 좀 가르쳐. 이름은 김민니야.”
엥.
“저기요. 아니 부단장님. 저 성씨 없는데요? 그냥 민니예요.”
“이제부터 김씨 해. 난 위화감 드는 거 싫으니까.”
“그런 게 어딨어요?”
“우기야. 봤니? 얘가 이렇게 신입 티가 난다. 토달지 않게 교육 잘하고.”
전소연은 우기라는 사람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더니 그대로 천막을 빠져나갔다. 네엡! 우기는 이마에 경례까지 해가며 딸랑거렸다. 강아지같다 했더니 마치 주인 따르듯이 행동한다. 졸지에 김민니가 된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전소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반가워. 난 송우기야. 가자, 내가 잘 알려줄게!”
송우기는 마치 10년된 친구처럼 나에게 팔짱을 꼈다. 징그러워서 휙 빼냈더니 표정을 싸악 바꾸고 노려본다. 음. 그래도 안 무섭네.
“너… 내가 수인이라고 차별해?”
“어?”
“내가 강아쥐 수인이라고 얕보냐고오. 인간인 게 뭐가 그렇게 잘났냐? 난 나중에 이 서커스단 최초의,”
“너 수인이야?”
“…뭐야. 몰랐어?”
“그걸 어떻게 알아…”
“아, 다행이다. 내가 오해했네. 미안해. 가자!”
송우기는 다시 명랑한 태도로 돌아와 팔짱을 쏙 꼈다. 얘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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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곳저곳 끌려다니며 제대로 외워지지도 않는 설명을 들었다. 우기는 원래부터 이리 말이 많은지 대답할 틈도 안 주고 쩌렁쩌렁 떠들어댔다. 여기는 씻는 곳. 여기는 식당. 여기는 소품창고. 천막을 휙휙 가리키며 말해주는데 차마 다 똑같이 생겨서 구분이 안 간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넌 신입이니까 잡일부터 할 거야. 청소나 짐 나르기 같은 거. 단원들이 가끔 심부름 시키면 그것도 하고.”
“너는 뭐 하는데?”
“난 그거보다 좀 더 어려운 일 하지. 이래봬도 입단 3년차거든.”
우기는 가슴팍을 팡팡 두들기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려보이는 얼굴치고 꽤 긴 경력이다. 서커스에 경력이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몇 살이야?”
“너랑 비슷할걸. 사실 여기 사람들, 자기 정확한 나이 몰라. 기억나는 순간부터 1살이다 치는 거지.”
“수인은 대부분 그런가?”
“인간들도 마찬가지잖아?”
우기는 내가 수인과 인간을 구분 짓듯이 말할 때마다 묘하게 반박했다. 빙긋빙긋 웃던 인상이 찌푸려지고 목소리엔 힘이 들어가는 것이다. 자부심이든 거부감이든, 종류를 가리지 않고 솔직한 것 같았다. 말조심해야겠네. 화제를 돌리려고 아무 천막이나 가리켰다.
“우기. 저긴 뭐하는 데야? 설명 안 해줬잖아.”
냉큼 입을 열려던 우기가 헉! 놀라며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래놓고선 태연한 척하며 하하하 웃는데 그게 어찌나 우스꽝스러운지 본인만 모른다.
“너 지금 식은땀 흘리냐?”
“아, 아니거든! 저 천막은 너같은 신입은 접근금지니까 신경 쓰지 마.”
“헐…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
“아주 비싼 소품 보관하는 데야! 건들면 너 여기서 죽을 때까지 일해야 돼.”
“어. 믿어줄게.”
우기가 콧김을 흥 뿜었다. 놀리기 좋다. 어느새 우기에게 일방적인 친근감을 느끼며 같이 웃고 있었다.
한참 설명을 끝낸 후에, 우기는 배고프지 않냐며 식당 천막으로 날 데려갔다. 점심과 저녁 사이 애매한 시간대라 음식 냄새는 나지 않았다. 지금 먹어도 되냐고 물으니 아무때나 와서 차려먹음 된단다. 반가운 소식에 서둘러 천막 입구를 걷었다가, 안에서 나오는 사람들과 부딪혔다.
“…아, 안녕하세요.”
어디가서 기 안 죽고 살았는데.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하려고 꾸벅 인사했다. 한 명은 대강 받아주는 척이라도 하는데, 뒤에 서있던 하나는 관심도 없는 듯 휙 지나쳐버린다. 뭐야. 멀어지는 뒤통수를 돌아보려던 순간 우기가 남아있던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선배. 나 밥해줘요!”
붙들린 사람은 귀찮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싫어. 대답하는 목소리가 놀라울 정도로 맥없다. 우렁찬 우기의 목소리에 비교해보면 개미 발자국 소리 정도?
“지금 밥 먹었는데 무슨 밥이야.”
“그건 선배가 먹은 거죠. 난 안 먹었어요.”
“귀찮아. 알아서 해.”
“신입도 왔는데 참 박하네…”
우기가 또 눈을 흘긴다. 그제서야 시달리던 사람이 이쪽으로 시선을 던진다. 내가 반할 얼굴은 아닌데, 시선을 뗄 수 없게 생겼다. 묘하네. 멍하니 마주보다가 우기가 퍽 때리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안녕하세요. 민… 김민니입니다.”
“어…”
그 사람은 또 맥없이 말을 받았다.
“이분이 원래 좀 과묵해. 수진선배라고 불러. 서수진.”
“네… 잘 부탁드립니다.”
이런 천막 소굴에서 선배니 후배니 따질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우선 맞춰줘야지 싶어 살짝 웃었다. 그랬더니 서수진이 한숨을 푹 쉬고 다시 들어간다. 우기가 환호성을 지른다.
“오예! 수진이가 해준 밥 먹는다!”
“건방지게 굴면 꼬리 밟아버린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우기는 참 넉살도 좋았다.
식사하면서는 우기의 필요성을 절절히 느꼈다. 수진은 요릴 내어주고 휙 떠나버렸고, 중간중간 우리처럼 늦은 식사하러 오는 단원들이 있었는데, 정말 한 마디도 하질 않았다. 자기들끼리 시시콜콜 떠들 법도 한데 대부분 조용히 몇마디 나누거나 그조차도 없이 침묵만 지켰다. 아예 날 노려보다가 도로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땐 우기가 이렇게 속삭였다.
“네가 참아. 수인들은 인간한테 악감정 가진 경우 많거든.”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어쨌든 신입이니까 거슬리지 않게 잘해. 되도록 마주치지 말고.”
하긴, 코딱지만한 지원금 받으려고 원장한테 빌빌대야 하는 보호소보단 낫지. 그렇게 생각하며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우기와 좀 더 돌아다니다가 오늘은 일이 없으니 쉬라는 소릴 들은 나는 양치부터 하기로 했다. 듣자하니 한 천막 안이 통째로 샤워실이고, 그 안에서 목욕하는 곳이랑 간단히 씻는 곳이 나눠진다고 했다. 칸막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칫솔을 챙겨 우기가 알려준 천막 입구를 걷은 순간, 더러운 흙바닥에 그대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
“……”
“죄, 죄송합니다!”
천막 안에 웬 여자가 있었다. 문제는 그 사람이 나체로 욕조에 들어가있다가 정면으로 마주쳤다는 거다. 시선이 닿자마자 불에 덴 듯이 놀라서 바보처럼 허둥대며 칫솔을 주웠다. 내가 멍청하게 혼자 수선떠는 동안 여자는 말이 없었다.
“나갈게요…”
우기자식 이런 건 알려줘야 할 거 아냐. 괜히 툴툴대며 돌아서는 순간 등 뒤에서 물 찰랑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왜… 언뜻 방금 마주한 눈동자가 눈앞에서 일렁이는 것도 같았다.
“써. 내가 갈게.”
물에 젖은 발자국 소리, 천이 몸을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목소리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천천히 돌아보자 하얀 가운을 걸치며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왜 옷을 다 안 입고 나와! 불평하기도 전에, 그 사람의 왼쪽 팔에 시선이 갔다.
초록색 비늘… 매끄러워 보이는 표면이 왼쪽 팔 전체를 덮고 있다. 천막 한가운데 달린 백열등 빛을 받아 은은히 빛난다. 어깨까지 이어진 그것은 그 사람에게서 상당한 이질감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알기로 수인은 인간 상태에서 동물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 사람은 왜…
“신기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파충류의 금안(金眼)이 정확히 내리꽂힌다. 왜? 고작 시선을 마주한 것뿐인데 왜 이런 느낌이 들지? 어느새 세로로 가늘게 찢어진 동공이 날 노려보다가 잡아먹을 것만 같다. 분명 이 사람이 먼저 떠나겠다고 했는데 큰 죄를 짓는 기분이다.
“봤다고 말하지 마.”
젖은 손이 어깨에 얹힌다. 뜨거운 물의 감각이 몸을 짓누른다. 네… 어떻게 대답했는지도 모르게 알아서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뱀눈이 가늘게 휘어지더니, 이내 인간의 것으로 돌아왔다.
다시 본 그 눈은 너무도 순한 느낌이었고, 나는 한동안 혼란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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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송우기. 일어나봐. 또 자냐?”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우기를 흔들어깨웠다. 아까도 퍼자더니 또 이불에 파묻혀있던 녀석이 부스스하게 일어났다. 왜에. 눈을 비벼도 잘 못뜨길래 손수 떼어줬다.
“악!”
“왜 제대로 말 안 해줬어.”
“뭐를?”
“씻으러 갔는데 사람 있었다고!”
우기가 영문 모를 표정을 짓더니 아아, 하며 손뼉을 쳤다. 아아? 배를 꾹 찌르자 꺄르르 웃는다.
“미안. 그래서 혼났어?”
“그건 아닌데, 무서워 죽는 줄 알았네.”
“뭐? 니가? 전소연한테는 왜요 왜요 잘만 하더니.”
“너 왜 부단장님이라고 안 하냐?”
“…말하지 마.”
퍽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매달린다. 위계질서 따지더니 뒤에선 다들 호박씨 까는 모양이다. 그럼 그렇지. 낡은 수건에 손을 닦으며 풀썩 주저앉았다.
“그분은 미연이야. 조미연.”
“그 사람도 선배라고 불러야 해?”
“부를 일이 없을걸?”
“왜?”
“네가 말도 못 붙여. 그냥 멀리서 보이면 피해 다녀.”
우기가 도로 드러누우며 대답했다. 말투에서 ‘네가 무슨’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풍겼다. 무슨 귀빈도 아니고 같은 서커스 단원한테 왜 저렇게 벽을 세우나 싶어서 호기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가지 말라면 가고 싶고 만나지 말라면 만나고 싶은 게 인간 본성이다. 보육원 원장에게 뼈 부러지도록 매맞은 내가 고작 우기녀석의 말 따위에 굴하면 그게 이상한 거였다.
“말 걸면 왜 안 돼?”
우기가 휙 고갤 돌렸다. 내 눈빛을 가만 보더니 벌떡 일어나 앉는다.
“야! 너 엉뚱한 생각하지 마. 큰일 나.”
“내가 뭘?”
“다 보여. 난 딱 보면 알아. 전소연 불러와서 이르기 전에 얼른 자라.”
그러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천막 불을 꺼버린다. 더 이상 말시키지 말라는 의지가 굳건히 엿보여서 입맛만 다셨다. 궁금한데. 나는 꿉꿉한 냄새가 나는 이불을 어깨까지 덮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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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땐 달빛조차 희미한 새벽이었다. 시계도 없어서 몇 시인지 짐작도 안 갔다. 꼭 보육원 같은 느낌. 목도 마르고 화장실도 가고 싶어서 다른 사람을 피해 조심조심 일어섰다.
“으으…”
실수로 우기 손을 밟았더니 앓는 소릴 냈다.
발끝을 들고 천막 밖으로 나왔을 때, 얼굴에 차가운 바람이 훅 불어왔다. 곧 여름인데 밤공기가 여즉 차갑다. 소름이 오소소 돋은 팔을 쓸어내리며 천막을 찾아헤맸다.
“여기가 맞나…”
그때까지 나는 천막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화장실을 찾고 있었는데, 그 사소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꿈에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날부터의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을 짓을 행하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거다.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다. 누가 그런 일을 예상이나 할까? 아무튼 조심성도 없이 저지른 그 행동은 훗날 일종의 나비효과를 불러왔고, 나는 그 날개짓이 일으키는 바람에 내 발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한치 앞도 모른 채 다섯 번째로 손에 닿은 천막의 입구도 휙 열어젖히고 말았다는 것이다.
“…뭔 냄새야 이게?”
코끝에 훅 끼치는 냄새는 좀 전의 바람보다 훨씬 뜨겁고, 매우 지독한 것이었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비린내에 토기가 올라왔다. 우욱.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하는 찰나 천막의 불이 켜졌다.
“뭐야. 신입이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것은, 천지분간 안 될 정도로 시뻘건 야생의 풍경. 잠시 꿈을 꾸고 있나 허벅지를 콱 찔렀지만 통증은 선명했다.
“꿈 아냐. 눈 떠.”
전소연의 목소리가 어지러운 머릿속을 헤집었다. 다시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처참히 널브러진 단장의 시체. 복부에서 흘러나와 바닥을 적신 흥건한 피. 옆에 내동댕이쳐져있는 작고 예리한 단도와… 단장의 시체를 한발로 밟고 선
조미연.
“구경났니?”
옆에서 지껄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대로 머리를 통과해버렸다. 허공에서 마주친 조미연의 가느다란 동공이 위협적으로 꿈틀거리다가 또다시 새카만 인간의 눈으로 돌아온다. 아직 숨이 붙어있는 단장이 피 끓는 소릴 내며 손을 움직였고, 조미연은 맨손으로 그의 환부를 푹 찔러버렸다.
그것이 첫날 기억의 마지막이다.
2.
길게 찢어진 동공을 가진 뱀 대가리가 날 추격했다. 정신없이 달렸지만 이상하게도 제자리걸음이었다. 다리가 무겁다. 쫓아오는 뱀은 점점 덩치가 커지더니 곧 날 한입에 집어삼킬 듯한 크기로 성장했다. 이게 말이 돼? 침범하는 무력감에 달리길 포기하고 주저앉는 순간 새까만 그림자가 날 덮쳤다. 꼼짝없이 잡아 먹힐 판이었다.
일어나.
갑자기 몇 번 들어보지 못한 음성이 들렸다. 나 말고 아무도 없는 암흑 속에서 웅웅 울려퍼지던 그것은 메아리치듯 증식하며 머리를 휘저어놓았다. 일어나라 고. 언뜻 부드럽기도 했던 목소리가 수 번 반복되더니 끝내 날카로운 음성으로 변모했다.
“김민니, 죽었냐?”
“...헉.”
“아니네.”
전소연이 날 정면으로 내려다보다가 휙 사라졌다. 깨어난 걸 알자마자 매정하게 떠난다. 서둘러 일어나보니 아까 목격한 참상이 그대로 펼쳐져있었다. 웩. 침 대 밑에 먹은 걸 게워내자 소연이 있는 대로 인상을 썼다.
“더럽게. 그거 누가 치워.”
그러는 소연은 분주하게 핏자국을 지우는 중이었다. 구덩이를 파고 물을 붓고 흙을 가져와 덮고... 땀까지 뻘뻘 흘리며 그러고 있으면서 나한테는 까칠한 게 영 기분 나쁘다. 콧속까지 들어오는 지독한 피비린내도 마음에 안 들고. 불퉁한 말투가 제멋대로 튀어나갔다.
“그건 청소하면서 이건 못해줘요?”
전소연이 성실한 농부마냥 땀을 훔치더니 코웃음쳤다.
“니 걸 내가 왜? 자, 삽 줄 테니까 알아서 해.”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람. 날아오는 삽에 머릴 맞을 뻔했다. 난 헛구역질을 계속 하면서 비틀비틀 일어섰다. “.......”
그러다 구석에 앉아있던 조미연과 시선이 마주쳤다. 불길한 금안은 어느새 사라지고, 초점도 찾아보기 어려운 새까만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다. 내가 대놓고 놀라는 티를 냈는데 조미연은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순간 기절하기 직전에 봤던 장면이 모조리 떠오르면서 손에 힘이 풀렸다. 땡그랑. 삽이 바닥으로 곤두 박질쳤다.
조미연은 그 꼴을 한동안 지켜보더니 천천히 일어섰다. 그 속도도 너무 느려서 내 머리가 둔해졌나 착각할 지경이었다. 너울거리는 몸짓으로 다가온 미연은 허릴 숙여 직접 삽을 주워주었다.
“...안 받아?”
“아, 네. 죄송합니다...”
나도 모르게 비굴한 자세가 된다. 전소연이 피웅덩이를 파묻으며 깔깔 웃었다. 화내고 싶었는데 날 내려다보는 조미연 기에 눌려 말이 안 나온다. “신입. 쫄았냐?”
“지금 안 쫄게 생겼어요?”
“하하. 그래. 빨리 토한 거 처리부터 해.”
이십몇년 인생에 삽질은 처음 해본다. 오늘 별 꼴을 다 보는구나. 피 보고 토하고 기싸움에서 지고. 기싸움? 아니다. 조미연과의 숨막히는 몇 분은 기싸움도 아니고 그냥 내가 일방적으로 눌리는 과정이었다.
서툴게 삽질을 퍽퍽 해가며 뒷처릴 끝내자 묘한 기분이 몰려왔다. 분명 난 청소한 것 뿐인데 저 살인현장의 공범이 된 느낌... 아냐. 모른 척하고 튀자. 해가 뜨 기 전에 서커스단을 탈출하리라 마음먹고 삽을 벽에 기대놓았다. 저, 가볼게요... 인사하고 입구로 향하는데 뭐가 뒷덜미를 낚아챘다.
“켁.”
“어딜 가. 얌전히 따라와.”
“내일 열심히 일하려면 푹 자야,”
“너 튈 거지?”
“......”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전소연은 피식피식 웃으며 날 조미연에게 떠밀었다. 조미연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지만, 이상하게도 도망칠 엄두 가 나지 않았다.
전소연은 삽과 단도, 바닥에 깔았던 두꺼운 천을 둘둘 말아 챙겨 앞장섰고, 나는 조미연의 지시에 따라 시체를 짊어졌다. 미친... 욕이 절로 나올 정도로 무겁 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휘청대자 미연이 조근조근 내뱉었다.
“피죽도 못 얻어먹었니?” “...여기 와서 빵만 먹었는데...”
가벼운 바람소리가 들렸다. 지금 한숨 쉰 거야? 조미연을 쳐다보자 또다시 까만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눈꼬리도 처지고... 인상은 순한데 왜 이렇게 무 섭지. 어떻게든 잘 업어보려고 끙끙대던 찰나 몸이 확 가벼워졌다.
“어?”
조미연이 한손으로 시체를 질질 끌고 있었다. 그러니까 분명히 깃털 들듯 들어올린 건 아닌데, 적당히 무거운 짐가방 끌듯이 무리없이 옮기는 것이다. 그것도 왼손 하나로. 짙푸른 녹색 비늘이 빈틈없이 솟아난 손 끝엔 새카맣고 단단해 보이는 손톱이 자리하고 있었다. 스치면 그대로 쫙 갈라지겠다. 침을 꼴깍 삼키 는 동시에 조미연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왜 멍청하게 서있어.”
“아, 예...”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바람에 뒤늦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우린 서커스단 야영지를 떠나 한참 걸었다. 전소연은 끊임없이 굽이진 길을 헤쳐 나가더니 산 밑쪽에 작게 나 있는 동굴을 찾아냈다. 도대체 이 산이 어디있 던 산인지도 모르겠고, 동굴 입구는 가뜩이나 가려져 있어 발견하기도 힘들겠다 싶었다. 언제 이런 장소를 물색한 걸까. 빛 하나 없는데 망설이지 않고 굴 안 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뒤를 따라 엉거주춤 입장했다.
“...어디까지 가요?”
“알 거 없어.”
그럼 왜 끌고왔는데...
울며 겨자먹기로 쫓아간 지 이십 분은 넘은 듯했다. 마침내 전소연이 발길을 멈췄다. 조미연이 시체를 놓은 듯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발자국 소리가 터벅터벅 다가왔다. 순간 나는 시체가 살아돌아왔다는 오싹한 망상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내 목덜미를 감싼 건,
“힘들어...”
조미연이었다.
맥없는 목소리로 한숨 쉬듯 읊조린 미연은 잠시 내 어깨에 이마를 대고 숨을 골랐다. 나는 그냥 다리에 힘이 풀리지 않게 노력하기 바빴던 것 같다. 무슨 수인 인지는 모르겠지만, 일개 인간인 나보다 분명히 강할 텐데. 왜 나에게 의지하는 건지 모르겠다. 사람을 찌르던 그 손이 내 날개뼈를 짚고 있다 생각하니 오한 이 돌았다. 몇 번이고 마른 침을 삼키는 찰나, 목덜미를 훑는 축축한 살덩어리가 느껴졌다.
“으악!”
“...너 인간이니?”
방금... 혀로 핥았어?
“뭐, 뭐하시는 거예요.” “인간이냐고.”
“소, 부단장님이 말씀 안 드렸어요?” “...꺼져.”
조미연이 힘없는 손길로 날 툭 밀쳤다. 자기가 멋대로 기대고 만져놓고 기분 나빠하는 건 어느 나라 매너인지. 인간 싫어하는 수인, 아니 수인 자체를 책에서 나 만나봤던 나는 처음 맛보는 강한 경계심에 제대로 항의도 못한 채 밀쳐진 부분만 매만졌다. 황당함에 정신이 없어서 뭔가가 물에 풍덩 빠지는 소리를 듣고 도 눈치채지 못했다.
“다 됐다. 가자.”
전소연이 손을 탁탁 털어내며 다가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렇게 섬뜩할 수가 없었던 인간이 이젠 구세주처럼 보였다. 난 되도록 조미연에게서 멀리 떨어 져 걸었다. 어쩐지 조미연도 나와 똑같이 행동하는 기색이었다.
야영지로 돌아가는 동안 주위에 사람은 없었지만, 점점 더 짙어지는 어둠에 괜스레 눈치를 살피게 됐다. 동 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고, 당장에 나를 조명하 듯 태양이 떠오르고 악마가 한달음에 달려와 벌을 내릴 것 같았다. 실제론 잠에서 깨어난 단원조차 없는데도.
전소연은 나를 아주 작은 천막으로 데려갔고, 조미연은 피곤한 얼굴로 침실에 돌아갔다. 헤어지기 직전 마주친 눈빛에 꿈에서 봤던 뱀 대가리가 겹쳐보여 소 름이 오싹 돋았다.
“이제 얘기 좀 해볼까?”
자리에 앉기도 전, 소연이 싱긋 웃었다. 첫만남 이후 처음 보는 미소다. 이제야 알겠다. 저 인간이 미소 지을 땐 경계를 풀 게 아니라 완전무장해야 한다는 걸. “뭐, 커피라도 할래? 차도 있고.”
“부단장님.”
“응?”
“저는 아무것도 못 봤는데요.”
뜨거운 물을 컵에 따르던 소연이 번쩍 고갤 쳐든다. 눈빛이 형형했다.
“일단 마셔.”
“싫어요...”
“네가 니 생각 맞춰볼까? 너 날 밝자마자, 아니 지금 당장 짐 챙겨서 도망치려고 했지. 그치?”
“......”
“그리고 꿈도 희망도 없는 보호소로 돌아가든지, 다른 쓰레기 같은 곳을 찾아 헤매든지 둘 중 하날 선택했을 거야. 그렇지?”
“그게,”
“못 가.”
전소연은 말과 동시에 주전자를 쾅 내려놓았다. 김 펄펄 나는 물이 사방으로 튄다. 아 뜨거. 손등을 가리자 소연이 씨익 웃었다. 이번엔 진짜다.
“니가 그걸 본 이상 어디로도 못 가. 도망치면 끌고오고 사라지면 찾아낼 거야. 여기 개코 많다?”
“저 진짜 말 안 해요. 저는 간이 작아서 이런 데에 어울리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장담해. 보냈다가 경찰 떼거지로 몰려오라고? 뭐 그럴 만큼 많지도 않지만.”
소연은 여유롭게 커피를 후룩 마셨다. 뜨겁지도 않나. 보기만 해도 입천장이 다 데일 것 같은데 소연의 시선은 온통 내게로 쏠려 있었다.
“부단장님. 저 돈도 없고 연고도 없거든요. 인질극도 못 벌여요. 저는 아직 죽기도 싫고,”
“뭔 소리야. 누가 죽어.”
“...목격자 죽일 거 아니에요?”
“그럼 우기는 어떻게 살아있게?”
“네?”
우기? 송우기?
내가 입을 딱 벌리자 소연이 파안대소했다. 이 사람... 남이 고통스러워할 때만 웃잖아. 원장이 살면서 무조건 피해야 한다고 알려준 딱 그 유형이다. 이쯤되 니 확신할 수 있었다. 거하게 엿처먹을 일만 남았다는 걸...
소연은 새파랗게 질린 내 안색을 보더니 커피를 꿀꺽 원샷했다. 종이컵을 구기며 말을 잇는다. “놀라지 마. 어디가서 떠벌리지도 말고. 여기 단원들이 모조리 공범이란 뜻은 아니니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데요? 저는요? 죽이지도 않으면 뭐, 가둬놔요?”
“그런 취향 없다.”
“그 얘기가 아니잖아!”
“어쭈.”
소연이 내 정강이를 발끝으로 콱 찌른다. 아. 몸을 웅크리자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구경난듯 쳐다보는 게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어디서 반말이야. 신입아.”
“아오...”
“우린 너 안 죽여. 보험금도 안 나오는데 뭐하러 죽이냐? 들킬 위험만 커지지.”
“...보, 보험금?”
예상치도 못한 황당한 단어가 튀어나온다. 갑작스러운 바깥 세상의 냄새가 낯설어 눈만 끔뻑이는데 소연이 줄줄 말을 쏟아낸다.
“안 그래도 주기적으로 신고하는 통에 의심을 살랑말랑 하고 있는 상탠데 구태여 너까지 실종상태를 만들겠냐고. 우리가 미쳤냐?” “보험이라뇨? 보험을 들었어요? 어떻게?”
보험이라면, 수인 출현 전까진 거의 모든 인간에게 보편화되어 있다가 나라 뒤집어지고 나선 다같이 형편이 어려워져 꿈도 못 꾸게 된 그거? 지금은 극 상류 층 인간들만 들고있는, 그림의 떡같은 그거? 남루한 서커스단 부단장 입에서 보험이란 단어가 튀어나오니 그야말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가 따로 없다. 나 취업사기 당한 건가.
“나는 못 들지. 단장이 들었다고.”
“아니... 단장도,”
“당연히 회사에 줄이 있으니까 손을 썼겠지.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여기 오기 전까지 보육원에 있었는데 알 턱이 있나. 날 좋아하던 언니들에게서 얻어낸 정보가 내 세상의 전부다. 그래도 나름 꿰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바깥 세계는 상상을 초월했다. 아니면 여기가 유별나게 이상한 세계든지.
전소연은 이제 길다란 손톱을 보며 성의없이 말을 던지고 있었다. 저렇게 느슨하게 구는 걸 보니 날 붙잡아둘 수 있다고 자만하는 모양이었다. 당연하지만 난 오늘 내로 무조건 도망칠 거다.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부단장은 이야길 계속했다.
“모르겠지만, 서커스란 게 운영하기 만만치 않아. 고정지출도 많고 수익은 들쭉날쭉하거든. 날씨라도 궂은 날엔 완전 종치는 거지. 티켓 값을 올리려면 공연 내용이 화려해야 하는데 마땅치 않고.”
“...그럼 다른 일을 하시지.”
“그게 쉬우면 넌 왜 여깄냐?”
“......”
“그래서 강구한 대책이 이거야.”
“...사람 죽여서 보험금 타내는 거요?”
“그렇게 말하지 마. 우리 희생으로 세상이 더 아름다워지는 거지.” 대체 뭐라는 거야?
전소연은 점점 더 알쏭달쏭한 말만 늘어놓았다. 난 생각이 얼굴에 거진 드러나는 타입이라 이번에도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막지 못했다. 뒤늦게 수습하려 하 는데 전소연이 피식피식 웃으며 날 보고 있었다. 젠장.
“이런 삼류 서커스단에 단장 하겠답시고 기어들어오는 것들이 깨끗할 것 같아?”
“...모르겠어요.”
“아직 감이 안 잡히나 본데. 수인 관련된 일하는 새끼들은 대부분 더럽다고 보면 돼. 성격이, 과거가, 전과기록이. 그냥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게.” “그 단장은,”
“영입할 때 뒷조사를 하거든.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써서. 걔도 만만치 않았어. 애초에 근로조건 따위는 기본으로 씹어먹잖아?”
“하지만 죽어야 할 이유는 아닌데.”
“그러니까 그게 기본이라고. 아오, 애가 왜 이렇게 딴지를 걸어.”
전소연이 아까 때린 곳을 또 찍었다. 아씨. 피멍 들겠다. 찌릿한 통증에 다릴 오므리고 벅벅 문지르자 키들키들 비웃는 소리가 들린다. “재밌어요?”
“설명을 듣고도 대드는 놈은 처음이다 야. 너 쓸만하겠다.”
“여기서 공범 될 마음 없거든요?”
“그럼 죽든지.”
갑자기 머리가 띵해졌다. 장난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이 서커스단은 엄연히 범죄소굴이다. 일부든 전체든 사람 목숨줄로 보험금 타내면서 굴러가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다. 시체를 어디다 뒀는지도 모르게 처리해놓고 바로 커피나 마시는 이 인간이 여기 부단장이라는 거다. 내가 어쩌다 이런 곳에 굴러들어왔는지... 수틀리면 나 하나 지우는 것 따위 일도 아닐 테다. 본능적으로 큰일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저, 저기.”
“응?”
“선택권이 정말 그거밖에 없어요? 죽거나 일하거나?”
“응.”
전소연이 해맑게 웃었다. 단장 앞에서 지은 미소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정말이지 조미연이고 이 인간이고...
“너무 안 좋은 얘기만 했나?”
“당연하죠!”
“그럼 무슨 얘길 해야 네가 혹할까.”
“그럴 일 없어요.”
“여기 있으면 재밌는 공연 공짜로 볼 수 있어.”
진짜 장난하나?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온다. 전소연은 정말 진심이라는 듯, 턱을 괴고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머리 아프고 어지럽다. 나까지 이상해지는 기분이다. 아까부터 주 전자에서 풍기는 향도 이상하고.
잠깐.
“저거 그냥 물 아니죠.”
“빨리도 알아채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저는... 그런 짓은 무서워서 못 하거든요?”
“아, 됐다. 설득 못하겠어. 집어치울래.”
“진짜 성의없네...”
“너 가서 자. 싫든 좋든 숨 붙어있고 싶으면 내 말대로 하게 될 테니까.”
“전소연... 진짜...”
소연이 내 팔을 끌어당겨 일으켰다. 반 강제로 부축받으며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 머릿속에서 지금껏 들은 이야기가 어지러이 뒤섞였다.
그날 새벽엔 폭포 아래로 떨어지는 꿈을 꿨다.
-
정신이 들었을 땐 우기가 날 미친듯이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인상을 찌푸리자 어쭈우, 하는 소리도 들렸다. 뭔 어쭈야. 원장 새끼. 아침 부터 애들 들들 볶고 난리네. 그런 생각하면서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당겼다.
“...아!”
“이제 일어났냐?”
여기 서커스단이지. 그 미친 정신나간 악마 소굴. 헉헉대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우기 말고 아무도 없었다. 우기는 내 이마를 콕 찔러보곤 까르르 웃었다. “땀이 흥건하네. 악몽 꿨어?”
“안 꾸게 생겼냐고...”
“왜? 무슨 일 있었는데?” “아, 아니야.”
전소연은 우기도 다 안다는 듯 말했지만, 어쩐지 함부로 얘길 꺼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최대한 모르는 척하다 틈을 봐서 날아야지. 난 어색하게 웃어주고 일어 났다. 우기가 얼른 밥 먹으러 가자고 닦달을 했다.
“넌 밥만 먹냐? 일 언제 해.”
“너랑 먹으려고 기다렸단 말이야. 이게 내 마음도 모르고.”
“불쌍한 척하지 마, 개야.”
“아이씨... 인간놈이!”
금세 흥분해서 펄펄 뛰는 걸 뒤로하고 천막을 나섰다. 같이 가! 허겁지겁 쫓아오는 것마저 개 같다.
식당에 들어가자 한순간 싸해지는 건 이제 아무렇지 않았다. 어차피 금방 떠날 거니까. 가볍게 무시한 채 퍽퍽한 샌드위치 두 개를 골라 자리에 앉자 우기도 따라온다. 그릇에 뭐가 한가득이다.
“식당 왔냐?”
“일하려면 잘 먹어야지.”
“일?”
“오늘부터 일 많아. 공연 준비하거든.”
“그게 정확히 언제야?”
“보자... 사흘 후. 그때부터 5일 동안 쭉 공연하고 다른 곳으로 떠날 거야.”
“원래 그렇게 돌아다녀?”
“당연하지. 유랑 서커스단. 그게 우리 모토야.”
시체 걸릴까봐 허겁지겁 튀는 거겠지...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켰다. 우기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설명하고 있었다. 공연하는 애는 연기력도 다르다 이건가.
“우기야. 너도 무대 올라가?”
“당연하지! 나 완전 능력자야.”
“뭐 하는데?”
“볼 캐치.”
“푸흐...”
“야, 야! 웃지 마!”
인간 모습으로 하는지 동물 모습으로 하는진 모르겠지만 둘 다 웃겨서 샌드위치가 튀어나갈 뻔했다. 우기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주먹을 붕붕 휘둘렀다.
대충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해가 제법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열이 많은 나는 부채질하며 그늘을 찾아다녔고, 우기는 누군가가 불러서 어딘가로 사라졌 다. 자기가 올 때까지 얌전히 있으라는 말도 덧붙이며. 여기서 뭘 얼마나 사고를 친다고.
“...어.”
마지막 말은 취소다. 나무 그늘을 찾아 들어가자마자 앉아서 쉬고 있던 조미연과 마주치고 말았다.
“야.”
재빨리 도망치는 나를 붙든 건 조미연의 목소리였다. 누가 목덜미에 칼이라도 들이댄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왜! 저 비리비리하고 맥없는 인간이 날 잡아챌 리도 없는데. 시체 옮기며 힘자랑 하는 것 같더니 금세 지쳐서 서 있지도 못하던 어젯밤 모습이 아직도 선연했다. 하지만... 난 한껏 비굴한 표정으 로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따라와.”
도대체 왜 다들 따라오라 하는 건지...
조미연이 무언의 압력으로 날 이끈 곳은 조그마한 천막이었다. 햇빛 안 드는 시원한 음지에 자리한 그것은 마치 한 명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침대도 하 나, 책상도 하나, 모든 가구가 딱 하나씩 놓여있다. 구석의 행거엔 왼쪽 소매만 조금 더 긴 상의들이 한가득 걸려있었다. 어, 설마.
“내 방이야.”
조미연이 간단히 설명했다. 내 숙소를 생각하면 굉장한 특별 대우였다. 난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며 눈칠 살폈다.
“어제 전소연이 뭐라고 했어.”
조미연은 침대에 가볍게 걸터앉으며 물었다. 뭐라고 했냐니. 사실 그 요상한 주전자 때문에 기억과 망상이 뒤섞여 뭐가 현실인지도 모르겠다. 답을 못한 채 눈알만 굴리자 조미연이 또 한숨을 내쉬었다. 습관처럼.
“너보고 여기 있으래?” “...네.”
난 튈 거지만.
“넌 그러겠다고 했고?” “네.”
거짓말이지만. “...짜증 나.”
조미연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도 맥없는 느낌이었지만, 그렇다고 무섭지 않았냐 하면 전혀. 인상을 구기는 순간 검은 눈동자가 연기처럼 일렁이더 니 어느새 섬뜩한 금안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흠칫 떨며 물러서자 조미연이 침대에서 일어나 서서히 다가왔다.
“난 인간이 싫어.”
한 발짝.
“냄새만 맡아도 끔찍해. 어제 혀끝에 닿은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
두 발짝.
“너만 보면 날 괴롭혔던 것들이 떠올라. 네 얼굴에 그 인간들이 겹쳐보여.”
세 발짝. 내 등이 천막의 기둥에 밀착했고, 조미연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오똑한 콧날이 거의 내 것과 맞닿을 것만 같았다.
“왜 이딴 곳에 기어들어왔니? 다른 기회도 많았을 텐데. 한 번 인간이란 걸 알고 나면 보기만 해도 기분이 더러워져. 알아?”
긴 소매에 가려진 왼손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았다. 원장이 체벌이랍시고 녹슨 쇠몽둥이를 들고왔을 때보다 배로, 아니 수십 배는 공포스러웠다. 녹색 비늘 이 뒤덮인 손이 금방이라도 날 압박할 것만 같다. 가느다란 목소리마저 굵은 밧줄이 되어 날 옭아맨다. 조미연의 금안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조미연.”
그때 천막 입구가 젖혀졌다. 서수진이었다. 미연이 표정을 바꾸고 내게서 멀어졌다. 어느새 눈동자는 탁하면서도 순한 그것으로 돌아가 있었다.
“전소연이 너 오래.”
“지금?”
“어. 나와.”
수진은 그 말만 하고 사라졌다. 언뜻 내게 던진 시선에 연민이 담긴 것도 같았다. “...운 좋은 줄 알아.”
조미연은 성의는 없고 악의만 가득한 어조로 툭 던지곤 천막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렸고, 난 머리를 감싸며 쪼그려 앉았다. 무조건 오늘 밤에 튄다. 머리에는 그 생각뿐이었다.
3.
도망치듯 조미연의 침실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단원 몇 명이 희한한 눈길로 날 쳐다보며 지나갔다. 왠지 이상한 오해를 산 것 같았다. 꺼림칙한 느낌에 뒷목을 쓸어내리며 서둘러 걸음을 옮기자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우기가 반가운 표정으로 달려왔다.
“어디 갔었어? 얌전히 있으랬잖아.” “어, 누가 불러서...”
“누구? 너 부를 사람이 누가 있지?”
우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만한 어조로 뱉은 말 치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날 부를 만한 사람이라면 송우기, 전소연 뿐 인데 우기는 당연 아니고, 전소연은 항상 어느 정도는 주목받고 있기 때문에 거짓말하면 들키기 십상. 결국 둘 다 아니라고 하면 이 녀석 생각엔 마땅한 사람 이 없으니 계속 추궁할 것이고, 조미연 이름을 입에 올릴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엮이기 싫어.
“그냥 지나가던 단원이 부르던데? 뭐 옮겨달라고.”
“그래? 그럼 같이 가자. 앞장서.”
“...너 나한테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냐?”
우기가 아, 하며 손바닥을 주먹으로 쳤다. 조금 단순한가. 내 거짓말은 금세 잊은 듯, 어젯밤 전소연과 함께 있었던 천막을 가리키며 열심히 조잘거린다. “전소연이 너한테 할 말 있다던데. 못 들었어?”
“나한테? 왜?”
“그러게. 너 뭐 잘못했냐? 솔직히 불어.” “아닌데...”
잘못은 걔네가 했지. 난 그냥 운없이 그 현장에 말려든 결백한 사람이고. 대체 무슨 헛소릴 또 하려고 불러들이는 건가 싶어 공포에 떨고 있는데, 우기가 내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푹 찔렀다. 순간 복부가 뚫린 채 허망하게 누워있던 단장의 모습이 생각나 펄쩍 뛰고 말았다. 필요 이상으로 놀라는 모습에 강아지 녀석 의 눈이 가늘어진다.
“너...” “김민니.”
추궁 당하기 직전, 우기가 가리켰던 곳에서 전소연의 얼굴이 빠끔 튀어나왔다. 못 들은 척하고 싶었는데, 모든 이의 이목이 집중된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이 러려고 대놓고 불렀나. 나는 죽상을 하고 터덜터덜 천막으로 향했다. 후에 우기가 말하길, 어디 도살장 끌려가는 줄 알았단다.
천막 내부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보인 건 역시 전소연이었다. 여유롭게 웃으며 팔랑팔랑 손 흔들어 인사하는 모습엔 장난기까지 서려 있었다. 질색하며 시선 을 돌리자 거기엔 다리 꼬고 앉아있는 조미연. 첩첩산중이다. 남의 천막까지 와서도 무기력하게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그 사람은 날 보자마자 인상을 구겼다.
“왜 불렀어요.”
불퉁하게 쏘아붙이자 전소연이 허, 웃는다. 키도 한 뼘은 작으면서 묘하게 날 내려다보는 느낌이 난다. 사람 손바닥에 올려놓고 굴리는 느낌. 하긴 저런 재주 가 없었으면 지금껏 뒤 구린 짓하면서 살아남지도 못했을 거다.
갑자기 전소연이 내 손을 덥석 쥐었다. 어어하는 사이 조미연이 앉아있는 곳으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뭐야, 왜 이래. 손을 빼내려는 순간 소연이 가슴팍을 퍽 밀쳐서 그대로 침대에 주저앉고 말았다. 헐. 졸지에 조미연과 붙어앉게 된 나는 바늘방석에 떨어진 것마냥 안절부절 못했다.
“왜 이렇게 오두방정이야. 화장실 가고 싶냐?”
분명히 알면서 놀리는 거다. 조미연이 뭔 짓을 했는지, 나한테 어떻게 대했는지 대충은 알면서도 당황하는 게 보고 싶으니 저러는 거다. 그걸 증명하듯 전소 연은 짓궂게 웃고있었다. 저 왼팔의 새까만 손톱이 무서워 제대로 항변도 못하겠고, 멍청하게 앉은 자리만 조금 옮길 수밖에 없었다.
“민니야. 너 체력 좋니?”
뜬금없는 질문이다. 내 체력... 보육원에서 온갖 잡일 다 떠맡고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언니들이랑 놀러나갔던 과거를 떠올리며 한참 고민했다. 밤새고도 이틀 은 버텼으니 좋은 편이겠지?
“네 좀.”
“오, 자신감 넘치는데.”
“...불안하게 하지 마세요.”
“눈치도 빠른걸?”
“아 진짜.”
전소연이 키득거리는 순간 조미연이 예의 그 한숨을 뱉었다. 힘없고 가벼워 언제라도 증발할 것 같은 숨소리. 무심코 돌아보자 또 눈이 마주친다. 그런데, 어 느새 홍채가 샛노랗게 변해 있었다.
“아...”
칼날같은 동공을 보자마자 몸이 굳는다. 도대체 저 눈이 언제, 어떤 이유로 변하는지 모르겠고, 그래서 더 두려웠다. 내가 심히 당황하는데도 조미연은 파충 류의 눈을 거둘 생각이 없어보였다. 어쩌면 일부러 저러는 것 같기도 했다. 날 겁주려고.
“왜 애한테 그래.”
“몰라서 물어?”
“그래도 적당히 해. 이제부터 매일 붙어있을 거잖아.”
뭐?
“나는 싫다고.”
조미연이 벌컥 화를 낸다. 분명 격정적인데도 묘하게 나른하다는 점보다, 방금 들은 말이 더 놀라웠다. 매일 뭘 해? 소연을 올려다보자 어깨를 으쓱하며 천연 덕스레 웃는다. 제발 그만 좀 웃으라고 하고 싶었다.
“김민니 축하해. 들어오자마자 우리 극단 메인 모시게 됐네.”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소식이다. 조미연도 나도 이 결정을 반가워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조미연은 거의 자리를 뛰쳐나갈 기세였다. 마냥 흐릿하던 얼굴에 선명한 불쾌감이 떠올라 있었다. 나라고 좋은 줄 아나. 똑같이 인상을 구기고 싶었다. 저놈의 손톱만 아니면...
“저는 신참인데 뭘 믿고 맡겨요? 그냥 다른 사람 써요.”
“왜 스스로 깎아먹으려고 안달이야. 다들 탐내는 자린데 감사히 여겨.”
“아니, 어차피 내가 싫기는 조미연도 마찬가지...”
실수했다. 이름을 부르자 성난 눈빛이 곧바로 날아온다. 감히 경멸해 마지않는 인간 따위가 건방지게 굴었다고 화를 내는 거다. 이 상태에서 뭘 할 수 있지? 일을 돕다 단장 꼴이나 나지 않으면 다행이다. 전소연 말로는 죽이지 않는다곤 하지만 조미연은 이미 한 번 날 위협했다. 그것도 십 분 전에.
혹시 장난인가 싶어 전소연을 한참 뚫어져라 봤지만 짓궂게 키득거리기만 할 뿐, 말을 물러주진 않았다. 쪼개는 거 보면 날 골탕 먹이는 건 확실한데, 거짓말 은 아니라고? 정말로 날 조미연의 품에 내던질 셈이다. 날더러 한 달 내로 부고나 전하지 말라며 악담을 퍼붓던 원장 얼굴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어쩌면 악 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던 모양이지.
“아, 제발요. 솔직히 말하면 그 꼴 보고 나니까 옆에 못 있겠어요. 무섭다고요!” “니 의견은 상관없어. 내가 정했으니까.”
“무슨 기준으로요?”
“공연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기준.”
“전 공연도 안 하는데?”
“할 건데?”
“에?”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내 심정도 모르고 웃기다고 또 깔깔댄다. 계약서에 그딴 내용 없었는데. 지금 와서 계약 따지는 것도 웃기지만, 여튼 그것만은 절 대 안 된다. 불특정다수에게 얼굴 팔리고 싶지는 않다. 내가 아예 뛰쳐나갈 기세로 일어서자 소연이 어깨를 꾹 눌러 앉혔다. 체구는 작은데 힘이 엄청났다.
“걱정 마. 마스크 정돈 쓰게 해줄게.” “마스크? 눈은?”
“그건 안 돼.”
“왜요!”
“너랑 조미연, 얼굴 합이 딱 맞거든. 분위기 장난 아냐. 특히 니 눈이.”
개소리다. 그냥 개소리다. 얼굴 합이 뭐 어쨌다는 거야. 황당해서 뭐라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는 와중에 조미연은 두통이 오는듯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소연이 내게 손짓한다.
“뭐해? 부축해.”
“누굴요.”
“당연히 미연이지. 얘 시도때도 없이 편두통 오거든. 저혈압도 있으니까 니가 수시로 살피면서 괜찮은지 봐야해.” “무슨 수인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리자 조미연이 휙 고갤 처들었다. 송우기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내가 수인을 입에 올리기만 하면 못마땅해하는 것 같다. 전소연만 예외인 가? 도대체 무슨 관계인지 알 수가 없다. 수인이 완전한 인간 모습으로 둔갑하지 못하는 것도, 튼튼하긴커녕 허약체질에 잔병 달고 다니는 것도 이상해 죽겠 는데 묻지도 못하게 한다.
“...치워.”
어쩔 수 없이 일어나 손을 내밀자 오른손으로 탁 쳐내버린다. 슬슬 짜증이 났다. 진짜 내가 힘만 셌어도 한마디 했을 텐데. 전소연에게 어떡하냐는 눈빛을 보 내자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한다.
“니 담당이니까 알아서 해. 수완 발휘해보시든지.” “원래 직원 관리를 이렇게 해요?”
“내가 워낙 바쁜 몸이라. 얼른 데리고 나가.”
나는 몰라도 전소연은 조미연과 친밀해 보이는데 이렇게 억지부려도 되나? 표정을 살폈지만 전소연을 미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불가해한 관계. 이 서커스단 에 들어온 후 평범하게 한번에 이해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굳이 꼽자면 송우기 정도?
조미연은 기어이 나와 따로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다가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휘청거렸다. 부축해주고 손톱에 뚫릴지, 놔뒀다가 조미연이 쓰러진 후 갈궈질 지 고민하던 나는 전자를 택했다. 설마하니 팔 잡아줬다고 죽이지는 않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내가 왼팔을 잡고 어깨에 두르자 조미연은 잠시 째려보더니 오 른쪽으로 턱짓했다.
“잡을 거면 이쪽으로 와. 왼팔 만지지 마.” “아, 예...”
조미연의 허리는 생각보다 가늘어서, 내 한품에 쏙 들어와 안겼다. 그러고도 공간이 남는다. 서커스의 메인이네 어쩌네 하더니 밥은 제대로 먹는 건지 의문이 었다.
“질문 하나 해도 돼요?”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어느새 금안 대신 자리잡은 혼탁한 눈동자가 잠시 내게 머물렀다. 난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제 냄새 싫다면서요. 부축 받아도 되나?”
말이 끝나기도 전, 화들짝 놀랄 일이 생겼다. 조미연이 옅게나마 웃은 것이다. 분명 가느다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재차 보기도 전에 사라져버렸지만 분명 한 미소였다.
“너... 멍청하구나.”
호의적인 웃음은 아니었지만.
“나름 똑똑하단 소리 몇 번 들었는데.”
“아직도 내 종을 몰라?”
“...파충류 아니에요?”
“그게 네 한곈가봐.”
마지막 말은 묘하게 비꼬는 감이 있었다. 남은 건 자존심밖에 없어서 울컥 짜증이 치솟았지만 꾹꾹 참았다. 오늘 밤에 튄다. 앞으로 볼 일 없다. 세뇌하듯 읊 조리고 나서야 조금 진정되었다.
하지만 나 혼자 진정하면 뭐해, 조미연이 다시 건드리는걸. “넌 며칠 내로 내쳐질 거야. 둔한 사람 질색이거든.”
참 나. 누가 네 심부름 한대? 벌써 맘속으로는 욕을 열 번도 더 했다. 물론 현실의 나는 조미연을 고이 침대까지 모셔드린 뒤 인사 없이 나오는 게 반항의 전부 였다. 조미연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은 채 조용히 돌아누웠다. 뭐 부려먹는다더니 가타부타 말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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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처박혀있기가 눈치보여서 해 질 때까지 한참을 돌아다녔지만, 아무도 내게 뭔갈 시키지 않았다. 친하지도 않은 인간이라 그런가 했는데, 알고보니 조미 연 때문이었다. 내가 그 파충류 인간을 거들게 됐다는 소문이 벌써 쫙 퍼진 것이다. 때문에 수인이든 소수의 인간이든 다 날 흘끔거리다 시선이 마주치면 후 다닥 자릴 피하기 바빴다. 아, 기분 나빠. 보육원에선 내가 인기의 중심이었는데.
“저기.”
우기는 바쁜지 보이지도 않고, 소외감에 혼자 나무 밑동에 앉아 시간을 죽이는데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서수진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 안 피 하네.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반가웠다. 어색한 사이지만.
“밥 먹으러 안 와?”
수진은 내 옆에 걸터앉더니 제법 다정한 말을 툭 던졌다. 여기 사람들은 인상만 보고선 성격을 파악할 수가 없다. “우기 기다려요. 혼자 먹기 뭐해서.”
“우기? 벌써 먹고 갔는데?”
“...네?”
수진이 어리둥절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한참 전에 먹고 또 일하러 갔어. 몰랐던 거야?” “네... 이상하다. 걔가 그럴 애가 아닌데.” “그렇게 잘 아니?”
“...어, 뭐라고요?”
“벌써 그만큼 걔를 파악했냐는 뜻이야.”
난 잠시 말을 잃고 벙쪄있었다. 허점을 찔린 것처럼, 뭐라고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냥, 나에게 하는 행동만 보고 그리 생각했는데. 그게 통째로 연기일 리도 없고 당연한 추론 아닌가? 하지만 가장 이상한 점은, 이 말을 당당히 입 밖으로 낼 수 없다는 점이었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우리 사이 정적을 채웠고, 수진은 가만히 날 응시하다가 먼저 털고 일어섰다.
“같이 가자. 눈초리 신경쓰여서 그러면 옆에 있어줄게.” “감사합니다...”
친절하게도, 수진은 정말 식사 시간 내내 곁에 있어주었다. 그 덕분인지 날아드는 눈초리도 훨씬 줄어들었고, 음식도 지금까지 먹은 것 중 가장 나았다. 하지 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맛은 꺼림칙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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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기분으로 밤을 맞았다. 맘같아선 좀 자고 싶었지만 왠지 송우기가 마음에 걸렸다. 어차피 밤엔 내 근처에서 잘 거면서 왜 이러는 거야. 그 애가 날 피 한다고 짐작할 근거는 없었지만 계속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보통 그런 예감은 항상 적중한다.
“우기야.”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들어온 우기를 부르자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게 뚝 그쳤다. 우기는 잠시 그 큰 눈을 데록데록 굴리다가 씨익 웃어보였다. 하지만 어 딘지 어색하다. 저렇게 웃지 않았는데.
“어어, 왜?”
“왜라니. 말도 못 걸어?”
“그냥 부르길래... 전소연이랑 얘긴 잘 했고?”
“뭐, 그렇지.”
잠시 어색한 정적. 우기는 애써 태연한 척 이불 속으로 들어갔지만 이제 점점 확신할 수 있었다.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무슨 소리야.”
“아니면 기분 나쁜 일이라도?”
“아이고. 아니야! 이 바보야.”
우기가 내 쪽을 보고 휙 돌아눕더니 아예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큼성큼 다가와 맞은편에 앉는다. “원래 내가 피곤하면 이래. 기분파거든.”
“그럼 다행이고.”
“오늘 수진이랑 있었다며. 다음부턴 나 불러도 돼. 안 바쁘면 있어줄게.”
“수진... 선배랑 있던 건 어떻게 알았어?”
“야, 여기 소문 진짜 빠르다니까. 말 안 했냐?”
우기가 키득키득 웃었다. 속편한 듯한 모습을 보니 조금 안심되긴 했다. 그러다 이상해지는 것이다. 애초에 오늘 도망칠 거면서 왜 우기의 반응을 유심히 지 켜보고 있는지. 감이 불길했다.
“옛날에 전소연이 단장 먹을 라면에 침 뱉은 적 있었거든. 그것도 소문 다 났어. 웃기지. 무섭지?” “어 좀. 감시라도 하나.”
“작은 동물들은 어디 숨어있을지도 모르지. 뭐야, 농담이야. 침대 밑을 왜 확인해.”
진심으로 걱정돼서 본 거였는데 우기는 그것마저 재미있어했다. 나도 같이 따라 웃다보니 다른 단원들이 하나 둘 들어왔고, 조용히 하라는 압박에 자연스레 입을 다물게 됐다. 우리 둘 다 잠을 청하러 이불 속으로 들어갔지만 난 눈을 감지 않았다. 적당히 누워있다가 야심한 새벽에 도망칠 작정이었다. 그렇게 눈에 힘을 주고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
... 김민니. ...... 일어나. ...
지금 내 방으로 와.
......
뭐지?
분명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는 새 잠들어버렸다. 철렁해서 이불을 걷어차며 일어났는데 다행히 해가 뜨기엔 한참 남은 시각이었다. 미리 간소하 게 챙긴 짐가방을 집어들고 일어서는 순간, 기억 저편에 남은 아득한 목소리가 번개처럼 떠올랐다.
내 방으로 와.
그건 분명히 조미연의 목소리였다. 내가 하다하다 걔 꿈을 꾼 건가? 짜증이 치솟아 그냥 잊어버리려고 했지만, 뒷덜미에 서늘하게 머무는 찝찝함이 있었다. 꿈 치고는 목소리가 너무 생생했기 때문에.
“......”
가방까지 들고 나와 천막들 한가운데서 한참이나 서성였다. 가볼까, 말까. 이성은 당연히 뒤도 돌아보지 말고 멀리멀리 도망가라고 외치고 있었다. 지금 아니 면 기회 없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언제나 비합리적인 미련이 뇌를 사로잡는 순간도 있는 법이다. 지금이 그랬다. 조미연의 나른한 눈빛과 똑 떨어지는 콧날 과 조근조근 사람을 비웃는 목소리 따위가 계속 주위를 맴돌았다. 날 데려가려는 망령처럼.
결국 조미연의 침실로 발을 옮겼다. 걸어가면서도 살면서 벌인 짓 중 가장 멍청한 짓이라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도망쳐야 해. 가방을 쥔 손에 땀이 흥건해 졌지만 돌아설 수 없었다. 내 손이 먼저 천막의 입구를 열었기 때문에.
“......”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도 안 되는 목소리만으로 이 새벽에 찾아왔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조미연을 부르지도 못했다. 역시 그냥 돌아갈까. 그래, 들키기 전에 가자. 충동은 일을 저지른 후에야 서서히 사라져갔고, 난 그대로 물러서려 했다.
“헉...”
천막 한가운데 똬리를 튼 채 날 지켜보던 뱀만 아니면.
뾰족한 삼각형 머리를 가진 그것은 샛노란 눈으로 날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혀를 두어 번 날름거리더니 갑자기 그마저도 멈추고 강렬한 시선을 보내온 다. 멍청하게도 뱀에게 인간 같은 지능이 있나 상상할 정도로 집요한 시선이었다.
내 가장 큰 문제는 위험한 순간에 기절한다거나, 굳어 움직이지 못한다는 거다. 이걸 서커스단에 온 지 이틀만에 절절히 체감하고 있다. 기시감이 드는 묘한 눈동자에 사로잡힌 발목은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았고, 이러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싶었다.
그 순간 뱀이 지면으로 안착했다. 뭘 하려는지 깨닫기도 전에 그것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나에게 오겠다는 의지만이 아닌, 살기 마저 느껴지는 기민한 속도였다. 시시각각 커지는 뱀 대가리에 어젯밤 꿨던 꿈이 다시금 펼쳐지는 것 같았다.
“아!”
뱀은 순식간에 내 다리를 휘어감았고, 형언하기 어려운 촉감이 몸을 타고 올라왔다. 발목에서 허벅지로, 허벅지에서 허리로, 그리곤 마침내 내 눈 바로 앞까 지. 몸통을 옥죄어 자리잡고 눈높이를 맞춘 그것은 해독할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노렸다. 특이하게도 그 순간까지 혀 한 번 날름대지 않으면서.
대체 조미연은 어딨지? 방에 이런 위험한 걸 내버려두고 어딜 간 거야. 뇌가 굳어서 제대로 사고할 수 없었다. 당장 뱀을 낚아채서 떨어뜨려놔야 하는데, 그런 상식조차도 공포 앞에선 무력했다. 그리고,
뱀 대가리가 내 목덜미를 덮쳤다.
4.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 사실 몇 초간은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생각이 멈추고 움직임이 멎었으니까. 하지만 수 분이 지난 후에도 나는 살아있었다. 이렇게 느 낌없이 사람 죽이는 뱀도 있나? 대가린 분명 독사처럼 생겼는데. 조심스레 눈을 떠보니 아까처럼 날 대놓고 정면에서 응시하는 눈동자가 보인다. 너무 아찔 해서 다시 질끈 감아버렸다.
석고상처럼 굳어있은 지 일 분쯤 지났을까, 뱀이 다시 몸을 타고 스르르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배가 안 고팠나. 하지만 길기만 길고 전체적으론 얄쌍한 게 며 칠 굶은 것처럼 보이는데.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으니 뱀이 어딘가로 움직였다. ...거긴 미연의 침대가 있는 곳이었다.
“아, 안 돼!”
왜 그 얄밉고 사악한 사람을 구하러 뛰어갔는지 모르겠다. 그냥 발이 먼저 움직였다. 침대를 가린 자그마한 커튼을 황급히 열어젖히다가 약간 찢어버리기까 지 했다. 당시엔 그것도 몰랐다. 다급했고, 눈에 보인 광경에 혼란스러워졌으니까.
“소리 지르지 마.”
내 예상과 달리, 침대엔 사냥하는 뱀도 아파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새하얀 등을 반쯤 드러내고 모로 누워있는 조미연만 있을 뿐. 심지어 돌아보며 타박까 지 한다. 잠시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다가 절로 입이 딱 벌어졌다.
“뱀이예요?”
“정말 끝까지 보여줘야 알아채네. 바보같긴.”
조미연은 산뜻한 미성으로 조곤조곤 사람을 깔아뭉갰다. 좀 모를 수도 있지.
뱀인 걸 알고 나니, 그동안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행동들이 한꺼번에 이해되기 시작했다. 다짜고짜 사람 목덜미를 핥던 것, 그걸로 인간임을 바로 알아챈 것, 인간 냄새가 싫다면서 내 부축은 가만히 받았던 것. 혀로 냄새를 탐지하기 때문에 그런 거였다. 핥거나 날름거리지만 않으면 별 감각이 없으니. 젊은 수인치 고 저혈압을 달고 사는 것도 뱀이기 때문이고, 그러니 자연히 체력이 바닥을 길 수밖에 없다. 특유의 금안과 왼팔의 비늘도, 이제보니 왜 알아채지 못했나 싶 을 정도다.
하지만 뱀만 완전한 인간화를 못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수인들은 맘만 먹으면 부분적으로 동물적 특징을 드러낼 수 있지만, 조미연처럼 자기 의지 로 어찌할 수 없는 경우는 처음 본다. 옷까지 수선해서 가리고 다닐 정도면 분명 일부러 비늘을 드러내는 건 아니다. 나보고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까지 했으 니. 그럼 왜? 이곳에 오면서 질문만 늘어간다.
“저기요.”
“왜.”
“옷 좀...”
인간으로 변한 직후라 조미연은 아무것도 안 걸치고 있었다. 이불이 두꺼워서 다행이다. 그러고보니 꽤 따뜻한 날씨에도 혼자 솜이불을 쓴다. 밤엔 아직 기온 이 낮으니까 그런 거겠지.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다. 앞으로의 생활이 아주 귀찮아지겠구나 싶었다.
잠깐, 앞으로라니...
난 분명 도망쳐야 한다. 한 손엔 아직도 짐가방이 들려있다. 그런데 호기심에 이곳에 왔다가 꼼짝없이 조미연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이제라도 재우고 나가야 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이불 끝자락을 잡아당겨 미연의 턱까지 올려주었다. 조미연은 고마운 기색도 없이 그저 가만히 시선으로 손을 좇았다. 도통 무슨 생 각하는지 모르겠다.
“아침 되려면 한참 멀었으니까 자요 얼른.”
“그럼 너는?”
“저도 자야죠.”
“무슨 소리야. 나랑 연습해야지.”
“연습이요? 지금요?”
조미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표정이 정말 천연하다. 순한 눈매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게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인 사람.
“자야지 무슨 연습을 해요.”
“난 밤이 편해. 낮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어디 돌아다니기도 싫어.”
그러고보니 조미연은, 맨 처음 식당에서 지나치듯 마주했을 때도 서둘러 자릴 떴었다. 인간임을 몰랐는데도 그랬던 거다. 기본적으로 극소수를 제외하곤 경 계부터 하는 성격 같았다. 무시하는 건 역시 내가 인간이라 그런 거고... 짜증나네. 묘하게 인상을 찌푸리자 조미연이 고갤 기울인다.
“싫어?”
“당연하죠. 피곤해요. 달밤에 체조도 아니고 이시간에 무슨.”
“어쩔 수 없어. 너 앞으로 잠 못 자.”
“대체 왜 이러세요?”
“너 도망 못 가게 감시하려고.”
조미연이 그 말을 하는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어떻게 저런 무해한 음성으로 ‘니 인생 종쳐주겠다’라는 말을 하지? 눈동자는 여전히 까매서, 소리만 없애면 꼭 자장가라도 불러달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얼른 따라와.”
조미연은 대답할 틈도 주지 않았다. 옷을 걸치고 망설임없이 천막을 나가버린다. 반쯤 농담일 줄 알았는데 정말 밤부터 아침까지 날 감시할 셈이다. 웃긴 건 조미연이 나가면서 분명 내 짐가방을 봤다는 거다. 뻔히 파악하고도 무시하고 있다. 그 점이 가장 무서웠다.
“저기요.”
“.......”
“미, 미연 씨? 미연 선배? 미연... 님?”
“......그냥 저기요라고 해.”
“아무튼요. 뱀이면 밤에 활동하기 어려운 거 아니에요?”
어떻게든 빠져나갈 핑계를 만들어야겠기에, 허둥지둥 따라붙으며 되는 대로 내뱉었다. 쭉 무시하던 미연은 마지막 말에 조금 관심이 생겼는지 고개를 미세하 게 이쪽으로 틀었다. 딱 손톱만큼.
“그게 무슨 상관이야?”
“뱀은, 그러니까 체온이 막 변한다면서요. 그럼 밤에 이렇게 돌아다니면 안 되잖아요. 저혈압이라면서요. 체온까지 뚝 떨어지면 컨디션이 아주 망할 거 아니 에요. 듣고 있어요?”
난 손짓 발짓 다 동원해가며 미연을 만류했다. 도망도 도망인데 수면시간을 모조리 뺏긴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체 되라고? 초주검 상태로 배회하느 니 보육원에 돌아가고 만다. 내 말을 들은 건지 만 건지 조미연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다 내 언성이 조금 높아지자, 마침내 입술을 뗀다.
“나도 싫은데 어쩌겠니. 니가 호시탐탐 도망칠 기회만 노리는걸.”
하면서, 조미연이 왼손을 휘두른다. 검은 손톱이 순식간에 내 가방을 스치고, 제법 두꺼운 천이 갈기갈기 찢겨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안에 들어있던 몇 안 되 는 소지품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조미연은 그 꼴을 만들어놓고도 태연자약하게 앞서나갔다. 나만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공포심에 굳어있을 뿐이었다. 뭐가 가방을 건드리는 느낌도 없었는데 어 느새 찢겨있다니... 새까맣게 빛나는 손톱이 얼마나 날카로운 건지 감도 안 잡혔다.
결국 조용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허튼 짓하면 가방과 사이좋게 같은 꼴이 될 것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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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연은 야영지의 가장 구석자리에 있는 천막으로 날 이끌었다. 지나가는 길에 무심코 옆을 돌아보니, 바로 근처에 단장의 시체를 발견했던 천막도 있었다. 이상하게 뭔가 낯익다 했는데, 세상에. 거긴 첫날 송우기가 신입 출입금지라고 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비싼 소품창고라더니 피로 샤워하는 곳이었잖아. 이런 음습한 일이 벌어지는 천막만 구석에 몰아놓고 멀쩡한 척했다니. 점점 더 우기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확인이 안 선다.
“이거 껴.”
갑자기 조미연이 뭔가를 이쪽으로 던졌다. 받고 보니 두터운 장갑이다. 시켜서 끼긴 했는데 좀 작고 조이는 게 영 불편했다.
“이거 사이즈가 안 맞는데요.”
“당연하지. 내 전 조수가 썼던 거니까.”
“......그분은 지금 어떻게 됐어요?”
조미연이 말없이 입을 벌린다. 손가락으로 입 안을 가리키더니, 그대로 쭉 내려가 배를 톡 톡. 헐. 장갑을 내던지고 나가려하자 또다시 슬며시 웃는다. 이번이 두 번째.
“농담이야.”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해요!”
“네 간이 작아서?”
조미연이 저렇게 말하니까 관용적인 표현도 문자 그대로의 의미처럼 들린다. 꼭 내 간을 빼먹을 것 같다. 오들오들 떨면서 장갑을 주워 끼자마자 미연이 가까 이 오라고 손짓했다. 이렇게 움직이기 싫은 적은 처음이다.
“난 무대에 올라가면 거의 안 움직이니까, 네가 다 해야해. 실수하면 분위기 확 죽으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뭘 해야 되는데요?”
“...순서대로 할까?”
미연이 한쪽 벽에 가득 쌓여있던 상자 중 하나를 열었다. 그 안엔 뭐가 많이도 들어차 있었는데, 전부 조미연 혼자 사용하는 소품처럼 보였다. 애초에 이 천막 자체가 저 사람 혼자 편하게 연습하라고 만들어진 곳 같다. 전소연이 조미연을 특별히 아끼든지, 조미연이 서커스단에 벌어다주는 수익이 제일 크든지 둘 중 하나겠지. 그래서 내심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얼마나 대단한 묘기를 보여줄지.
그런데 조미연이 다짜고짜 꺼내든 것은 날이 첨예한 단도였다. 어딘가 낯익은 손잡이의 모습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거 단장 죽일 때 쓴 거 아냐? 다행히 조미연은 그걸로 날 찌른다거나 하진 않았다. 위험하게 예고도 없이 던지긴 했지만.
“손 베일 뻔했잖아요...!”
“내가 등장할 때, 넌 그걸로 날 찔러야 돼.”
앞뒤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찌르란다. 설명하는 표정이 한없이 덤덤해서 가짜 고무칼인 줄 알았다. 시험삼아 옆에 굴러다니던 나무 상자를 찔렀더니 한방에 콱 박힌다.
“...농담이죠?”
“아니니까 잘 듣기나 해.”
조미연이 왼쪽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올렸다. 사람 몸에 붙어있는 비늘이라니, 언제 봐도 극심한 위화감이 든다. 아름답지 않았다면 오래 보고 있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게 조미연의 얼굴인지 저 비늘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오래 마주하긴 둘 다 싫었으니.
내가 멍하니 감상에 빠져있는 동안, 조미연은 어느새 근거리까지 다가와있었다. 칼을 쥔 내 손을 옷소매만 잡아서 들어올리고, 똑바로 쥐라고 시범까지 보여 준다. 시키는 대로 쥐었더니 칼 끝을 제 왼팔에 찔러보라고 종용한다. 내가 선뜻 휘두르지 못하자 답답하다는 듯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린다.
“괜찮아. 일단 찔러봐.”
“피 나면 어떡해요. 감옥 가기 싫거든요?”
“안 찌르면 너 감옥 가기 전에 내가 저승 보내버린다.”
그러고보니 조미연은 독이 있다. 아까 뱀 상태에서 입을 벌렸을 때 작은 이빨들 사이에 선명히 자리잡은 길다란 독니를 봤다. 인간 상태에서도 그게 있는진 모르겠지만 수틀리면 뱀으로 변해 덮치면 그만이다.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칼을 휘둘렀다. 눈 딱 감고.
“...어?”
날이 팔 속 깊이 푹 박힐 거라고 예상했는데, 비늘에 가로막혀 그대로 튕겨져나갔다. 뱀 비늘이 이정도로 단단한가? 믿을 수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계속 푹푹 찔러보고 있으니 조미연이 칼을 빼앗아간다.
“앙심 품었니?”
“시, 신기해서...”
왼쪽 소매를 다시 내린 미연은 나에게서 몇 발짝 물러섰다. 그리곤 명백히 고의적으로 날이 내 쪽으로 향하도록 칼을 던져준 다음 이렇게 말했다.
“내 왼팔 비늘은 평균보다 단단해서, 도끼로 찍지 않는 이상 웬만한 공격엔 안 뚫려. 뱀으로 변했을 때 머리 바로 아래, 그중에서도 왼쪽이 딱 그 부위야. 네 역할은 칼로 정확히 그쪽을 찌르는 것.”
“너무 위험한데요? 잘못하면 그대로 죽잖아요.”
“그러니까 계속 연습해서 동작을 맞춰야지. 그리고 찌를 타이밍엔 내가 가만히 있을 거야.”
서막치고는 상당히 위험하다. 하지만 그만큼 화려하기도 하겠지. 내가 갑작스러운 뱀의 습격에 허둥대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마침내는 칼로 그것의 목을 자르려 하지만, 비정상적으로 단단한 비늘에 막혀 실패한다. 관객을 놀래키기에 딱 좋은 공연이다.
“내 옷은 알아서 정리해놔.”
조미연은 제 할 말만 하고 뱀의 형상으로 변해버렸다. 입고 있던 옷가지가 바닥으로 푹 꺼진다. 주섬주섬 모아다가 빈 상자에 넣어놓자마자 위협적으로 달려 들어온다. 치사하게.
나는 한참이나 뱀 모습을 한 조미연과 씨름했다. 인간일 땐 한도끝도없이 무기력하면서, 뱀으로는 어찌나 날랜지 움직이는 걸 볼 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움직이는 패턴이 완전히 똑같다는 거다. 몇 번 반복하고 나니 대충 피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무대에서 보여주려면 여기에 칼을 휘두르고, 쳐내고, 마지막 으론 정확한 위치에 꽂아야한다.
칼을 몇 번 잘못 찔러서 아차한 순간도 많았지만, 번번히 조미연이 잽싸게 피한 덕에 사고가 나진 않았다. 심지어 한 번은 뱀의 목을 잡아채기도 했다. 일부러 봐준 것 같지만 어쨌거나 이것 때문에 내가 우쭐해진 게 분명했다. 경계가 느슨해져 실수로 내 왼손을 찔렀으니.
“아야야...”
베인 손등에서 붉은 피가 주륵 흘러나왔다. 뱀 머리가 그쪽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휘감고 있던 내 허리에서 내려와 바닥으로 향한다. 내가 손을 쥐고 끙끙 앓 는 사이 조미연은 뒤편에서 옷까지 도로 걸치고 가까이 다가왔다.
“너 바보야?”
다친 사람한테 하는 것치고 말투가 냉랭하다. 너무하네 싶어 조금 서러워진 순간이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 내 손을 살피던 미연이 품 속에서 흰 천을 꺼내 손 등에 둘둘 말기 시작했다. 조금 감동받으려는 찰나, 천 끝을 심술궂게 꽉 잡아당겨서 감상이 와장창 깨져버렸다. 친절할 거면 끝까지 친절하든가.
“오해하지 마.”
“뭘요?”
“인간 피냄새 맡기 싫어서 막은 거야.”
묻지도 않은 변명까지. 왠지 웃음이 나왔지만 꾹 눌러 참았다. 웃으면 진짜 죽일 것 같아서.
대충 수습한 후, 더 이상 합 맞추긴 어렵다고 판단한 조미연은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뱀 상태에서 먹잇감을 조이는 힘으로 단단한 물건을 파괴하는 내용이었 는데, 얇은 합판부터 시작해서 쇳덩어리나 바위까지 등장하길래 난 또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물건을 들어주는 내 손이 눈에 띄게 덜덜 떨리자 조미연은 특유 의 한만한 미소로 사람을 비웃었다.
“이걸 믿니?”
그러면서 보여준 바위덩어리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소리가 울리지 않도록 흡음재를 잔뜩 채워넣은 가짜 소품이다. 이 사기꾼들.
여튼 그렇게 별별 구경을 다 하고, 마지막으로 딱 하나 남았다는 소식에 얼굴이 절로 펴졌다. 조미연은 싱글벙글 웃고 있는 나에게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3단 카트를 끌고 오라 시켰다. 음식점에서나 쓰는 바로 그 물건이다. 맨 위에는 은빛 접시와 반구형 덮개까지. 의아한 채 카트를 대령하자 조미연이 고개를 까딱 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덮개를 열어. 그리고 정중히 인사한 다음 내려가면 돼.”
마지막 순서에선 이게 내 역할의 전부란다. 얼떨떨했지만 시키는 대로 덮개부터 열어보니 접시 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본 공연 땐 뭐가 있나. 고개를 갸웃거 리며 인사하는 시늉까지 마치자 조미연이 또 비웃었다. 왠지 창피했다.
“이제 가자.”
곧 해가 뜰 시간이었다.
-
돌아가는 길, 여명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두어시간쯤 있으면 단원들이 일어나고 또 하루가 시작된다. 잠도 못자고 거기 낄 생각을 하니 머리가 띵했다. 조미연은 마음껏 쉬기라도 하지 난 대책이 없다.
불만스러운 마음으로 미연의 천막까지 다다르자,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손짓한다. 또 뭘 시키려고. 내가 잠시 망설이자 미연이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얼떨결 에 침대까지 이끌려간 나는 등을 보이고 드러눕는 미연 뒤에서 우물쭈물 서있었다.
“뭐하니? 안 눕고.” “예?”
내가 들어도 우스울 정도로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벌써 목덜미에 열이 후끈후끈했다. 조미연은 그러거나 말거나 쭉 가벼웠고, 맥이 없었다.
“뱀은 체온 조절 못하는 거 안다며. 떠먹여줘야 해?”
“아...”
조미연은 지금 내게 열을 나눠달라고 하고 있다. 만난 지 3일 된 사이에 이게 무슨. 황당하고 부끄러워서 망설이고 있자 나른한 목소리로 덧붙인다. “나 저체온증으로 죽으면 전소연이 가만 안 둘걸.”
협박인지 농담인지 얕은 지식으론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억울해서라도 뱀에 대한 자료를 뒤져보게 생겼다. 무의식적으로 한숨을 푹 내쉬고 이불을 걷어올리자 조미연의 가느다란 허리가 눈에 들어왔다.
“...꼭 안아야 돼요?” “추워.”
조미연은 봐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밀착하자 서늘한 온도가 피부에 닿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낯부끄러운 자세인지 모르겠다. 그에 반해 조미연은 감정이라는 게 있긴 한 건지, 태연히 몸을 맡기고 새근새근 고른 숨을 뱉었다.
“저기요.”
“왜.”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요?”
“나 잠들 때까지.”
목소리가 한없이 평온하다.
“자요?”
“...말 걸지 마.”
“어제는 저 싫다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이러고 있어요?”
분명 사람 목 조르기 직전까지 위협하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이러고 있으니 납득할 수 없는 건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조미연은 나의 아 주 합리적이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질문에 웃음을 흘렸다.
“가르쳐줘?”
“네.”
“네가 만만해서.”
“...뭐라고요?”
“처음 인간인 거 알곤 무서워서 거슬렸는데, 이젠 괜찮아. 너 겁쟁이니까.” “아니......”
“아까 뱀으로 습격했을 때 멍청하게 서있는 거 보고 확신했어. 넌 바보야.”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온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 짓 못할 걸 알고 경계를 풀었다는 얘기다. 확 지금 덤벼? 혼자 분노하고 있으려니 조미연이 잠들기 직전의 목소 리로 조용히 읊조렸다.
“그렇다고 좋아졌단 건 아니니까, 까불지 마.”
“......”
“씩씩거리지도 말고.”
언제나처럼 지 할 말만 하고 대화를 끊어버린다. 나는 한참이나 혼자 화를 삭이다가 조용히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돌아와서 확인한 침대 옆 바닥엔 옅은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
이어지는 사흘 동안은 수면부족의 나날이라 칭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낮엔 단원들 눈치 보며 아무 심부름이나 맡아서 하고, 밤엔 조미연과 연습하며 극심한 피곤에 시달렸다. 공연 당일날 아침 내 눈에 드리운 시커먼 그림자에 우기가 질겁하며 유령 수인이냐고 농담할 정도였다. 유령 수인이라니. 세상에 그딴 게 어딨어. 어이가 없다가도 거울 보면 웃음이 픽픽 나왔다. 진짜 도깨비같다.
어쨌건 공연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시작 시간에 맞춰 관객이 슬금슬금 찾아들었다. 어떤 식으로 진행하나 했더니, 야영지 밖 공터에 따로 천막과 무대를 설 치하고 그곳에서 공연하는 식이었다. 가끔은 폐건물을 쓴다고도 했다.
“관객들 눈이 퀭하지?”
소품을 나르는 날 불러세운 전소연이 그렇게 말했다. 아무렴 나보다 퀭할까 싶어 객석을 쭉 둘러봤는데, 조금 오싹해지고 말았다. 피곤해서 초점을 잃은 눈동 자들이 아니었다.
“자본 빵빵한 서커스면 모르겠지만, 이런 소박한 곳에 오는 인간들 중엔 공연이 목적이 아닌 새끼들도 있어. 수인에 집착하는 놈들.” “그런데 함부로 들여도 돼요?”
“뭐 작정하고 위험한 짓을 하진 않으니까.”
“...이런 얘길 왜 저한테 해요?”
“너 또 얼타고 있다가 누가 무대난입해도 쳐다만 볼 거 같아서 그런다 왜.” 전소연이 장난스럽게 어깨를 툭 쳤다. 정말 싱거운 이유다. 의심스러울 정도로.
관객 쪽을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공연 준비를 마쳤을 땐 이미 저녁이었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가 천막 안에도 붉은 색채를 드리웠다. 그 덕에 기묘한 분위기 가 더욱 살아났다. 전소연은 지금 이 상태가 딱이라며 서둘러 공연을 개시했다. 미연은 제일 마지막 순서라고 했다.
그때부터 두 시간 동안은 내 인생에서 최고로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보육원의 놀이거리란 기껏해야 우르르 몰려다니며 일탈을 일삼는 게 다였다. 하지만 처 음 보는 수인과 인간들이 나와서 자기만의 기행을 보여주는 서커스는 아무리 삼류여도 신기한 부분이 많았다.
“넷 중 어디에 있을지 맞춰보세요!”
가장 절묘했던 것은, 카멜레온 수인이 서있는 곳을 맞추는 퀴즈였다. 독특한 무늬를 가진 천 네 장을 드리우고, 카멜레온은 그 중 한 장 앞에 가서 선다. 변장 이 끝나면 무대를 가린 커튼을 치우고 그가 어디 있을지 관객이 추측한다. 아주 쉽고 시시할 거라 예상했는데 당황스럽게도 육안으로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분명 사람이 있는데도 텅 비어 보이는 것이다. 관객뿐 아니라 지켜보던 나까지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우기의 차례는 쉬어가는 느낌이었다. 안 그래도 강아지처럼 생긴 녀석이 날쌔게 움직이며 손 발 다 동원해 공을 잡는 모습에 관객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만화에서 떨어지는 접시를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장면처럼 신들린 캐치 솜씨였다. 우기가 냄새로 먹을 걸 반입한 관객을 찾아 쫓아내자 웃음소린 극에 달했 다. 서수진이 공연하는 것도 보고 싶었지만, 오늘은 서지 않는다고 했다.
“김민니. 준비해.”
마침내 공연이 거의 끝나고, 우리 차례가 왔다. 난 서둘러 마스크를 콧등까지 올렸고, 힘들다며 의자에 앉아있던 미연이 느릿하게 일어났다. 어두운 무대 뒤 편에서 벗어나는 순간, 조명이 쏟아진 미연의 얼굴은 눈부시게 화려했다. 관객들이 나지막한 탄성을 지른다. 고운 미간이 나에게만 보일 정도로 미약하게 찌 푸려진다.
“잘 해.”
섬섬한 오른손이 어깨에 얹혔다. 전소연과는 달리 힘이 실려있지 않았지만 그 무게는 더 크게 다가왔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단도를 꺼냈다.
내가 잠시 관객의 시선을 이끌고, 미연은 그 틈에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뻣뻣한 연기력으로 무대사고인 척하고 있을 때, 뱀 한마리가 미끄러지듯 등장했다. 다들 실제로 독뱀이 침입한 줄 알고 웅성거리는 순간, 미연이 예상대로 내게 달려들었다.
그 후엔 도대체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칼로 몇 번이나 엉뚱한 곳을 찌를 뻔하고, 간신히 퍼포먼스에 성공한 후엔 소품 쇠막대기가 아니라 진짜를 가져와서 미연의 심기를 건드렸다. 물론 공연을 망치면 전소연에게 뼈도 못 추릴 거라는 위기감 때문에 필사적으로 무마할 수 있었고, 관객들은 우리의 공연 을 제법 마음에 들어했다.
모든 순서가 끝나고 딱 하나만 남은 상태였다. 무대 아래쪽에 언제 갖다뒀는지 모를 3단 수레가 보였다. 둥근 반구형의 덮개가 조명을 받아 번쩍거렸다. 난 덤덤한 표정을 유지한 채 그걸 미연의 앞까지 끌어왔다. 조심스레 덮개를 열고 정중히 인사하는 순간, 코끝에 끼치는 비린내에 헛구역질을 할 뻔했다.
은빛 접시에 얌전히 놓인 것은, 보기만 해도 거부감이 드는 시뻘건 고깃덩어리였다. 아예 피조차 빼지 않은 듯,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져 접시에 고여 있었다. 방금 막 사냥하여 가죽만 벗긴 거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관객들이 기함하는 소리가 무대까지 타고 올라왔다.
“......”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가만히 서있던 조미연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들어올렸다. 붉은 선혈이 왼쪽 소매와 오른손의 피부를 흠뻑 적시고, 이내 바닥으로 유 영하듯 흘러내렸다. 설마. 상상만 해도 토할 것 같다. 나는 퇴장하다 말고 입을 가린 채 조미연의 행동을 주시했다. 그리고,
조미연은 그대로 그걸 집어삼켰다. 작은 하관이 유연하게 움직이며 고깃덩이를 빨아들이고, 한 번 씹지도 않은 채 그대로 자취를 감춘다. 흡사 뱀이 사냥감을 먹는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조미연의 입술 끝에서 턱을 타고 추락하는 핏줄기가 특히나 역겨웠다. 놀라워하던 관객과 감정 없는 조미연의 눈동자가 동시에 내게 쏠렸고, 나는 무대를 뒤로한 채 그곳을 뛰쳐나갔다.
“우웩...!”
먹은 것도 없는데 자꾸만 구토감이 쏟아졌다. 사람이 그딴 걸 먹는 건 처음 본다. 아무리 뱀이라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그런 짓을 하다니. 내 비위가 약한 건지 조미연이 기이한 건지. 하지만 관객 중 아무도 나처럼 반응하는 이는 없다는 게 사실이었다.
“괜찮으세요?”
한참 앓은 끝에 간신히 진정했을 때, 등 뒤에서 생소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소연이 날 어떻게 갈굴지 생각하며 공포에 떨던 나는 혹시 날 잡아가려는 단원일 까 싶어 천천히 고갤 돌렸다. 여차하면 도망갈 심산이었다.
하지만 내 앞에 서있는 건 처음 보는 여자였다. 새하얀 달빛을 받아 어둠 속에서도 환히 빛나고 있는 사람. 선한 이목구비가 호선을 그리며 독특한 인상을 자 아낸다. 얼핏 보고 긴장을 늦추려다, 새카만 눈동자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그 눈에는 결코 낯설지 않은 기운이 숨어 있었다. 전소연과 조미연의 시선에서 풍기던 묘한 공격성. 결은 다르지만 이 사람에게서도 그게 언뜻 비쳐보였다. 혼란스러웠다.
“안녕하세요. 특수조사팀에서 근무하고 있는 예슈화라고 합니다.”
낯선 이가 작은 명함을 내민다. 반듯한 글자와 숫자 밑으로 보험회사의 이름이 찍혀있다. 설마... 퍼뜩 고갤 들자 예슈화가 유한 미소를 띄웠다. “새로 들어오신 분인가봐요?”
다시 바라본 눈동자는 아까까지와 다르게 옅은 친밀감마저 품고 있었다.
5.
보험사 특수조사팀. 특수조사팀. 조 사 팀.
눈이 번쩍 뜨인다. 이거 완전 망한 거 아냐? 눈 앞에서 예슈환지 뭐시깽인지가 웃고 있거나 말거나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당장 전소연한테 가 서 다 접고 튀라고 알려줘야겠다. 웃긴 건 그 상황에도 머리를 굴리는 내 모습이었다. 보험사 직원을 만나고도 혼자 튄 걸 알면 전소연이 앙갚음으로 나까지 엮어넣을지도 모른다, 까지 계산을 마치고 서커스 천막으로 미친듯이 달리는 내 모습. 예슈화가 당황한 듯 날 부르거나 말거나.
“전소, 아니 부단장님!”
내가 천막 뒤쪽에 들이쳤을 땐 공연이 다 끝난 시점이었다. 대부분의 공연자들이 커튼콜 인사를 하고 있고, 전소연과 스탭 몇 명만 뒤에서 지켜보는 중이었 다. 난 다짜고짜 소연의 팔을 붙들고 절박하게 외쳤다.
“큰일났어요. 지금 보험사 떴다고요.”
“뭐? 천천히 말해. 귀신이라도 봤냐?”
“보험사요 보험사! 특수조사원인지 뭔지가 여기 파헤치러 왔다고요!” “조사원? ......아.”
전소연이 이해한 듯 고갤 끄덕이자마자, 방금 들어온 천막 뒤편 출입구가 열렸다. 덜덜 떨며 돌아보자 예슈화가 활짝 웃으며 들어오고 있다. 진짜 망했다. 저 조사원, 범죄자들 잡아가는 생각만 해도 입이 헤벌쭉 벌어지는 열혈사원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딴 표정으로 여기 올 리가. 나는 눈에 띄게 벌벌 떨 면서 전소연 뒤로 숨었다. 키차이 때문에 숨겨지지도 않는데.
“그냥 한 대 때리고 튀어요. 네?”
전소연에게 속삭인 소리는 그대로 무시당했다. 왜 이렇게 굼떠. 그냥 내가 할까? 일각을 다투며 고민하는 사이, 예슈화가 입을 열었다.
“전소연. 널 업무방해죄로 체포한다.”
“헉. 무서워라. 그게 뭐죠?”
“수진이 보고싶은데 없잖아. 왜 숨겨놓는 거야. 진진 어딨어.”
“관뒀다고 하면 감옥 가나요?”
...뭐야?
사시나무처럼 떨던 내 손이 무색하게, 둘은 피식피식 코웃음까지 치면서 대화하고 있었다. 뭐지 이 친밀감은? 마치 별로 반갑지 않지만 매일 억지로 마주치 는 친구를 봤을 때의 기류다. 바라보는 눈빛에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서로를 향한 애증이 서려있었다.
“...풉.”
어딘가에서 서수진이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뒤쪽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바람 빠지는 소리만 들어도 알 것 같은 이 음성. 마지못해 쭈뼛쭈뼛 돌아보 자,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어깨를 떨고 있는 조미연이 보였다.
“...저기요.” “푸흐...” “웃지 마세요.”
“아하하하!”
“아 웃지 말라고!”
조미연은 끅끅대며 웃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기까지 했다. 씩씩대면서 윽박질러봐도 얼굴까지 새빨개진 그녀가 웃음을 멈추는 일은 없었다. 얼마나 웃 긴지 왼팔을 잡아당겼는데 알아채지도 못한다. 나는 뒤에서 예슈화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것도 모른 채 조미연에게 마구 성질 을 부렸다.
-
창피해 죽겠는데, 전소연은 날 말려죽일 셈인지 숙소에 보내주지도 않고 사무실로 데려갔다. 서수진과 예슈화만 우리와 동행했고, 나머진 모두 자러 갔다. 조 미연은 가면서도 계속 날 돌아보며 실소했다. 그 희고 얇은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고 내 눈꺼풀도 떨렸더랜다. 쪽팔려서.
“넌 여기 앉아있어. 엿듣지 말고.”
전소연은 사무실 구석 의자에 나를 앉혀놓고, 셋이서만 멀찍이 떨어졌다. 치사하게. 대화에 끼워주지도 않을 거면 자게 놔두지 왜 불러왔는지 모른다.
결국 턱 괴고 앉아서 가만히 관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게 있는데, 예슈화는 이 서커스단에 뻔질나게 드나든 것 같다는 사실이다. 소연과 허물 없이 대화하면서 손으론 계속 서수진을 안거나 쓰다듬거나 끌어당기거나 한다. 서수진 표정에 귀찮음이 가득한데 신경도 안 쓰고.
“작작 좀 죽여. 회사에서 냄새 맡은 거 내가 오겠다고 해서 간신히 덮는 거야.”
예슈화는 목소리가 커도 너무 컸다. 전소연이 일부러 날 떨어뜨려놓은 게 무색하게 업무내용을 다 노출하고 있다. 살짝 귀기울여보니 흥미진진한 별천지 이 야기가 줄줄 쏟아져나온다.
“너네 회사 소시민들 돈은 소액이라고 신경도 안 쓴다며. 줄 돈이든 받을 돈이든.”
“그래도 한계가 있지. 보상팀 담당직원 매번 바꾸는 짓도 피곤해. 이젠 그거조차 안 통해서 나한테 찾아온 거 아냐. 니네 뒤 캐달라고.” “소득없이 돌아가면 어떻게 되는데?”
“실적 깎이고 너네 구해주고. 걍 니 좋은 짓만 하는 거지.”
“야, 그게 왜 그렇게 되냐. 날 위해주면 수진이한테도 좋잖아.”
“수진이는 그냥 내가 데려가 살아도 되거든?”
회사 비리에 공개구혼까지? 이거 들어도 되나. 슬쩍 서수진 얼굴을 살피니 아주 지겹다는 듯 눈에 초점이 없다. 예슈화가 저런 소리 한두 번 한 게 아닌 모양 이다. 근데 좀 이해가 안 되긴 했다. 보험회사 직원이면 집도 꽤 잘 산다는 건데, 왜 구애를 마다하고 이런 위험하고 불편한 서커스단에서 사는지. 다 사정이 있겠지만.
그때 소연이 이쪽을 휙 돌아봤다. 감은 짐승 수준이다. 재빨리 딴청피웠지만 이미 다 들켰다.
“김민니. 이리 와.”
전소연이 가소롭다는 듯 손짓한다. 하... 집에 가고 싶다. 난 있지도 않은 집을 그리워하며 터덜터덜 걸어갔다.
“늦었지만 인사해. 얘는 뉴 따까리, 이쪽은 우리 커버쳐주는 보험사 직원님.”
단어선택에서까지 사회적 신분차를 강조할 필욘 없지 않나? 하지만 말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 걸 알기에 얌전히 악수나 했다. 예슈화는 눈을 빛내며 나를 훑 어보고 있었다. 보잘것없는 따까리 인간 따위를 뭐 저렇게 흥미롭게 쳐다봐. 나는 반쯤 자조적으로 툴툴거렸다.
“저기요. 말단 신입 따위랑 인사도 나누셨는데 자러 가면 안 될까요?” “얼레. 버릇없네?”
“내가 무슨 신하도 아니고... 졸리다고요.”
“확 씨.”
전소연이 손날로 치는 시늉을 했다. 허둥지둥 막고 보니 그냥 위협일 뿐이라 아주 무안했다. 그 꼴을 지켜본 서수진이 웃지도 않아서 더. 도대체 왜 끌고왔냐.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웬 불청객 때문에 붙들려 있어서 짜증이 극에 달했다. 그때 예슈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민니씨는 왜 말단이죠? 인기 많을 것 같은데.”
“얘 인간이야.”
내가 답하기도 전에 소연이 끼어들었다. 인간 얘기가 왜 나와. 잘못 알아들었나 했는데 예슈화가 납득했다는 듯 끄덕인다.
“그래서 보조만 하시는구나. 하긴 수인이면 전소연이 이렇게 막대했을 리가.”
“수인이면 뭐가 달라요?”
“민니씨처럼 얼굴 훤한데 수인이기까지 하면 인기 많죠. 안 그래도 신기한데 외모까지 잘났으니.”
“그런가...”
“조미연도 그렇지 않나? 걔 그래서 메인이잖아. 서커스 하기 전에도,”
“야. 그만해라.”
마지막 말은 전소연의 것이었다. 슈화가 갸웃거리더니 뒤늦게 탄식한다. 뭔가 말실수한 것 같은데 뭔지 모르겠다. 조미연이 서커스 하기 전에 뭐? 궁금해서 번갈아보는데 아무도 말을 안 해준다. 마지막 희망인 수진마저도 고갤 젓는다. 왜 이래?
“...어쨌든. 제가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부탁한 거예요. 따로 인사하게 해달라고.”
슈화가 싱긋 웃으며 화제를 돌린다. 아아. 그러셨구나. 나는 3초 후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왜 궁금한데요?”
“그게... 저 미연씨 그러는 거 처음 봤어요.”
그러는 거? 잠시 생각해보니 곧 알 수 있었다. 혹시 방금, 미연이 파안대소한 걸 얘기하는 건가. 나도 좀 놀라긴 했다. 평소 표정도 거의 없는 사람이 눈물까지 맺혔으니. 하지만 그게 그리 특별한 일인가? 나한테만 무뚝뚝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별로 공감 못하시나봐요.”
슈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답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조미연이랑 얼굴 튼 지 한달도 안 됐는걸.
“전 말 그대로 신입이라 조미연이, 아니 그분이 어떤지 잘 몰라요. 그렇게 놀라워요?”
“당연하죠! 7년 내내 같이 일한 전소연도 그 사람 웃는 거 못봤을걸요. 아닌가. 딱 한 번,”
예슈화는 말을 하다 말았다. 전소연이 정말 위협적인 표정으로 닥치라고 을렀기 때문이다. 아 또 실수. 슈화는 익살맞은 얼굴로 입을 가리더니 씨익 웃었다. 별로 반성하는 기색이 없다.
“근데 민니씨 아까 도망 안 간 거 잘하셨어요.”
또 다른 얘기. 무슨 화제전환이 이렇게 빠른지. 따라가기 힘들다는 속마음이 그대로 내비쳤는지, 예슈화가 멋쩍게 웃는다. 그러면서도 물러서지는 않았다. 이 게 보험회사 인간들 스킬인가. 대화를 자기가 쥐고 휘두른다. 직원이 모두 이렇다면 돈 청구하러 갔다가 도리어 보험료만 올리고 올 것 같다. 괜한 반항심에 신발코로 땅을 퍽퍽 찍으며 툴툴댔다.
“잘하긴 뭘 잘해요. 이런 곳 확 아무도 안 볼 때 날라버릴,” “야야, 벌써 기어오른다?”
전소연이 무릎을 퍽 찼다. 다리가 휘청 꺾인다. 으악. 간신히 중심 잡자 서수진이 조용히 웃었다. 웃지 마요. 그래도 웃었다. 아오 진짜. 열받아하는 내게 예슈 화가 틈을 주지 않고 물었다.
“정말요? 정말 떠나요?”
“예. 정말요.”
“진짜로?”
“진짜, 진짜로!”
예슈화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좀 전까지 사람 좋아보이던 눈매에 날이 선다. 활짝 웃고있던 입모양은 어느새 조소처럼 바뀌어있었다. 그리곤 비웃듯이 툭 던진 말.
“그럴 수 있을까? 당신 무대에서 뭐 들고 공연했어요?”
......순간 요 며칠간의 기억이 책장 넘기듯 펼쳐졌다. 밤마다 조미연과 따로 연습한 것. 처음부터 던져주던 도구. 익숙한 물건임을 알아채고도 멍청하게 넘어 갔던 나. 그 칼. 단장 배를 째고 피를 잔뜩 머금었던 시퍼런 칼.
“...조미연이 좋아할 만하네.”
비아냥거리는 소리 따위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무작정 뛰쳐나와 조미연의 막사를 향해 달렸다.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는 채로.
-
막상 도착하니 입구를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 1분쯤 망설였던 것 같다. 이걸 제치고 들어갈지, 아니면 조용히 돌아갈지. 하지만 여러모로 당한 일도 있고 해서 분노가 두려움을 이겨버렸다. 나는 기세 좋게 천을 제치고 입장했다. 그리고 얼어붙었다.
“노크도 모르니?”
타이밍도 좋게 조미연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등만 보이는 상태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날 멈추기엔 충분했다. 부... 부끄러워. 보육원에서도 이런 쑥스러움은 유달리 많이 탔던 난 그대로 얼어버렸다. 이럴 때면 얼굴이며 목덜미까지 벌게져서 애들이 쑥맥이라고 놀렸는데.
더군다나 조미연의 등은 너무 예뻤다. 매끄럽고 눈부시고 하얗고... 온갖 좋은 형용사를 다 갖다붙여도 모자랄 만큼 아름다웠다. 싸구려 백열등 빛에도 환하 게 빛나는 피부를 보다가 옷을 다 입고 뒤돌아본 미연과 눈이 마주쳤다. 뒤늦게 눈을 질끈 감았는데, 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조미연이 또 비웃었다.
“다 봐놓고 뭘 감아?”
“마, 말을 해야될 거 아니에요.”
“뭘 말해. 너 처들어올 거 미리 알고 아침에 얘기해주리?”
“아이씨...”
이젠 머리통까지 후끈후끈하다. 그 순간만큼은 너무 당황스러워서 내가 이곳에 온 목적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더 민망해지기 전에 도망치려고 한 발짝 물러 서는 순간 조미연의 목소리가 날 붙들었다.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냐?” “어, 어떻게 알았어요?” “예슈화 왔잖아.”
그게 뭐? 하다가 골똘히 생각해보니 알 것도 같다. 예슈화라는 인간, 성격이 그리 유해보이지는 않았다. 필시 나같은 신참들 들어올 때마다 한 마디씩 던졌을 거다. 물론 나만 특별히 궁금해서 만났다고 했으니 안 그랬을 수도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들 놀리고 다니는 데 특화되어 있을 체질이다. 그런 눈빛을 보호소에서 만났을 땐 백이면 백 싸움붙었으니까.
그리고 조미연은 그걸 예상하고 있었다. 예슈화가 날 자극한 것, 내가 그에 화가 난 것. 뱀눈으로 관심법 쓰는 것도 아닌데 왠지 속내를 다 들킨 기분이었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미연이 저렇게 여유만만한 표정이란 사실에 자신감이 쭉 떨어진다.
“왜 조용해. 할 말 없으면 나 잘게.” “칼!”
“......”
“저한테 그 칼 준 거, 일부러 그런 거죠.”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맞잖아요. 흉기로 썼던 그 칼, 그거 들고 공연하는 모습 사람들한테 목격시켜서 나 발묶어놓으려고, 내가 걱정돼서 도망치지도 못하게 하려고 그랬잖아요. 당신 조수였으니 잡히면 나도 의심받겠지! 얼굴 다 팔렸으니까!”
조미연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한참이나 말이 없다. 고운 눈을 내리깔고 바닥 어딘가를 쳐다보면서 입을 다물고만 있다. 표정조차 뚜렷하지 않았지만, 흥분한 상태의 내겐 조미연의 원래 입매조차 비웃는 모양으로 보였다. 잔뜩 열받은 채 뭐라고 한마디 덧붙이려던 찰나, 마침내 고개가 들린다.
마주친 눈은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민니야. 그게 내 탓이야?”
“...뭐?”
“네가 바보처럼 그 칼 받았잖아. 이걸로 안 하겠다고 했으면 다른 거 줄 생각이었어. 근데 군말없이 무대까지 들고 올라가더라. 이게 내 탓이야?” “애초에...!”
“애초에 주질 말았어야지.” “.......”
“라고 하려고 했지?”
조미연의 눈동자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좀 전까지만 해도 온순하던 눈에 금안이 드리운다. 요 며칠간 본 적 없는 저 동공. 칼날처럼 길게 찢어진 동공에 정말 단도라도 심어져 있는 것 같았다. 언뜻 보면 보석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샛노란 홍채는 내게 그저 뱀의 맹독을 연상시킬 뿐이다. 금세라도 변해서 내 몸을 타고올라 목을 조르고...
“민니야.”
조미연이 다시 나를 불렀다. 간악한 혀가 쇳소리를 내는 듯한 착각이 느껴진다. 어느새 내 기세는 모두 한줌 재로 흩어지고 없었다. “너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이러니까 짜증난다.”
“.......”
“가봐. 피곤해.”
조미연이 더 이상 시선을 주지 않고 돌아누웠다. 두꺼운 이불이 가느다란 몸을 파묻는 모습을 보다가 망연히 나올 수밖에 없었다. -
며칠간 나는 지독한 고열에 시달렸다. 자려고 눈만 감으면 뱀을 몸에 칭칭 휘감은 예슈화가 그 단도를 들고 날 죽이러 쫓아왔다. 내 손에는 새하얗고 작은 명 함이 들려있었는데, 거기엔 ‘사냥꾼’이라는 단어만 적혀있을 뿐 보험회사 전화번호 따위는 없었다. 예슈화 뒤에는 시커먼 그림자떼가 붙어있었고 가까워질수 록 그들의 옷이 선명해졌다. 그건 경찰 제복이었다. 보호소 시절 나와 친구들을 몇 번 훈계했던 경찰들이, 꿈에서는 날 잡아먹을 괴수의 아가리처럼 크게 불 어나 숨통을 끊어놓으려 했다. 그들이 외치는 말은 모두 같았다. 살인자의 조수. 악독한 서커스단의 기생자. 그러다 험악한 외침은 이런 식으로 짧아지곤 했 다. 살인자. 넌 살인자야... 전소연은 그 모습을 저 멀리 벼랑 끝에서 내려다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악몽이 한두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것은 아주 큰 착각이었다. 나는 새벽 한중간에 몸부림치다 식은땀에 흠뻑 젖어 일어나길 반복했고, 그게 계속되자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약해졌다. 잡심부름이든 공연 연습이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어려웠다. 일어나 앉기만 해도 머리가 핑핑 돌고 바로 옆에서 하는 말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우기가 와서 걱정스럽게 말을 걸어도 그 목소리에마저 화들짝 놀라곤 했다.
“나 이런 거 잘 못하는데...”
결국 우기가 틈틈이 숙소로 찾아와 날 보살피는 지경에 이르렀다. 처음엔 서수진이 봐주겠다고 했는데, 그 사람 얼굴만 봐도 예슈화에게 내 숨소리까지 일러 바칠 것 같아 무서워서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우기는 제대로 접지도 못하는 물수건을 내 머리에 비뚤게 올리면서 한숨만 푹 내쉬었다.
내 반응이 비정상적이라는 소리는 벌써 몇 번이나 들었다. 내 침대 바로 옆에서 자면서 나보고 겁쟁이에 망상쟁이라고 욕하는 단원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 쩔 수 없다. 이건 좀도둑질이나 담벼락 낙서처럼 걸려도 혼나고 마는 일이 아니었다. 사람을... 직접 저지르진 않았지만 억울하게 엮이기라도 하면, 누명이라 도 쓰면 그대로 인생이 나락에 떨어질 일이었다. 살면서 이런 고통과 공포를 느껴본 적은 지금까지 한 번밖에 없었다. 자연히 내 마음도 굳지 못했다. 비 온 뒤엔 땅이 굳어진다 하던데 공포는 마음의 기반을 무너뜨리기만 할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결국 그 지역에서의 모든 공연 일정이 끝나도록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우기가 이마를 짚어보면서, 내일 출발해야 하는데.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 다. 차라리 버리고 갔으면 싶다. 그럼 여기서의 짧은 시간은 꿈으로 치부하고 다시, 다시 보호소에라도 돌아갈 텐데. 거기서 매일같이 나 같은 사람과 어울리 고 원장에게 반항하고 혼나고 얻어맞다가 뛰쳐나와 방황하고...
“자?”
또다시 잠에 빠지려는 찰나, 아주 얇고 미약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천막 입구에서 물어보고 있는듯, 먼 거리에서 아득히 들리는 음성이 날 뒤흔들었다. 정 신이 들 수밖에 없었다. 조미연이었으니까.
“이제 자려는 것 같아요. 근데 금방 깨요.”
우기가 소근소근 대답했다. 눈만 감고 있었을 뿐이지 깨어있던 나는 그냥 쥐죽은 듯 누워있기로 했다. 괜히 일어나서 입 열고 싶지 않았다.
이윽고 사뿐사뿐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얘 일으켜봐.”
“어디 데려가시게요?”
우기가 허둥지둥 내 팔을 잡아끌었다. 잠들어있는 척 끌려가느라 애를 먹었다. 조미연이 나를 부축하는가 싶더니 안 되겠는지 우기에게 맡기고 앞장선다. 나 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우기의 발이 움직이는 방향을 보면서 어디로 가는 건지 추측했다.
이윽고 우린 조미연의 막사에 도착했다. “눕혀.”
조미연이 침대 이불을 치워 내가 누울 공간을 만들었다. 우기가 조심스레 날 내려놓는다. 항상 하나뿐이던 베개가 두 개로 늘어나있었다. 부드러운 매트리스 에 눕자 한결 몸이 편안해지는 것도 같았다.
“수고했어. 이제 가봐.”
우기가 인사하고 빠르게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지 말았으면 했다. 조미연과 단 둘이 있는 상황은 너무 불편하고, 무서웠으니까.
하지만 막연한 공포심은 곧 당황으로 변모해 사라져갔다. 조미연이 내 옆자리에 눕고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넘겼기 때문이다. 퍽 다정한 손길이었다. 태어나 기억나는 순간 이후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던 손길.
“...왜 신경 쓰이게 하니.”
조미연이 혼잣말을 읊조렸다. 내가 못 들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냥 아무 생각도 못 했던 것 같다.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한 내용이라......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손길이 뒤통수에 얹혔다. 조미연은 한 손으로 날 감싸안아 제 품에 끌어당겼다. 부스럭거리며 이불을 덮어주고 길게 한숨쉰다. 조소가 아닌 근심만 가득한 숨소리였다. 몇 번이고 이부자리를 매만지면서 편하게 눕도록 고쳐주더니 곧 자신도 잠에 빠진다.
...조미연의 가슴팍이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뺨에 그대로 느껴졌다. 그날은 악몽을 꾸지 않았다.
6.
쏟아지는 햇볕에 잠을 깼다. 옆엔 아무도 없었고, 천막 밖에서 일사불란하게 걷고 뛰고 짐 나르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기 싫어 늑장부리며 기지개 켜다가 화들짝 놀라 이불을 걷었다. 아침이라기엔 들이치는 빛이 너무 강했다.
“김민니 완전 휴가받았네.”
천막을 뛰쳐나가자마자 마침 지나가고 있던 우기를 마주쳤다. 꽤 강렬한 햇볕에 땀 뻘뻘 흘리며 소품 가득 담긴 상자를 옮기고 있다. 아직까지도 잠옷바람인 내 꼴이 머쓱해서 인사도 장난스럽게 받아치질 못했다. 우기가 상자를 내려놓더니 내 앞머릴 마구 헤집는다.
“뭘 눈치보고 그래. 몸은 다 나았어?” “어... 거의 나은 것 같아.”
“신기하네. 미연선배가 어떻게 했길래...” “그런 거 아니야!”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우기가 호탕하게 웃었다. 은근히 짓궂은 데가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의아하긴 했다. 사나흘 동안 밥도 거의 못 먹을 정도로 앓아누웠는데, 조미연이 딱 한 번 재워줬다고 금세 멀쩡해지다니. 그 뱀의 품 이... 그 정도로 안정감을 줬나? 나한테? 상상만 해도 얼굴이 달아오른다. 툭하면 금안으로 위압하고 멍청하다고 놀리는 사람이 어떻게. 게다가 조미연은 내 게 덫을 놓은 장본인이다. 그러니 말도 안 된다. 그냥 침대가 워낙 푹신해서 피로가 풀린 거다. 아무렴.
감상에서 벗어나 우기를 도우려 움직였다. 일이라도 해야 잡생각이 사라질 것 같았다. 벌써 짐은 단원들이 거진 트럭에 실어놓은 상태였고, 천막 철거하는 일 만 남았다. 다들 내가 놀고먹어서 아니꼽다는 듯한 눈초리를 보내길래 가시밭길 걷는 기분으로 일손을 도왔다. 여기서 도망칠 길이라도 있었다면 눈치 주든 말든 무시했을 텐데. 그마저도 어려워졌음을 깨닫자 놀랍도록 빠르게 마음가짐이 바뀌었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잘 살아남자는 쪽으로.
하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었다. 일하는 내내 조미연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그 얼굴이, 목소리가, 품에 안겼을 때 의 향기가 자꾸 떠올라서 실수연발이었다. 내가 단원들이 접으려던 방수천을 딱 다섯번째로 밟고도 몰랐을 때, 누군가가 버럭 소릴 질렀다.
“비키라고 새끼야!”
뒤통수를 때리는 것처럼 얼얼한 고성이었다. 당혹해서 허둥지둥 물러서자 소리 지른 단원이 인상을 잔뜩 구기고 천을 가져갔다. 지나치면서 뭐라고 욕지거리 를 더 지껄인 것 같기도 했다. 보호소 같으면 싸우기라도 했을 텐데 여기선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다. 내 편은 없는데 약점만 있으니.
울적한 마음에 터덜터덜 천막 부속품을 옮기는데, 문득 멀리서 이쪽을 지켜보던 미연과 눈이 마주쳤다. 그늘에 있는데도 볕이 눈부신지 인상을 찡그리고 있 다. 꾸벅 인사하자 미연이 거의 알아채지 못할 만큼 미세하게 고갤 끄덕였다. 어쩌면 아주 무시한 것도 같았다. 어제의 친절은 끝난 건가. 하지만 아직도 미연 의 혼잣말이 귓가에 선연했다. 신경 쓰이게 한다던 그 말.
“아프니까 한 소리겠지...”
단원에게 욕먹는 걸 보고도 인사조차 안 받아주는데, 무슨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조미연이, 나아가 이 서커스단이 어떤 곳인지 상기하려 고 눈을 부릅떴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내가 못 도망가도록 덫까지 놓은 사람들 아닌가. 하지만 자꾸 혼란스러워지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날 함정에 빠 뜨린 주제에, 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재워주던 조미연... 그리고 그 품에서 평온을 찾은 나.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누가 들으면 나사가 빠져도 왕 창 빠졌다고 비웃을 것이다.
“이제 일어났네?”
그때 서수진이 옅은 미소를 띄우고 다가왔다. 웬일로 저런 표정을 짓나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입가에 경련이 인다. 억지로 웃는 거다. 내 경계심을 풀어보려 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저쪽에서 친근하게 다가와도 넙죽 환영하긴 어려웠다. 아무리 비이성적인 두려움이 사라졌다지만, 여전히 무섭다. 전소연이 날 죽일 이유가 없는 것 도 알겠고, 무대에 세운 건 엿먹이려는 게 아니라 도주를 막기 위해서였단 것도 알겠다. 예슈화든 누구든 이 서커스단이 망하길 기도하는 놈이 아니고서야 다 짜고짜 날 해치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한 번 된통 당하고 나니 이젠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러웠다. 심지어 지금처럼 서수진이 쿠키를 가져다줘도, 내게 족쇄 채우려는 작전인지부터 생각하게 된다. 진짜 말도 안 되는 망상인데.
“일어나자마자 무슨 과자예요.”
최대한 무심한 척하려고 했는데 퉁명스러운 말투가 튀어나갔다. 서수진이 멋쩍게 웃는다. 따지면 얘가 나보다 훨씬 실세인데 이래도 되나. 불안감에 마음이 쓰렸다. 하지만 서수진은 내 생각보다 대인배인지, 아까 그 단원처럼 화내는 대신 내 손에 억지로 쿠키를 쥐어주었다.
“이동하려면 한참 걸릴 텐데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그냥 받아.”
“진짜 괜찮은데...”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먹어. 저녁 즘에 도착할 거야.”
왜 잘해주는지 모르겠다. 우기가 유난히 붙임성 좋은 것처럼, 이 사람은 성정이 참 착한가보다. 혹시 쿠키에 전소연의 주전자처럼 이상한 게 들어있나 싶어 킁킁대자 수진이 작게 웃으며 아무것도 없다고 해명했다. 기분 나쁠 법도 한데.
“죄송해요. 제가 좀,”
“아냐. 이런 데 있다보면 의심 생길 수도 있지.”
“그래도...”
“미안하면 먹기나 해. 아무한테나 주는 거 아니니까.”
고갤 끄덕이자 수진이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쿠키봉투에서 향긋한 버터향기가 솔솔 풍겼다. 군침이 돈다. 이동할 때 먹으려고 주머니에 쑤셔넣는데, 각자 다 른 곳에서 날 응시하던 두 사람과 차례로 눈이 마주쳤다. 막 트럭에 탑승하고 있던 우기와, 이제야 그늘에서 일어나던 조미연.
어쩐지 둘 다 낯빛이 좋지 않다. 특히 조미연은 아까보다 더 표정이 일그러진 듯했다. 착각... 이겠지? -
해가 쨍쨍한 점심 때 출발했는데, 차가 멈췄을 땐 주홍빛 노을이 지고 있었다. 대체 어디로 온 거야. 나중에 위치라도 알아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가 너무 저려서 급히 내리는데 바닥을 딛자마자 무릎이 콕콕 쑤신다. 거기에 멀미까지. 여러모로 상태가 말이 아니다.
멀미는 아까 먹은 쿠키 때문이었다. 출발한 지 삼십분만에 뱃가죽이 등에 붙은 것 같아서 수진이 준 걸 누가 보거나 말거나 허겁지겁 먹어버렸다. 그런데 사 방팔방으로 덜컹거리는 차 때문에 제대로 체한 것이다. 단원들과 다닥다닥 붙어앉아 있었을 땐 헛구역질 나도 억지로 참았는데, 내리니까 자제가 안 된다. 배 를 붙들고 시름시름 앓고 있으려니 지나가던 조미연이 툭 말을 얹는다.
“탈났니?”
올라오는 거 참느라 답을 못하자 안 그래도 무표정한 얼굴이 더 굳는다.
“준다고 덥석 먹으니까 탈이 나지.”
그러곤 휑하니 지나친다. 순간 어제 일이 다 꿈인가 싶었다. 저 사람이 정말 신경쓰인다니 어쩌니 한 사람이 맞나? 어쩜 한 번을 안 돌아보고 가장 먼저 설치 된 자기 막사로 들어가버린다. 와, 진짜 너무해. 하루아침에 태도가 휙휙 바뀌는 게 손바닥 뒤집는 수준이다. 미스터리할 정도였다.
“뭐야, 너 체했어?”
밖에서 막사가 다 준비되길 기다리던 수진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조미연이 하는 소릴 듣고 놀란 듯했다. 칭얼거릴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라 그냥 고갤 저었는 데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하긴 나 같아도 안 믿겠다.
“어떡하지. 손 따줄까?”
“으... 약은 없어요?”
“많이 심해? 소연이한테 물어볼게.”
“좀 걸으면 괜찮아질 것 같긴 한데...”
“일단 앉아있어봐.”
서수진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친절했다. 밖에서 만났으면 그냥 적당히 고마울 정도의 친절이지만 내 편 하나 없는 곳에서 만나니 후광까지 보인다. 나도 참 오바는... 자조하면서도 수진이 없는 몇 분 동안이 허전하다고 생각했다.
곧 돌아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수진의 손은 비어있었다. “어떡하지, 약도 없대. 사러가야 하나봐.”
“그럼 됐어요. 좀 있음 나아지겠죠.”
“미안해...”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여기서 이런 풀죽은 사과를 듣다니. 우기가 몇 번 장난스레 사과한 걸 빼면 다들 얼굴에 철면피라도 깐 마냥 굴어서 양심이 고 장난 줄 알았다. 적어도 서수진은 아닌 모양이다. 이쯤되니 이 사람 자체가 서커스단에 어울리지 않는단 생각이 강하게 든다. 예슈화가 위험 감수하고 쫓아다 니는 이유가 있었네. 놀라서 빤히 올려다보자 수진이 민망하다는듯 어깨를 툭 밀친다.
“뭘 그렇게 봐.”
“아, 죄송해요. ...산책하러 갈게요.”
“저녁 먹을 수 있겠어?”
“글쎄요... 좀 늦게 먹어도 되지 않나?”
“오늘은 늦으면 없어. 재료 다 떨어져서 장봐야 되거든.”
미리 좀 봐놓지... 하다가 방금 다섯 시간에 걸친 대이동을 했단 걸 상기하고 다물었다. 짐을 최소화하려고 식재료도 안 사뒀을 것이다. 이제 조금 있으면 식 사 시간인데, 체기가 금세 사라지진 않을 것 같았다. 오늘은 쿠키만 먹고 자게 생겼다. 아플 때도 끼니를 자주 걸러서, 언젠가 조미연이 말한 대로 피죽도 못 얻어먹은 꼴 되기 직전이었다. 나는 움푹 패인 볼을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
“밖에서 먹을까?”
서수진이 말을 툭 잘랐다. 밖? 우리가 서있는 곳을 가리키자 고갤 젓는다. 그럼?
“여기서 좀 가면 작은 동네 있거든. 오늘 야시장 열린대.”
“야시장이요?”
“너 되게 못 들을 거 들은 사람같다.”
입단 후부터 쭉 현실과 동떨어진 일에 시달리다보니, 야시장 같은 평범한 단어가 무슨 외계어 같았다. 야시장이라. 보호소 친구들과 밤늦게 몇 번 놀러간 적 이 있다. 돈은 별로 없었지만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신나긴 했다. 가볼까... 추억에 잠겼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저, 야시장이면 사람 많죠?” “아무래도?”
“그럼 안 갈래요.”
“왜?”
“그냥... 갔다가 누가 목격하면 어떡해요. 불안해요...”
말하면서도 유난이란 생각이 들어 뺨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불안한 걸 어떡해. 당분간은 야영지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얼굴 봐서 좋을 게 없 으니까. 하지만 수진은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뭔지,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너 우리가 몇키로미터 달려온지는 알아?” “아니요...”
“초능력자니? 거기서 여기까지 오게.” “그치만,”
“영원히 서커스단 안에서만 살 거야?” “그... 아니요...”
얼굴이 점점 새빨개진다. 서수진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민망한 데를 잘도 지적했다. 차라리 대놓고 바보라고 했으면 좋겠다. 조미연처럼. 화는 나도 민망 하진 않았는데. 아예 도망치려다가 뒷덜미를 잡혔다.
“그리고, 사람 많으니까 가자는 거지. 누가 우릴 기억하겠어? 이상한 짓만 안 하면.” “...그런가?”
“그래. 내일 월급 나오니까 내가 사줄게.”
“저한테 되게 잘해주시네요.”
“이상해?”
“...네.”
수진이 자그맣게 웃었다. 여기 사람들 웃음포인트도 너무 해괴해. 속으로 생각했는데 표정에서 보였는지 곧바로 지적이 들어온다. “니가 생각하는 만큼 별난 사람들은 아니야.”
“충분히 별난데요...”
“미연이도?”
갑자기 훅 들어온다. 어이없는 건 바로 긍정해야 할 질문에 시원히 대답 못하는 나 자신이었다. 당연히 조미연이 제일 이상하지! 그런데 무슨 허를 찔린 것마 냥 어리버리하게 시선 피하고 있다. 이상해요. 조미연 너무 이상해. 날 죽일 것처럼 굴더니 멍청하다며 좋아하고 실컷 비웃다가 함정에 빠뜨렸으면서 아프다 니까 안아주고. 걔가 제일 정신 나갔어. 여기서 제일!
미친 듯 쏟아지는 답은 턱 끝까지만 치달을 뿐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그 조미연의 장단에 놀아나는 나도 정상은 아니다. 내 침묵을 어떻게 받아 들였는지, 수진은 자기 마음대로 대화를 정리해버렸다.
“일 끝나면 출발하자. 소연이한텐 내가 말할 테니까 걱정 말고.” -
떠나기 전, 수진은 잠시 조미연의 막사 앞에서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와 천막 입구를 번갈아보면서 뭔가 재는 것 같더니, 그냥 가자며 손짓한다. 아마 야시장 에 동행할지 물어보려던 것 같은데 보나마나 조미연은 거절했을 거다. 단원들 마주치는 것도 꺼려해서 밤에 연습하자고 잠 다 뺏은 장본인인걸.
우기한테도 물어보려 했는데, 그건 수진이 말렸다. 둘만 조용히 나가자고 해서 무슨 좀도둑이 된 기분이었다. 살인자 조수 된 기분보단 훨씬 낫네. 우스운 생 각을 하며 수진을 따라 걸었다.
“작은 동네라더니 엄청 크네요.”
도착한 곳은 내 상상보다 훨씬 크고, 훨씬 소란스러운 곳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선 점포와, 골목을 가득 채운 사람들, 자기네 상품을 홍보하는 상인들, 여기저기 달린 눈부신 조명 때문에 혼이 쏙 빠질 정도였다. 아까 누가 볼까봐 무섭다 했던 내가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날 보긴 뭘 봐. 작정 하고 찾아도 못 마주칠 수준이다.
“오니까 좋지?”
“...어, 네.”
“저거 먹고 싶어?”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체한 건 이미 내려갔다. 내가 철판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는 고기 냄새에 정신 팔린 걸 알아챈 수진은 더 묻지도 않고 그걸 사왔다. 맛 별로 하나씩.
“많이 먹을 줄 알았어.”
며칠간 고기는 구경도 못했더니 체면이고 뭐고 자제가 안 된다. 수진이 날 좀 신기하게 쳐다본다. 문득 무안해져서 하나 드실래요? 했더니 됐다고 아까 사온 음료수를 쪽 빨아들인다. 이런 데까지 와서 체리맛 나는 사이다는 왜 먹는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수진이 크게 웃었다. 에이드라고 이름까지 가르쳐주면서.
“어, 인형이다.”
난 분명 여유롭고 느긋하게 구경하려고 했는데, 이놈의 야시장엔 탐나는 게 너무 많았다. 남의 돈 쓰는 거라 몇 번은 참았지만 다섯 번째로 마주친 게임 가판 대에서 유혹에 넘어가버렸다. 시장이 반찬이란 말은 이런 데에도 적용되는 모양이다. 인형 좋아하지도 않는데 요즘 하도 팍팍한 시간을 보냈더니 갑자기 뽑 고 싶었다.
“해볼래? 사격 잘해?”
“모르겠어요.”
“여기 한 판이요.”
수진이 돈을 냈고, 뭉툭한 스펀지 총알 딱 열 개가 주어졌다. 이런 건 하나만 공략해야 되는데. 사람 마음이 웃긴 게, 막상 쏘려고 보니 확 끌리는 인형이 하나 도 없었다. 멀리서 볼 땐 그렇게 탐나더니.
“인형이 다 동물이네.”
수진이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다. 기린, 강아지, 물고기, 고양이... 하나하나 훑어보다가 한 군데에서 시선이 딱 멈췄다. 짙은 초록색의 악어. 수많은 인형 중에 파충류는 그거 하나밖에 없었다. 색도 조미연과 비슷하고.
저절로 총구가 거기에 향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른다. 그냥 악어를 보는 순간 조미연을 떠올리고 있었다. 본인이 알면 기함할 일이다. 뱀도 아니고 웬 악어냐고.
“와, 너 사격 잘한다.”
집념인지 집착인지 모를 집중력으로 초록색 악어인형을 손에 넣었다. 열 발을 다 쓰고 땄는데 서수진은 칭찬을 날렸다. 사람이 참 후하다. 민망했지만 인형을 받아드니 왠지 뿌듯했다.
“오늘 쓴 건 내일 갚을게요.”
“아냐, 그러지 마.”
서수진이 단번에 거절했다. 어쩐지 표정이 조금 묘했다. 웃음을 참는 것도 같고?
인형을 뽑은 뒤에도 우린 이곳저곳 쏘다니면서 구경했다. 아마 거의 모든 점포를 본 것 같다. 하도 돌아다녔더니 허기져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서수진은 용 케 그걸 듣고는 근처의 토스트 가게를 가리키면서 먹고 가자고 했다.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
아무 테이블에 앉아서 음식을 기다리는데, 수진이 턱을 괸 채 물었다. 궁금한 거? 어디까지 물어봐도 되나 싶어서 눈을 굴리자 말을 잇는다. “우리밖에 없으니까 편하게 물어봐. 돌아가면 이런 기회 안 줄 거야.”
“아...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
“뭔데.”
“무슨 수인이신지...”
수진이 뭐야, 하며 손을 내저었다. 겨우 그거냐고. 그러더니 갑자기 내 코 바로 밑에 손등을 갖다댄다. 뭔가 싶어서 가만히 있었더니 코가 간질간질해진다.
“에취!”
뜬금없이 재채기가 나왔다. 코를 비비면서 쳐다보자 수진이 즐거워한다. 갑자기 왜 이렇게 코가 얼얼하지. 무슨 꽃가루라도 마신 것마냥...
“알겠어?”
“으음... 꽃?”
“꽃은 식물이잖아.”
“그치만 가루 날린 것마냥 간지러운데요...”
억울한 표정을 짓는 순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자꾸 재채기하는 나 대신 수진이 일어나 가져왔다. 이젠 하다하다 콧물까지 나오려 한다. 냅킨으로 코를 막 고 있는데 앞에서 말을 툭 던진다.
“진짜 귀엽네.”
“네? 누가요?”
“너. 미연이가 요즘 계속 그 얘기 했거든. 귀엽다고.”
“우에취!”
안 그래도 간지러워 죽겠는데 당황스러운 이야기까지 듣자 재채기가 더 쏟아졌다. 수진이 소리내어 웃었다. 어쩐지 서커스단의 광대가 된 느낌이다. 다들 나 만 보면 깔깔대니. 간신히 멈췄을 땐 눈에 눈물까지 맺혀있었다.
“내 가루가 독하긴 한가보다.”
“대체 정체가 뭐예요?”
“나비. 나중에 내 날개 봐봐. 엄청 예뻐.”
나비라니. 그래서 이렇게 재채기가 나왔구나. 날개는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졌다.
“지금 보여주시면 안 돼요?”
“...여기서는 좀 그렇고, 공연 때 보여줄게.”
“그러고보니 왜 안 하셨어요? 저번에.”
“아, 슈화 온다 그래서. 언제 올지 모르니까 기다리고 있었거든. 그 다음날부턴 계속 했는데 네가 아파서 못 봤지.” “그분이랑 많이 친하신가봐요...”
“너 돌려말하기 되게 못한다.”
들켰다. 사실은 대체 무슨 사이냐고 묻고 싶었다. 내가 조용히 눈을 내리깔자 수진은 또 즐거워했다.
“뭐... 걔는 나를 좋아하고, 나는 관심이 없고, 걘 나 때문에 이 서커스단까지 보호해주고. 그런 관계야.” 그렇게 일상적인 말투로 정리할 관계는 아닌 것 같은데. 수진은 이미 익숙해진 듯 보였다.
“근데, 솔직히 저 같으면 슈화씨한테 갈 것 같아요.”
“왜? 서커스단이 별로라?”
“아뇨... 위험하잖아요. 언제 잡힐지도 모르고, 떼돈 버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안정적으로,” “민니야.”
“네?”
“나는 어디 매여있는 게 싫어. 사람이든, 장소든.”
수진의 목소리가 약간 가라앉았다. 마주본 눈빛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땐 그게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정착한다는 말을 왜 저렇게 부정적으 로 표현하나 싶었다.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수진이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친절하게도.
“사실, 오늘 미연이 얘기하려고 데려왔어.”
“...조미연이요?”
나도 모르게 혼자 부르는 대로 호칭이 튀어나갔다. 큰일났다 싶었지만 수진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고갤 끄덕이더니 말을 잇는다.
“네가 미연이를 나쁘게 보고 있을 것 같아서.”
“아, 아니에요.”
“정말?”
“......그, 백퍼센트는 아니지만,”
“거봐.”
수진의 낯에는 날 탓하는 기색이 없었다. 대신 묘하게 자기 말에 집중시키는 힘이 있을 뿐이었다. 조미연의 금안처럼 강압적인 기운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솔직히 네 상황이 나쁘다는 건 알아. 아마 우리에게 정 붙이려면 한참 걸릴 거야. 아예 불가능할지도 모르고.”
“......”
“미연이가 처음부터 너 협박하고 욕해서 싫었지?”
“네...”
“이기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이해해줘. 인간한테 당한 일이 많거든.”
또. 또다시 그 얘기다. 전소연이 예슈화의 입을 틀어막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조미연이 서커스단에 들어오기 전 얘길 하고 있었지. 함부로 건들면 안 되 는 음습한 냄새가 풍겼다. 하지만 궁금하다. 먼저 나에게 이 주제를 꺼냈는데,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서수진이 고갤 저었다. 지금까지 본 것 중 제일 단호한 태도였다. “이건 미연이한테 들어.”
“저한테 말해줄까요?”
“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면.”
“불가능할 것 같아요.”
“...내 개인적인 희망이야. 미연이 곁엔 사람이 정말 없거든. 괜찮은 사람이.”
그래서 나보고, 그 ‘괜찮은 사람’이 되어달라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될 것 같았다. 우린 첫만남부터 더러웠다. 시작부터 불쾌하게 엮였는데 그게 잘 풀릴 리 없다. 지금은 좀 나아졌다지만 조미연과 나의 긴 장상태는 쉽게 풀릴 것이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친밀해지라는 걸까. 서수진은 자세한 이야길 하지 않았다. 마치 나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는 듯이.
“그냥 이것만 기억해. 조미연도 나도, 묶여있기 싫어서 서커스단에 들어왔다는 거.” 도통 알 수 없는 말이다. 나는 이해한 척 수긍했지만 서수진은 그마저도 눈치챈 듯했다.
약간 어색한 분위기에서 자릴 정리하고, 야영지로 돌아가기로 했다. 들어온 곳과 반대 방향에도 출입구가 있어서 그쪽으로 나가고 있었다. 뒤편이라 그런지 조명도 어둡고 사람도 적어서 조금 음산한 기운이 풍긴다. 나도 모르게 서수진 옆에 딱 붙어서 걷고 있는데, 그림자 속에 서있던 상인이 우릴 불렀다.
“희귀동물 보고 가시죠. 아름다운 게 많습니다.”
하면서, 슬쩍 보여준 통 안에는 거의 죽은 듯이 늘어진 동물들이 담겨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색의 그것들. 그중 똬리도 못 틀고 널브러져 있던 뱀과 시선 이 마주쳤다.
황급히 고갤 들자 상인의 뒤로 전시되어 있는 박제곤충이 시야에 들어왔다. 온통 형형색색의 나비, 나비, 나비. 돌을 조각한 듯 미동도 없는 날개를 보다가 문 득 팔에 닿는 감각을 느꼈다. 돌아보니 수진이 내 손목을 세게 그러쥐고 있었다.
-
돌아오는 내내 대화가 없었다. 수진은 수진대로 감정이 가라앉았고, 나는 나대로 마음이 복잡했다. 손에 들린 악어 인형이 뚫어져라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서 눈을 덮었는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했던 대화들, 조미연의 눈빛, 시장 끄트머리에서 목격한 점포까지. 어느 하나도 날 평온하게 해 주는 것이 없다.
“들어가.”
서수진은 내 어깨를 가볍게 치고 막사 안으로 사라졌다. 뭔갈 더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게 정확히 뭔지 모르겠어서 한참이나 그 앞을 서성였다. 왜 이런 말은 필요할 때 생각나지 않는 걸까. 마침내 한숨을 푹 내쉬고 돌아가려던 순간이었다.
“어디 갔다 와?”
어둠 속에서 조미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 같은 밤에도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밤공기가 쌀쌀한데 왜 민소매 차림인지 모른다.
“누가 팔 보는 거 싫다면서요.”
“...나간 거 너랑 서수진밖에 없는데 누가 봐.”
알고 있었구나. 이유없이 마음이 불편했다. 나쁜 짓하다가 들킨 어린아이처럼.
조미연은 한참이나 달빛 아래서 나를 응시했다. 새까만 눈동자에 어떤 감정이 담겨있는지 아무리 봐도 알 수 없었다. 이럴 때 서수진처럼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면, 아니 조미연이 자기 속내 숨기는 데 능숙하지 않다면 좋을 텐데. 기분이 나빠 보인다는 것만 간신히 알아챘다.
“...이거 선물이요.”
적막함을 견디기 힘들어서 악어 인형을 내밀었다. 내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왜? 무서워서? 긴장해서? 내 마음을 내가 알 수 없다니 참 이상하고... 별 난 일이다. 별난 서커스단에 있다보니 나도 동화되었나보다.
“서수진 돈으로 뽑아서 나한테 선물하는 거야?”
어깨까지 흠칫 떨면서 놀라버렸다. 조미연이고 서수진이고 여긴 왜 이렇게 꿰뚫어보는 사람들만 있는 건지. 아니라고 했어야 하는데 시기를 놓쳤다. 내가 대 답을 못하자 조미연이 돌아선다.
“됐어, 안 받아. 너나 가져.”
“그쪽 생각나서 사왔어요!”
급한 마음에 생각대로 말이 튀어나갔다. 거짓말은 아니니까.
잠깐 걸음을 멈췄던 조미연이 천천히 나를 돌아본다. 내 낯빛과 악어 인형을 몇 번 번갈아 살피더니, 그 가느다란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쥔다. 인형이 스르 륵 내 손을 빠져나갈 때 어떤 중요한 것도 함께 건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게 뭔지 모르겠는데도.
“...왜 이걸 보고 내가 생각나.”
조미연의 말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하지만 어딘가 다르다. 묘하게 떨고 있다. 입안이 바짝바짝 타는 것 같았다. 누가 속에 불을 질렀나.
“가장 비슷한 인형이었어요. 색도 초록색이고...”
“......실례야.”
“받아주는 거예요?”
“그래. 수진이 돈으로 산 거지만.”
“내일 갚으면 되잖아요.”
“뭐?”
“내일 월급날이라면서요. 수진선배가 그랬는데...”
나도 모르게 뺨을 긁으면서 말하고 있었다. 멍하니 이쪽을 쳐다보던 조미연이 미소짓는다. 이젠 웃음소리를 숨기지도 않는 것 같다. 뭐가 그렇게 유쾌하고 즐 거운지, 급기야 내 팔뚝을 툭 친다.
“너 진짜 바보구나?”
내가 뭘... 잘못 말했던가? 어리둥절해서 맞은 곳을 쓰다듬고만 있자 조미연이 악어 인형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날 향해 마치 인사하듯 흔든다.
“잘 자, 민니야.”
“......”
삽시간에 몸이 달아올랐다. 지, 지금 뭐 한 거야. 조미연도 자기 행동을 믿을 수가 없는지 얼굴을 붉히더니 빠르게 천막으로 사라졌다. 꼭 도망치는 사람마냥. 풀벌레 우는 소리가 한참이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 속에 조미연의 인사도 섞여있는 것 같았다.
7.
우기가 아침부터 날 흔들어깨웠다. 표정이 밝다. 단원들도 드물게 웃고 있다. 경사났냐 했더니 오늘이 돈 주는 날이란다. 그럼 나도? 방금까지 천근만근이던 눈꺼풀이 번쩍 뜨였다.
“와, 사람이 이렇게 많았나?”
천을 걷고 나가자 일렬로 서있는 단원들이 보였다. 무슨 놀이공원 입장 대기줄 같다. 우기에게 속삭였더니 키득키득 웃으며 다들 돈 앞에선 사족을 못 쓴다고 했다.
“근데 다 현금으로 받네.”
전소연의 천막에서 나오는 단원들의 손에는 하얀 봉투가 들려있었다. 예외는 없었다. 요즘 은행 신용도가 부실하긴 하지만 남한테 줄 돈은 계좌로 보내는 게 나을 텐데. 고개를 갸웃거렸더니 우기가 한껏 우쭐한 표정으로 콧대를 세웠다.
“바보야. 은행 쓰면 다 추적되잖아. 우린 현금만 취급해.”
“하긴. ...야, 이제 너까지 날 그렇게 부르냐?”
“왜, 미연선배는 되고 난 안 돼?”
우기가 또 발끈한다. 어디서 욱하는 건지 모르겠다. 욱하는 우기. 어감이 귀여워서 실실 웃었더니 속으로 자기 욕했냐며 멱살을 탈탈 흔든다. 얜 다 좋은데 가 끔 지나치게 앞서나가는 면이 있다. 혹시 이것도 조미연처럼 말 못할 사정인가 싶어서 내멋대로 받아주기로 결정했다.
줄은 빠르게 줄었고, 곧 우리 차례가 왔다. 우기가 먼저 들어가서 봉투를 팔랑거리며 나왔다. 기분이 한껏 좋아보인다. 내 몫은 분명 푼돈이겠지만 그래도 뭔 가 받는다 생각하니 설렜다. 천막 입구를 헤쳐 열려는 순간,
“김민니 일어났네?”
전소연이 안쪽에서 걸어나왔다. 돈은 다른 사람이 주나? 고개만 빼꼼 들이밀고 둘러보는데 아무도 없다. 사무실에 저 인간 말고 있긴 누가 있어. 당황해서 다 시 돌아보자 팔짱을 끼고 있던 전소연과 눈이 마주쳤다.
“제 돈은 안 줘요?”
“뭔 돈?”
“오늘 월급날이라면서요.”
망설임 없이 말이 튀어나갔다. 그야 내가 여기 온 최초의 이유는 돈인걸. 삼류부터 시작해서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 부호가 된다, 라는 원대한 야망을 품고 있 던 나는 이 상황이 매우 언짢았다. 그런데 전소연은 날 빤히 올려다보더니 개구지게 웃는다.
“자꾸 웃을 거면 이것도 공연으로 쳐주지 그래요?” “야, 너 웃긴다. 너한테 줄 돈이 어딨어.”
“네?”
이게 말로만 듣던 취업사기에 공금횡령? 멱살 잡을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보호소 시절 패거리로 몰려다니며 시비 붙던 버릇이 다시 튀어나오려고 한다. 그 때도 내가 먼저 덤비진 않고 상대방이 괴롭힐 때나 손봤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상황 아닌가. 여차하면 싸울 각오로 몸에 힘을 잔뜩 주는 순간 전소연이 기운 빠지는 소릴 했다.
“너 펑크낸 공연이 몇 회야. 거기다 기물 파손까지. 이번달 급여에서 다 깎고 없어.”
“언제 펑크를...!”
일단 우기다가 생각해보니, 아프다고 며칠 동안 일도 안 한 건 사실이었다. 비록 날 서커스단에 눌러놓으려는 수작이긴 했지만 조미연 무대 보조도 서야 했 고, 우기처럼 잡심부름도 해야 했는데 하루종일 누워있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노동착취 아니냐고 따지려는 걸 전소연이 선수쳐서 막았다.
“너 때문에 미연이 무대도 못 서서 손해가 막심했다고. 서수진이 간신히 땜빵치긴 했는데 어우, 그때 항의받은 거 생각하면...”
생각만으로도 질린다는 듯 고개를 마구 젓는다. 그치만. 그래도. 여전히 납득이 안 갔다. 조미연이 무대를 빠지긴 왜 빠져, 다른 애 세우면 되잖아. 그냥 돈 주 기 싫어서 대는 핑계같다. 내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는지 소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대 치겠다?”
“지금 돈 아까워서 거짓말하는 거죠.”
“아침부터 헛소릴 하네. 덜 나았나...”
“걔, 아니 그분이 무대에 왜 못 서요. 다른 단원 많은데.”
“너도 며칠간 연습해서 합 맞췄는데 하루만에 어떻게 새 조수를 만드냐? 말이 되는 소릴 해.”
“그래도... 복잡한 부분 빼고 공연하면 되는,”
“미연이가 다른 인간은 싫댔어.”
“네?”
“너 말고 다른 인간 조수로 쓰기 싫댔다고.”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순식간에 멍청이처럼 버벅대는 날 보며 전소연이 마뜩찮은 듯 눈을 흘겼다. 어딘가 못마땅한 얼굴인데. 그땐 부끄러워서 그런 거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저 왜 조미연이 고집을 부렸을까, 생각하느라 목덜미까지 달아올랐을 뿐...
“으휴. 맘에 안 들어.”
전소연이 들고있던 종이뭉치로 머릴 툭 때렸다. 왜요. 억울해서 물었더니 답없이 또 때린다. 아 진짜. 맞은 곳을 쓰다듬다가 다시 따질 거리가 생각났다.
“그럼 기물 파손은 뭐예요? 공연하면서 아무것도 안 망가뜨렸는데.”
“너 미연이 방 커튼 찢어놨잖아. 그새 까먹었냐?”
내가 언제...? 골똘히 생각하는데 지나가던 단원이 요상한 눈초리로 날 훑었다. 뭐야. 같이 노려봐 주다가 방금 전소연이 뭐라고 했는지 상기하자마자 또 얼굴 에 훅 열이 올랐다. 민망해서 괜히 신경질을 냈다.
“아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요! 오해하잖아요!”
“내가 뭘? 사실만 말했는데. 그 커튼 미연이가 아끼던 거야. 살아있는 게 기적이다.” “...비싼 물건이에요?”
“아니.”
“그럼 왜...”
“처음 받은 선물이거든.”
그 말을 하는 전소연의 눈빛은 잠깐 공상에 빠진 듯했다. 아주 오래 전 일을 회상하는 것처럼 시선이 붕 떠있다. 그에 반해 나는 또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 했다. 누구한테 받았길래 커튼을 아껴... 자제하려고 해도 머릿속에 조미연 얼굴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마음이 요상해져서 입술을 깨물자 전소연이 손사래 친다.
“너야말로 오해하지 마. 내가 준 거야, 옛날에.”
“...아.”
“방금 질투했냐?”
“아니거든요!”
“방이 허전해서 꾸미라고 준 거니까 질투하지 마라?”
“안 한다고!”
전소연은 내가 콧김 뿜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 한참 웃더니 다시 한숨을 푹 쉬고 또 맘에 안 든다며 머리를 통통 친다. 얼굴이 두 갠가. 홧김에 종이뭉치 를 뺏어들자 정강이를 퍽 걷어찬다.
“으악...!”
“이게 감히 하늘 같은 부단장님한테 대들어.”
“아씨, 멍 아직 안 빠졌는데.”
“볼 때마다 내 위엄을 상기하도록 해.”
진짜 헛소리 연발이다. 맞은 곳을 쓰다듬으며 쭈그려 앉자 전소연이 냉큼 종이를 낚아챘다. 저게 뭐길래. 궁금했지만 물어볼 틈도 없었다. 그나저나,
“쪽팔리게. 알면 말이나 해주지...”
어제 서수진과 조미연이 내가 돈 얘기만 꺼내면 웃던 게 이거였구나. 어차피 한 푼도 못 받을 걸 아니까. 아침부터 기대감에 부풀었던 마음이 바람 빠진 풍선 마냥 가라앉았다. 전소연은 내 표정을 보고도 위로의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내가 마음에 안 든다면서.
-
우기는 내 사연을 듣더니 한참이나 낄낄댔다. 동글동글한 얼굴을 구기고 실컷 웃는 게 얄미워서 배를 꾹 찌르니까 간지럽다고 펄쩍 뛴다. 남은 알거지 신센데 혼자 돈 버니까 좋냐. 그랬더니 좋단다. 한 번 더 간지럽히자 아주 바닥에 구를 기세다.
“아 미안. 나중에 맛있는 거라도 사줄게.” “적선하듯 말한다?”
“내가 언제.”
“방금 말투가 좀 거만했어.” “아니거든?”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고 항변한다. 일부러 무시하자 우기는 잠시 고민하다가 돈 봉투를 꺼내 내 눈앞에다 살살 흔들었다. 극악무도하기 짝이 없 다. 확 낚아채자 우는 소리하며 달라고 성화다. 한껏 높이 들어서 안 주려고 버팅기는데 뒤에서 누군가 날 불렀다.
“민니야.”
조미연 목소리다.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다가 우기랑 스텝이 꼬여 같이 넘어졌다. 아프고 창피해서 고갤 못 드는 와중, 머리 위로 퍽 다정한 목소리가 쏟아진 다.
“괜찮아?”
미연이 날 잡아주려고 손을 내밀고 있었다. 무심코 잡으려다가 그게 왼손인 걸 알고 멈칫하자 조금 더 내민다. 소매 올라가서 비늘 다 보이는데. 미연은 별로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 망설이다가 잡고 일어나니 우기는 벌써 똑바로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연이 시선을 느끼자마자 왼쪽 소매를 내렸고, 그 에 우기의 미간이 약간 일그러졌다.
지금 인상 찌푸린 거 맞아?
왠지 기시감이 느껴졌다. 어제 야영지를 떠나기 전, 트럭에 올라타면서 내 쪽을 쳐다보던 우기의 표정이 분명 지금과 비슷했다. 그럼 어제도 인상 쓰고 있었 나. 왜? 혹시 안 일으켜줘서 삐졌나? 이건 너무 유치하고 우습다. 그럼 비늘이 징그러워서? 하지만 우기도 수인이었다. 지금 기분 나빠할 이유가 뭐 있지?
잠시 묘한 기류가 흘렀다. 우기가 먼저 꾸벅 인사하고 사라졌고, 나는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멍하니 보고 있었다. 쟤가 가끔 저럴 때마다 신경쓰이고 답답하 다. 그러니까, 미안하다거나 걱정된다기보다는... 좀 더 찜찜한...
“왜 나 안 봐?”
상념에 빠져들려는 찰나, 미연의 산뜻한 목소리가 날 깨웠다. 조심스럽게 손목을 잡고 시선을 맞춘다. 마주한 눈빛에 내 당황한 얼굴이 고스란히 비쳤다. 갑 자기 사근사근 구는 것도, 너무 가까이 붙는 것도 이상했지만, 뭣보다 놀라운 건 왼손으로 날 잡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분명히 왼팔은 건드리지 말라고, 부축 도 그쪽에서 하지 말랬을 정도로 민감했는데. 손목에 닿은 미끄러운 비늘 촉감이 어색해서 시선을 피하자 미연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계속 눈 피하면 공연은 어떻게 해.” “...몰라요.”
“어젠 안 그러더니 갑자기 수줍음 타네.” “너무 가까워요...”
나도 모르게 말하면서 양 뺨을 감쌌다. 얼굴이 너무 붉을 것 같아 식히려는 행동이었는데, 그게 미연에겐 꽤나 웃기게 보인 모양이다. 입을 가리고 참는데 어 깨가 떨리는 게 다 보였다.
“차라리 그냥 웃으라고요.”
그랬더니 보는 눈 많아서 안 된다고 고갤 젓는다. 참나. 이미 사람들은 조미연이 나와 바짝 붙어있는 걸로도 엄청난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자꾸만 흘끔거리 는 게 부담스러워서 한 발짝 물러났더니 미연이 갑자기 손목을 놓는다.
“...싫어?”
“그게 아니라, 자꾸 쳐다봐서.”
“......”
“아니, 진짜 아니에요! 안 싫어요!”
“그럼 다시 잡아.”
미연이 손을 내밀었다. 다들 쳐다보고 있다니까 이번엔 오른손이다. 입술을 꾹 다물고 눈매도 늘어뜨린 게, 안 잡아주면 화낼 것 같아서 얼른 잡았다. 그랬더 니 다시 옅은 미소를 띤다. 하여간 사람 철렁하게 하는 데 뭐 있어.
휘둘리는 나도 이상하지만.
“...우리 어디 들어가면 안 돼요? 더 쑥덕거리는데.”
“안 그래도 너 데려가려고 왔어.”
미연이 천연히 웃었다. 왜 저 입매가 움직일 때 내 마음도 오르락내리락하는지 모른다. 첫만남을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변화였다.
-
미연은 나를 분장실로 이끌었다. 단 둘이 연습했던 그 천막보다 훨씬 크고 너저분한 곳이었다. 들어서기 전엔 사람이 많을 줄 알고 웬일로 이런 델 왔나 했는 데, 막상 내부는 한산했다. 한 번도 말섞어본 적 없는 단원 한 명만이 반겨줄 뿐이었다.
“여기 앉아.”
미연이 조명 켜진 거울 앞에 날 꾹 눌러 앉혔다. 당장 공연할 것도 아닌데 뭐지. 어리둥절해서 쳐다봤지만 대답해주지 않는다. 대신 의자 뒤에서 내 어깨에 손 을 얹고 거울만 빤히 응시한다. 어쩌다 거울을 통해 눈이 마주치면 장난스럽게 손까지 흔들어준다. 어제 조미연 누구랑 영혼 바뀌었나? 믿을 수가 없어서 입 을 열려는 순간 아까 마주친 단원이 내 뒤로 다가왔다. 자연스레 미연은 한 발짝 물러나 섰다.
“얘 네 새로운 조수 맞지?”
“네.”
네? 네라고?
재빨리 단원의 얼굴을 살피자 제법 깊게 패인 주름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가 꽤 있어 보였다. 하지만 조미연이 그런 거 따져가며 예절 지키는 모습은 본 적 없 는데. 이 단원이랑 이야기하는 것도 본 적 없지만... 그래서 몰랐나. 내가 입을 못 다물고 있자 그 단원이 직접 턱을 닫아주었다.
“분장할 때 이러면 안 돼. 입 다물면 다 찢어진다.” 뭐가 찢어진다는 거야...
등줄기가 섬찟해서 입을 꾹 다물자 나이 지긋한 분장사가 옳지, 하면서 칭찬했다. 마치 강아지가 된 기분이다. 영 불안해서 눈동자를 굴리다 팔짱 끼고 있던 미연과 시선이 마주쳤다. 잘 해. 입모양으로 그리 말한다. 뭘?
“저 어디 째나요?”
두려움에 떨며 조심스레 물었다. 헌데 분장사는 못 알아듣겠다는 얼굴로 갸우뚱하더니 미연에게 말을 건다.
“뭐 한다고 말 안 했어?”
“아... 미리 말하면 안 올 것 같아서요. 얘 겁쟁이거든요.”
보호소 애들끼리 싸우면서 퍼부은 악담보다, 미연의 입에서 나오는 바보 멍청이 겁쟁이라는 단어가 더 신경 쓰인다. 은근히 자존심도 상하고. 내 눈썹이 눈과 가까워지면서 일그러지자 분장사가 호탕하게 웃었다.
“애 토라졌잖니.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저 애 아닌데요...”
“내 눈엔 애 맞아.”
간단히 일축한 분장사가 화장대에 놓여있던 둥그런 통을 열었다. 안에는 피부와 비슷한 색의 쫀득쫀득한 크림덩어리가 들어있었다. 퍼내는 걸 보니 무슨 찰 흙 같기도 했다. 처음 보는 물건이라 멍하니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분장사가 내 목덜미에 손을 댔다.
“뭐, 뭐예요!”
“아이고. 숫기가 하나도 없네.”
뒤에서 미연이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릴 냈다. 거울로 째려보자 안 웃었던 척 정색하는데, 어깨가 또 떨린다. 저놈의 어깨. 얄미워서 잡아누르고 싶다고 생각하 다가, 며칠 전 목격한 미연의 하얀 등이 생각나버렸다. 내가 미쳤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자책하고 있으려니 분장사가 어느새 목덜미에 뭔갈 잔뜩 발라놨다.
“이거 찰흙이에요?”
“그런 건 애들도 안 써. 왁스야.”
“저 분장하는 거예요?”
“그래. 이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
하면서, 분장사가 반짝 빛나는 은빛 물건을 꺼냈다. 칼이었다. 그것도 의료용 메스처럼 생긴. 화들짝 놀라서 일어서려는데 자세히 보니 날이 없다. 뭐지. 조금 긴장한 채 기다리자 분장사가 그걸로 방금 바른 왁스에 칼집을 냈다.
“미연아. 이거 봐봐. 물린 것 같니?” “비슷해요. 근데 좀 더 깊이...”
둘이서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눈다. 물리긴 뭘 물려. 자꾸 내 목덜미를 내려다보면서 대화하니까 부끄러워 살 수가 없다. 얼굴이 조명보다 더 달아올랐을 것 같 아서 자꾸 뺨에 손을 대게 된다. 분장사가 쓰읍, 무서운 소릴 내면서 제지했다. 꼭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자, 다 됐다.”
칼집 낸 후엔 붓으로 붉은 액체를 바르고, 왁스가 티나는 경계선은 또 끈적끈적한 기름덩어리를 발라 정리했다. 거울을 보니 목덜미에 작은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보였다. 으시시해. 진짜 상처가 난 것 같아서 자꾸 매만지자 안 된다고 손등을 탁 친다. 민망해서 뒤통수를 긁다가 문득 둘러보니 미연이 저만치 가 있 었다.
“뭐해요?”
멀찍이 떨어진 화장대 서랍에서 뭔갈 열심히 보고 있길래 등 뒤로 다가갔다. 기척을 못 들었는지, 내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미연이 갑자기 뒤를 돌아본다. 너 무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자칫하면 입술도 닿을 정도다. 그걸 깨닫자마자 귀가 뜨거워졌다.
“죄, 죄송해요...”
서둘러 물러나자 미연도 어색하게 대답한다. 아니야. 다시 서랍 쪽을 돌아보는 얼굴이 미묘하게 달떠보인다. 괜히 침이 꿀꺽 넘어갔다.
분장사는 사용한 도구를 정리하더니 미연에게 다가와서 이것저것 조언을 해주고 사라졌다. 대충 들어보니까 내 목에 칠해진 액체와 가장 비슷한 색을 골라주 는 것 같았다. 대체 뭐길래. 어깨 너머로 살짝 엿보니 통 안에 작은 캡슐들이 가득했다. 전부 새빨간 색이다. 미연은 마치 알약처럼 생긴 그것들을 쥐고 한참 고심하더니, 두어 개를 골라 꺼냈다.
“우리 레퍼토리를 좀 바꿔볼까 하거든.”
뜬금없는 본론에 잠시동안 알아듣지 못했다가, 곧 공연 얘기라는 걸 깨닫고 수긍했다. 며칠 밤새워 연습한 그거. 안 그래도 너무 위험하고 긴장돼서 걱정하던 참이었다. 미연이 가까이 다가와 손바닥을 펴 보여준다.
“이게 피 캡슐이야. 입안에 넣고 깨물면 흘러나와.”
“아... 그럼 혹시 분장도?”
“응.”
내가 목덜미를 가리키자 미연이 작게 대답한다. 슬슬 뭘 하려는지 감이 왔다. 미연은 지금 가짜로 독살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뱀으 로? 아니면 인간으로? 독니가 정말 닿으면 어쩌지? 내가 미연의 치아 쪽을 빤히 쳐다보자 하얀 얼굴이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왜 입술 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또 오해를 사버렸다. 미치겠네. 허둥지둥 손사래치는데 이번엔 숨기지 않고 웃는다. 내가 바보처럼 굴 때 제일 재미있는 모양이다. 머리에서 김이 오르는 것 같아 다른 곳만 쳐다보고 있으니 미연이 입에 캡슐 하나를 머금은 채 말했다.
“걱정 마. 독니 있긴 하지만 진짜 물진 않아.”
“...좀 무서워요.”
“지금은 시범만 해보자. 어차피 실제로 할 땐 이에 마개라도 씌울 거야.”
미연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와중에도 다칠 걸 염려했는지, 오른손만 완전히 어깨를 잡고 왼손은 그 너머로 걸친 채다. 이 상태로 깨무는 시늉을 한다 고. 목덜미에다가...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가짜 상처가 뜨거워진다. 미연도 꽤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자꾸 나를 보고, 다가오질 못하고, 눈을 몇 번이나 깜 빡이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으니까.
“그럼...”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문득 우리의 거리가 아까보다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서서히 다가오는 얼굴을 위에서부터 느릿하게 훑어내렸다. 반듯한 이마와, 살짝 내리깐 눈, 도드라진 콧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선에 얽힌 것은,
입술.
미연이 미처 다가오기도 전, 나는 충동적으로 고개를 꺾어 키스했다. 맞닿은 살 감촉이 여리고도 뜨거웠다. 내 어깨에 얹힌 미연의 손끝에 힘이 잔뜩 들어가 고, 작은 입술 새로 차가운 액체가 흘러나온다.
“......괜찮아요?”
안 그래도 붉은 입술이 더 새빨개졌다. 어쩌면 지금 미연의 속마음이 저럴지도 모르겠다. 엄지로 아랫입술을 닦아주면서 묻자, 미연이 날 밀어내고 밖으로 달 음질쳤다. 소매로 급히 입술을 문지르며 멀어지는 뒷모습이 유난히 유약해 보였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홀로 서서 내 입술에 묻은 액체를 매만지기만 했다.
8.
미연은 오후 내내 천막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혼자 뭘 하고 있나 궁금하기도 했지만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 입구 앞에서 서성이기만 했다. 그러 다 주방에서 식재료 정리할 일손을 찾는다는 소리에 자릴 떴고, 그대로 늦은 저녁까지 이 일 저 일 돕느라 미연은 마주치지도 못했다.
자꾸만 입술에 맴도는 촉감에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미연의 막사로 향하던 참이었다. 아직 식사 안 했으면 그거 핑계로 같이 있으려고 했다. 그런데 작은 천막에서 귀를 잡아끄는 목소리가 들렸다. 전소연의 사무실이었다.
“......글쎄, 난 이제...”
가까이 다가가자 서수진의 음성이 새어나왔다. 나른하고 느긋했던 평소 억양 대신 약간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하고 있다. 무슨 일이지. 엿듣는 게 나쁘단 것쯤 은 알지만, 항상 조용하던 수진이 심기불편해질 상황이 대체 뭘까 싶어서 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는 닫힌 입구 앞에 가만히 서서 그들의 대화를 경청했 다.
“솔직히 너무 불안해. 이제 그만하자, 응?”
“그럼 우리 다 관두고 뿔뿔이 흩어져야 돼. 그게 좋아?”
서수진이 회유하고, 전소연이 단호히 거절한다. 꽤 심각한 대화같았다. 뿔뿔이 흩어진다니. 마치 서커스단이 사라질 것처럼 말하고 있다.
웃긴 건 그 말을 들은 순간의 내 반응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서커스단에서 벗어나면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거나, 드디어 탈출이다 하면서 좋아할 줄 알았다. 헌데 ‘흩어진다’는 단어를 듣자마자 떠오른 감정은 놀랍게도 걱정이었다. 그것도 미연에 대한 걱정.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 대한 걱정이다. 전소연의 말을 듣는 순간, 단원들의 안위 따위보다 다시는 미연을 못 만나게 될까 그게 두려웠다. 스스로 생각 해도 어리석고 이기적이다. 내 코가 석잔데 이런 태평한 생각이나 하는 것도, 서커스단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관심이 없는 것도.
“나 더이상 슈화한테 빚지기 싫어. 나중에 우리한테 더 크게 돌아오면 어떡해?” “그럼 처음부터 거절했어야 해. 애초에 도움 받으면 안 됐다고.”
“이제라도 정상적으로 운영하자. 응?”
“갑자기 왜 이래? 걔한테 신경증 옮았어?”
“그 얘기가 왜 나와.”
걔가 누구야. 어쩐지 귀가 간지럽다. 신경증이라니 설마 내 얘긴가. 인상을 슬며시 찌푸리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적당히 듣다 가려고 했는데 분위기가 점점 심각해진다.
“수진아. 우린 이미 너무 멀리 왔어. 안 걸리고 도망다니는 게 최선이야.” “...요즘 점점 불안해져.”
“왜?”
“이제야 살만해졌어. 조금씩 즐거운 일도 생기고...”
“......”
“행복해지기 시작하니까, 불안해. 어느날 다 산산조각날까봐...”
수진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물기 서린 음성에서 알 수 있었다. 울고 있구나.
“...휴지 가져올게.”
의자를 밀고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움직일 생각을 못했다. 천막 안쪽 어딘가에 휴지가 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자국 소리 가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우두커니 서있기만 했다. 전소연이 입구를 헤치고 불쑥 튀어나올 줄도 모른 채.
“너 여기서 뭐하냐?”
차가운 목소리가 날 쏘아붙였다. 어깨 너머로 수진이 이쪽을 돌아보는 모습이 보였다. 한참 당황해서 얼타는 나를, 소연이 멱살 잡아 끌어들였다. -
대화 엿들었다고 또 맞을 줄 알았는데, 전소연은 날 서수진 옆자리에 떠밀어놓고 휴지 찾으러 사라졌다. 덕분에 내 옷은 수진의 임시 손수건이 되었다. 소매 가 다 젖도록 눈물을 닦아줬는데 멈추질 않는다. 잔잔하게 오래 우는 타입이다. 결국 양 팔이 축축해졌다. 으으. 차마 불쾌한 티는 못 내겠고, 더 닦아줄 천도 없어서 그냥 어깨를 토닥였는데 수진이 내 품에 기댔다. 어라.
“김민니 뒤질래?”
당황해서 뻣뻣이 굳어있는 순간 전소연이 들어왔다. 우릴 보더니 손에 든 두루마리를 냅다 집어던졌다. 머리통을 제대로 얻어맞은 내가 아프다고 투덜대자 위협적으로 눈을 부릅떴다.
“하여간 맘에 안 드는 자식이야. 수진이도 떨어져 얼른.”
“휴지...”
“니가 주워.”
휴지 달라고 한 건 서수진인데, 전소연이 주우라고 시킨 건 나였다. 맨날 나만 만만하지. 끙끙대며 테이블 밑으로 손을 뻗자 두툼한 게 만져졌다. 흙투성이 두 루마리를 탈탈 털어서 건네주자 서수진이 피식 웃었다.
“진짜 미연이 말대로다.” “뭐가요?”
“귀여운데 바보같아.” “아 또 왜요...”
“그냥 더러운 부분 뜯고 주면 되잖아.”
어, 그러네. 멍청하게 수긍하고 있는 날 보며 두 사람은 한바탕 키득거렸다. 특히 서수진은 우느라 팅팅 부은 눈으로 그러고 있어서 좀 우스웠다. 결국 나까지 전염돼서 한참 정신 못차리다가, 전소연이 테이블을 탕탕 치는 통에 겨우 진정했다. 지도 쪼갰으면서 진중한 척이다.
“야 김민니. 너 왜 엿들었냐?”
“너무 심각하게 얘기하길래...”
“심각하면 기밀인 줄 알고 눈치껏 빠져야 될 거 아냐. 미연이만 아니었어도 확...”
손에 둘둘 말아쥔 종이뭉치로 때릴 듯이 위협한다. 반사적으로 웅크리다가 그게 아침에 본 거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내 시선이 종이에 고정되어있으니 전소 연이 한숨을 푹 내쉰다.
“쓸데없이 기억력은 좋아.”
“그게 대체 뭐예요?”
“넌 몰라도 돼.”
“거짓말. 그럼 애초에 왜 끌고들어왔는데요.”
“한 마디를 안 지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쫓을 기미가 없다. 분명 뭔가 이야기해주려고 들인 거다. 아니나 다를까, 끈질기게 기다리자 소연이 종이뭉치를 반듯이 펴서 테이블 에 펼쳐놓았다.
“...보험 가입자 명단?”
여러 장의 종이는 보험회사에서 빼온 서류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사진과 이름, 주소, 직업 등 상세한 신상명세가 적혀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입한 보험상품 과 보장금액까지. 척 봐도 외부로 유출하면 안 되는 개인정보다. 잘 모르는 내가 봐도 그건 알겠다. 이게 어떻게 전소연한테 있지. 놀라서 생각해보니 딱 하나 짐작 가는 경로가 있었다.
“예슈화가 준 거예요?”
소연이 고갤 끄덕인다. 수진이 한숨을 푹 쉰다.
“들키면 잘리지 않나?”
“귀한 집 자제분이시라 해고쯤 별 문제도 아니랜다. 부러워 죽겠네.”
“그런데 고객 정보를 우리한테 줘서 뭐해요? 무슨 청부업자도 아니고.”
“신규가입자만 계속 죽으면 의심 산대.”
뭔 말이야. 멀뚱히 보고있으려니 전소연이 서류의 귀퉁이를 탁탁 치면서 설명했다.
“안 그래도 냄새 맡은 판에, 새로 가입하는 놈들만 쏙쏙 골라 실종되면 더 위험하다고. 역선택으로 의심받는다나 뭐라나. 패턴이 일정하면 추적하기도 쉬우 니까 기존 가입자들 중에 고르라던데.”
“뭘 골라요?” “단장.”
그제야 둘이 무슨 얘길 했는지 이해가 갔다. 전소연은 예슈화가 빼돌린 고객정보로 다음 단장을 물색하려는 거고, 서수진은 이제 그만하자는 거다. 그래서 불 안하다느니 신경증이냐느니 하는 소리가 나왔구나. 내 얘기 맞았네. 전소연을 째려보다가 서수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저 질문해도 돼요?”
“해봐.”
“빚지기 싫다는 게 무슨 소리예요?”
수진이 입을 앙다물고 잠시 고민했다. 답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자꾸 슈화한테 도움받으면, 나중에 돌려받으려 할까봐...”
“돌려받는다는 게,”
“나 억지로 데려갈 것 같아서.”
“아...”
수진과 야시장에서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매여있는 게 가장 싫다는 말. 서수진은 지금 슈화가 나중에라도 자신을 옭아맬까 걱정하고 있다. 어찌보면 현실적 인 염려였다. 예슈화는 이곳에서 무슨 일을 벌이는지 알고 있는 데다, 맘만 먹으면 경찰과 회사에 바로 폭로할 수 있는 위치였다. 전소연 말로 미루어보건대 범죄에 가담한 대가도 크게 치르지 않을 것이었다. 보호해줄 수단이 있으니 사랑에 미쳐서 이런 짓도 돕겠지. 게다가 이번엔 아예 고객 정보를 빼다가 바쳤 다. 이런 식으로 받는 게 많아질수록 수진이 슈화의 요구를 거절하기도 어려워진다. 지금이야 별 행동 않는다지만 인내심이 언제 바닥날지 모르니까.
그에 반해 전소연은 위험하더라도 도움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서커스단 사정은 자세히 모르지만 주기적으로 들어오는 거금이 없으면 곤란한 모양이었다. 나같으면 처음부터 이런 일 시작도 안 했을 텐데 싶었다. 서커스단을 유지시키기 위해 인생을 걸어야 한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안 하는 게 계산에 맞지 않나?
“부단장님.”
“뭐.”
“애초에 왜...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이 일을 하세요?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아 이건 안 되겠다. 감이 왔을 거잖아요. 저라면 그때 관뒀을 텐데.” “알고 싶어?”
“네.”
“말하자면 좀 길어.”
소연이 펜을 휙휙 돌리며 뜸들였다. 어쩐지, 내가 이곳의 일원을 넘어서서 핵심부에 스며들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좀 의아했다. 뭘 했다고 위치가 격 상했지? 난 무대 위에서나 아래서나 딱히 도움 되는 게 없다. 그냥 적당히 노는 일꾼이지. 전소연도 처음엔 그 정도로 날 대우했다. 그런데 뭐 때문에 이런 내 밀한 속사정까지 흘려주는지 모르겠다. 우기도 나처럼 살인현장을 목격했다는데, 걔한테는 이러지 않으면서...
“간단히 말해줄게.”
소연이 마침내 펜을 내려놓고 눈을 마주쳤다.
“우리도 우리 인생을 선택하지 않았어. 아니, 못했다에 가깝지.”
“그게 무슨,”
“난 열일곱살까지 한 공장에 갇혀살았어. 서수진 조미연하고 함께.”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돌아보니 수진이 책망하는 눈길로 전소연을 보고 있다.
“그걸 네 맘대로 말하면 어떡해.”
“걱정 마, 미연이 얘기는 안 할 거니까.”
“벌써 했잖아.”
“이 정도도 안 하면 얘를 어떻게 이해시켜?”
둘이 또 언성을 높인다. 나는 말릴 정신도 없었다. 공장이라니. 감옥 아닌 다른 곳에 사람이 평생 갇혀산다는 건 듣도보도 못한 이야기다. 그런데 셋이 그런 일을 겪었다고? 설명이 필요했다. 아직 이해하려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다.
“그게,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갇혀있었다니. 일한 게 아니라요?”
“정확히 말하면 노동착취지. 수인은 감금해놓고, 빚쟁이나 그 자식처럼 책잡힌 인간들은 데려다 공짜로 부려먹고. 들어봤어?”
“아니요... 대체 왜 그런 데를 놔둬요? 범죄잖아요.”
“돈이 되니까.”
소연이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이어붙인다. 저급한 제스처가 지금 대화 소재에 꼭 어울렸다.
“그 수인이 생산하는 모든 게 엄청난 돈이 되거든. 그러니 로비 처먹여서 단속 피하고 재판 피하고 수사 방해하는 거지.”
“그래도 언젠가는 세상에 밝혀질 거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틀어막을 수 있어요?”
“너 첫 공연 때 내가 한 말 기억나?”
첫 공연이라. 너무 긴장해서 어떻게 해냈는지 기억도 안 나는 그때. 전소연이 뭐라고 했었지. 가만히 골몰하자 어렴풋이 한 단어만이 되살아났다. “퀭하다고...”
전소연은 분명 관객 중 몇몇의 눈빛이 퀭하지 않냐고 물었었다.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단순히 피곤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오지. 어 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소연이 펜촉으로 천장을 가리키며 말한다.
“내가 걔네보고, 수인에 이상하게 집착하는 새끼들이라고 했지?” “네...”
“그런 인간들이 위쪽에 있다면 어떨까?”
“......”
“걔네가 과연 적극적으로 잡아족칠까? 가만히 있으면 공장에서 알아서 원하는 걸 갖다바칠 텐데.”
머리가 어찔했다. 수인과의 갈등이나 전래동화처럼 어렴풋이 들어봤지 이런 역겨운 이야기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더 듣기 싫어 귀라도 막고 싶었지만, 서 수진이 지켜보는데 그런 짓을 할 순 없었다. 난 곧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갤 숙였다.
“역겨워?”
“엄청요......”
“나도 그랬어. 세상에 대체 남을 해치면서까지 신체 일부를 긁어가고 그걸 수집하고 팔아먹는 지랄을 왜 할까, 맨날 생각했어. 이해할 수가 없었거든.”
“......”
“진짜 더러운 꼴 많이 봤지. 어느날 친구가 사라지면 무슨 소문이 들리는지 알아? 허가도 안 받은 연구소에 팔려갔대. 그까짓 비누랑 사치품 좀 만들겠다고 이미 온몸에 상처 그득한 애들을 홀라당 데려간 거야.”
“저, 듣기가 힘든데...” “그래 보인다.”
수진이 등을 둥글게 쓸어주었다. 최대한 생각을 안 하려고 했다. 먹은 걸 도로 게워낼 것 같아서. 전소연은 내 이마에 불거진 핏대를 보고선 잠시 틈을 주었 다.
“...어쨌든, 그런 데서 십몇년을 보내다가 갑자기 해방됐다고 생각해봐.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모르겠다. 아마 아무 곳에나 들어가서 가장 힘들고 더러운 일을 맡게 되지 않을까.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말그대로 객사할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청소년이 면 보호소밖에 답이 없는데, 사람은 넘쳐나고 시설은 부족해서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전소연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사실 나 혼자였으면 네 말대로 했을지도 몰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닥치는 대로 일했겠지.”
“그런데 왜...”
“친구들이랑 헤어지기 싫었어. 걔네가 어떻게 될지 빤히 보여서.”
소연이 턱을 괴며 웃었다. 그 미소는 아주 낯설 정도로 순수한 것이었다. 내가 멍청한 짓을 해서도 아니고, 사람을 비웃고 싶어서도 아닌, 정말 웃고 싶어 짓 는 미소. 눈동자는 분명 나를 보는데 눈빛은 저 멀리 아득한 시절로 떠나 있는 얼굴이었다. 친구라. 소연이 말하는 친구가 누군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인간 아니죠.”
“눈치 빠른데?”
소연은 언젠가 내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때완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사람이... 햇빛도 못 보고 칼질이나 당해가며 지내면 정신머리가 어떻게 되는지 넌 모를 거야. 알 필요도 없고. 내 친구들은 그런 상태였어.” “......”
“걔넬 혼자 알아서 살라고 보내면 하루는 버틸까? 발 밑이 절벽인지도 모르고 떨어져 죽거나, 똑같은 곳에 또 끌려가거나.”
“그럼 그때,”
“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할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더라고. 그나마 나랑 다른 인간들 몇몇은 걔넬 보호할 울타리가 되니까... 위험해도 같이 살아남아보자고 합심했지.”
아무리 취약해도 수인 혼자 내버려지는 것과 곁에 인간이 있는 건 다르다, 고 소연이 말했다. 그때 공장에 갇혀있던 수인들은 출생신고조차 안 된 경우가 많 았고, 법적으로 보호받는 것에 한계가 뚜렷했다. 그걸 알면서는 차마 헤어질 수가 없어서 온갖 위험을 감수하고 서커스단을 차렸다가 지금 상황에 이르렀다 고 했다. 어디부터 잘못된 건지, 전소연 본인도 이젠 모르겠다며 고갤 저었다.
함부로 말 얹기가 어려워 괜히 서류만 빤히 쳐다보던 때였다. 문득 눈에 띄는 점이 있었다. 가입자 명단의 직업란에 적힌 공통된 특이사항들. “부단장님.”
“왜?”
“혹시... 단장 영입해서 죽이는 것도, 단순히 보험금 말고 다른 이유가 있어요?”
“똑똑하네.”
이곳에 들어와서 처음 듣는 칭찬이다. 보면 전소연은 언제 거북한 이야길 했냐는듯 다시 장난스레 웃고 있었다. “나 그렇게 무분별한 사람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지?”
예슈화가 추려온 명단 속 가입자들의 직업사항은 대다수 수상한 냄새를 풍겼다. 일반 회사원이라고 되어있지만 수입이 지나치게 크거나, 생산직 근무자라고 적혀있는데 거주지가 ‘그런’ 공장들이 밀집해있는 곳이거나 하는 식이었다. 자기 희생으로 세상이 아름다워진다고 했던 게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담이었던 모양이다. 이제야 어떤 심정으로 그 소릴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이 일은 별개다. 서수진 말대로, 언젠가 꼬리 밟히면 간신히 쌓아온 일상이 모조리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냥 평범하게 운영해보고 안 되면 해체해도 되지 않을까. 서커스에 대단한 사명감이 있는 게 아닌 이상 이 직업만 고집할 이유는 없다.
“부단장님. 제가 생각해도 여기서 멈추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쭈. 갑자기 단장 행세를 하네?”
“그렇잖아요. 이제 이 사람들 다 혼자 생활할 줄 아니까, 다같이 망하는 것보단 지금이라도 손 떼는 게,” “너도 미연이 데려가고 싶냐?”
“예?”
“너도 예슈화처럼 미연이 데리고 살고 싶냐고.”
뭐, 뭔 소리야...
뒤늦게 중얼거렸지만 목소리에 완전히 혼이 빠져 있었다. 전소연은 정곡을 찌른 사람마냥 좋아하며 배를 잡고 웃었다. 하여간 사람 정신 빼놓고 즐거워하는 게 참 고약한 성격이다. 어쩌면 내가 너무 부담스러워할까봐 분위길 환기한 것도 같고. 뭐가 진실이든 지금 내가 엄청나게 부끄러운 건 틀림없었다. 얼굴에 열이 후끈후끈 차올랐으니까.
“처음부터 맘에 안 들더라니. 우리 미연이가 너 같은 애한테 코꿰였을줄은...”
“아 뭐라는 거야 진짜!”
“그냥 쫓아버릴 걸 그랬어. 아니면 미연이 조수로 붙여주질 말든지. 어휴, 내 실수다.”
전소연은 이미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서수진도 말은 안 하지만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놀라고 당황한 건 나였다. 우리 사이에 일 어난 일을 이 사람들이 어떻게 알아. 그 생각하는 순간 서수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연이가 말했어.”
“...뭘요?”
“걔 우리한텐 온갖 고민 걱정 잘 털어놓거든. 너 아프고부터 계속 네 얘기만 했는데... 몰랐지?”
알 턱이 있나. 처음 듣는 얘기라 당황스럽기만 하다. 지금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추면 어깨 위로 온통 새빨갈 것이다. 어떻게 나한텐 전혀 티도 안 내고 뒤에서 상담까지 했을 수가. 아주 당황스럽고 놀라운데 한편으론 귀여웠다. 그 사람한테도 그런 면모가 있구나 싶었다.
“...너 지금 미연이 귀여워하고 있지.”
서수진은 귀신이었다. 나비가 독심술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는데. 너무 정확해서 나도 모르게 의자를 덜컹 밀고 일어섰다. 전소연은 이제 즐기다 못해 미연 을 불러올 기세였다. 도망가야지. 서커스단에 관해 할 말이 아직 남아있었는데, 이리저리 휩쓸리고 나니 쪽팔려서 튀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나는 그대로 천막 밖으로 달려나갔다.
-
그 후 며칠간 나는 미연을 피해다녔다. 서수진도 전소연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내 얘길 했던 건지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따금 우기가 요 즘은 왜 그 셋과 어울리지 않냐고 물으면 그냥 귀찮아서라고 답했다. 우기는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희한하게 표정은 밝았다.
그날도 미연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사람 많을 때 저녁식사를 하고 나온 참이었다. 한산한 걸 좋아하는 미연은 아예 일찍 먹거나 늦게 먹기 때문에 피하기 쉽 다. 이제 슬슬 그만하고 대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쉽사리 찾아가기가 어려웠다.
“...야. 조미연이 너 본다.”
우기는 주위에 단원이 없으면 거리낌 없이 반말하는 편이었다. 다들 밥 먹느라 식당 천막에 처박혀있을 때라 밖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옆구리를 푹 찌르면서 귓속말하길래 가리키는 방향을 봤더니, 조미연이 홀로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노려보는 것 같기도 했다. 멀고 어두워서 제대로 분간 하기가 어려웠다.
“둘이 싸웠어?”
우기가 눈치없이 속닥거렸다. 뱀이라 청력이 약하다고 아무 말이나 면전에서 주워섬긴다. 들어가있어. 마구 밀어서 보내놓고 한걸음 옮기는데, 미연이 그대 로 돌아서서 자기 막사로 들어가버렸다.
“잠깐만요!”
내가 다급히 외치면서 쫓아가도 답하지 않는다. 많이 맘상했나. 그제야 내 행동에 깊은 후회가 일었다. 창피하다고 몸 사리느라 미연을 놀래킨 게 분명하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곧바로 피해다녔으니... 이제 욕먹을 일만 남았겠지. 안절부절 못하며 막사 앞을 서성이다가 그래도 이야기해봐야겠다는 심정으로 조심 스레 들어섰다.
“...있어요?”
자그맣게 불러봤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미안함에 제발저려서 개미목소리로 말했으니. 미연은 등을 돌린 채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천 천히 다가가자 뭐라고 중얼거리는 게 들린다.
“악악아...”
악악아가 뭐지?
“내가 싫어졌나봐...”
미연이 계속 혼잣말을 읊조린다. 안 그래도 가느다란 목소리에 물기가 서려있다. 설마. 입술을 깨물며 인기척을 내자 놀란 미연이 이쪽을 휙 돌아본다. “울어요?”
심장이 철렁했다. 눈이 그렁그렁하다. 더 놀란 것은 눈동자가 샛노란 금안으로 변해있다는 사실이었다. 순간 화가 났나 착각했지만 본능적으로 그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평소에 느껴지던 위압감은 온데간데없고, 툭 치면 쏟아질 것처럼 위태로운 감정만 가득 찰랑였기 때문이다. 똑같이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인 데도 무섭기는커녕 안쓰럽기만 했다. 꼭 혼자 남겨진 뱀 한마리같이.
“왜 울어요...”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다. 울려놓고 왜 우냐니. 황급히 옆에 다가가 앉자 미연의 손에 들린 물건이 보였다. 며칠 전 선물해준 악어 인형이다. 깨 닫자마자 그게 내 가슴팍에 날아와 꽂혔다.
“너 미워...!”
미연은 그 한마디만 뱉어놓고 조용히 숨을 삼키며 울었다. 계속 건조했을 것만 같은 눈에서 눈물이 몇 줄기씩 흘러내린다. 미안하고 불편해서 어쩔 줄 모르다 가 휴지를 가져와 내밀자 필요 없다고 쳐낸다. 안아주려고 했더니 싫다고 마구 어깨를 밀쳤다. 어떡하지. 어떻게 달래지. 괴로워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나는 악어인형의 양 손을 잡고 기도하듯 모았다. 그리고 미연의 눈앞에 가져다 흔들었다. “잘못했어요. 화 풀어주세요. 네?”
한참 훌쩍이던 미연이 말없이 인형을 노려봤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품에 매달리듯 안겨온다. “왜 나 피했어? 너 진짜 나빠. 알아?”
원망하면서 한다는 말이 겨우 이거라니. 정말로 지옥에 떨어져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 떨고 있는 등을 조심스레 토닥여주는데, 안 그래도 마른 몸이 며칠 새 더 수척해졌다. 이런데 나는 고작 얼굴 보기 쑥스럽다는 이유로 도망다녔고... 손에 들린 악어 인형이 왠지 날 노려보는 기분이었다.
“창피해서 그랬어요. 이제 안 그럴게요. 화 풀어요...”
“나랑 키스한 게 창피해?”
“아니 그거 말고, 아니...”
허리에 감겼던 팔이 스르륵 떨어진다. 솔직히 말해도 되나. 일러바쳤다고 전소연한테 까이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전소연의 신발코보다 눈앞 에 있는 미연이 돌아서는 게 더 무서웠다.
“부단장님이 내 얘기 엄청 했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
“그래서 얼굴 마주치기 부끄러워서... 다른 이유는 없어요.” “...정말이야?”
“네. 진짜로. 맹세해요.”
미연이 한참 어깨에 얼굴을 묻고 훌쩍거렸다. 좀 진정되는가 싶더니 품에서 살그머니 빠져나간다. 장밋빛 뺨에 더 진한 홍조가 돈다. 눈은 여전히 금안인데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질 못한다. 설마 수줍어하는 건가.
“...왜 날 못 보는, 아야.”
미연이 오른손으로 팔뚝을 퍽 때렸다. 별로 아프지는 않았는데 마음이 쓰렸다.
“이름 불러도 돼요?”
사과하고 싶은데, 생각해보니 변변한 호칭도 안 정했다. 저기요는 말도 안 되고, 미연선배는 우리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미연도 그리 생각했는 지, 간신히 알아볼 정도로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미연아.”
“......”
“아, 왜 때려요...”
“건방져 너.”
“그래도 이렇게 부르고 싶은데. 미연아.”
마지막은 악어 인형을 흔들면서 말했다. 미연이 마지못해 피식 웃는다. 조금 풀릴 기미가 보이자마자 약간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근데 미연아. 아까 얘보고 악악이라 한 거예요?”
“조용히 해!”
이번엔 꽤나 맵다. 맞은 허리께가 얼얼했다. 아파요. 끌어안으면서 칭얼댔더니 미연의 얼굴이 다시 달아오른다. 인간의 것으로 돌아가려던 눈동자가 보석 같 은 금안으로 남는다. 뺨을 감싸쥐고 살살 쓸어주면서 물었다.
“눈은 언제 변하는지 물어봐도 돼요?” “...감정이 격할 때.”
“무슨 감정이든?”
“응.”
“그럼 지금은... 화난 건가, 쑥스러운 건가?” “몰라, 바보야.”
지금까지의 바보와는 굉장히 다른 어감이다.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좋아서 웃었더니 왜 웃냐며 악어 인형으로 얼굴을 가린다. 어, 악악이네. 장난 좀 쳤는데 미연이 날 쫓아내려 했다. 인형 떨어뜨릴까봐 침대 옆 협탁에 올려놓는 동안에도 계속 날 밀쳤다.
“너 나가.”
“같이 있고 싶은데...”
“지금 시간이 몇 시야. 사람들이 오해해.”
“벌써 몇 명은 그러는 거 같더라고요.”
이번엔 귀까지 빨개진다. 또 얻어맞으려나 싶어서 몸을 움츠렸는데 아무 감각이 없다. 슬쩍 눈을 떴더니 손톱 깨물며 어쩔 줄 몰라하는 미연이 보였다. 갑자 기 열이 훅 끼쳐오른다.
“미연아.”
“...왜 또,”
미연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입술이 맞물리는 순간 작게 들이키는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너무 급했나. 멋쩍음에 슬며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웃지 마.”
무슨 오해를 했는지, 입술 틈새로 달뜬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알았다는 말 대신 미연의 아랫입술을 깨물며 몸을 앞으로 좀 더 밀었다. 풀썩, 미연이 침대 위로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차갑고 매끄러운 왼팔이 조심스레 내 등을 감싸안았다.
9.
아침부터 허리가 아프다는 미연을 남겨두고 조용히 막사에서 빠져나왔다. 이른 시각이라 다들 자고 있을 것이다. 들키지 않길 바라며 원래 내 침대로 발끝을 세우고 걸었다. 새벽녘에 잠들어서 그런지 몸이 뻐근하다. 좀 자다가,
“뭐하다 오냐?” “으악!”
누워있던 우기가 벌떡 일어났다. 놀라서 엉덩방아 찧은 나를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내려다본다. 밤에 이랬으면 그대로 기절했을 것이다. 사실 지금은 밝은 데도 심장이 떨어진 것 같다. 놀랐잖아. 신경질적으로 말했더니 우기가 도로 눕는다.
“너 어제 안 들어왔지?” “...어, 그렇지.” “누구랑 있었어?” “......”
사실 우기는 알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을 때 조미연을 봤으니까. 그래도 쉽사리 말하기 어려웠다. 안 그래도 눈초리가 이상한데 내 입으로 인정해 버리면 소문에 불붙이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딱히 둘러댈 다른 말도 없어서 한참 눈알만 굴렸더니 우기가 코웃음친다.
“선 긋냐?”
“뭔 소리야. 아니야.”
“너 오늘 피곤해서 일 어떻게 하게?”
“......안 피곤해!”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우기가 조용히 킬킬 웃는다. 쟤 심통났나. 발로 엉덩이가 있을 법한 곳을 꽉꽉 누르자 아프다고 성화다. 도로 벌떡 일어나서 내 발을 잡더니 그대로 당겨서 넘어뜨려버린다. 헐. 침대 없었으면 바닥에 머리 찧고 기절할 뻔했다.
“위험하잖아 개야.”
“개 아니거든.”
“공 잘 잡더라.”
“시끄러. ...야, 너 이건 모르지?” “뭘?”
우기가 갑자기 양 옆구리에 손을 척 올리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새 단장 온대. 내가 먼저 알았다.”
나보다 앞서갔다는 사실이 굉장히 뿌듯한 듯, 아주 기뻐보이는 얼굴이다. 하지만 나는 전번의 대화를 떠올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일을 계속할 것이냐 말 것이냐로 다투던 수진과 소연. 결국 전소연이 이겼구나. 예상한 결과지만 마음 한켠이 심히 불안해진다. 어제 울면서 사랑한다 속삭이던 미연의 얼굴과, 아침 에 내 품에 안겨 잠들어있던 가는 몸을 떠올리니 더욱 그랬다. 나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찼다.
“어디 가?”
“얘기 좀 하러.”
“야, 안 돼. 오늘은 방해하지 말랬어. 나 빼고.”
우기가 내 옷을 잡고 늘어진다.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의아해서 눈을 치켜뜨자 또 한 번 자랑스러운 미소를 띤다.
“오늘 새 단장 맞이는 내가 하기로 했거든. 다른 애들은 설명도 잘 못하고 붙임성도 없다고.”
“너 혼자?”
“아니. 전소연이랑 같이.”
“잠깐. 그럼 단원들한테 다 알려준 게 아니라 너한테만 말한 거야?”
“당연하지! 오늘 둘러보고 계약서 쓰면 내일쯤 말한다 그랬어. 내가 특별히 알려준 거니까 어디 가서 떠들면 안 돼.”
오늘따라 정말 기분이 들떠보인다. 귀찮은 일 하나 늘어난 게 그리 좋을까? 난 도통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우기는 마냥 즐거운 듯했다. 나름 중요한 임무를 맡아 서 그런가. 산통을 깰 순 없으니 좋겠다고 영혼없는 박수를 쳐줬는데 우기가 줄줄이 말을 쏟는다.
“오늘 열심히 해서 계약서 꼭 쓰게 만들 거야. 그럼 일 잘한다 소리도 듣겠지?”
“어. 근데 너 되게 좋아보인다. 엄청 신났네.”
“그럼. 전소연한테 신뢰받으면 내 꿈도, 앗.”
우기가 말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 아차 싶은 표정이다. 뭐야. 뭔데. 옆구리를 간질이자 참지 못하고 침대에 발랑 눕는다. “말해도 되나? 아, 간질이지 마. 바보야.”
“바보 아니라고. 빨리 말해!”
“아, 알았어!”
우기가 몸을 바로세웠다. 뺨을 긁으면서 한참 뜸들이더니, 어딘가 수줍은 표정으로 조용히 속삭인다. 난 나중에...
“이 서커스단 최초의 ‘진짜’ 단장이 될 거야.”
그렇게 말하는 우기의 표정은 아주 소중한 보물을 내놓는 어린아이 같았다. ‘진짜’ 단장이라. 언젠가 지금과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우기는 이미 등돌려 누운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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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자고 일어나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일과를 시작했다. 다들 날 싫어하면 좀 갈굴 법도 한데 희한하게 건드리질 않는다. 기지개 켜며 의아해하다가 곧 이유 를 깨달았다. 미연과 그렇고 그렇다는 소문이 쫙 퍼져있을 텐데, 목숨 내놓지 않은 이상 대놓고 면박할 리가. 부단장의 절대적인 비호를 받는 메인 연기자를 누가 건드릴까.
그런데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 사람들 다 보는 데서 욕하며 고함친 이름모를 단원. 걘 어떻게 됐지? 지금에서야 눈치챘는데, 그때 미연이 인상 찌푸리고 있던 건 햇빛이 아니라 걔 때문이었다. 분명 목격한 게 틀림없었다.
“물어보러 갈까...”
갑자기 미연이 보고 싶어졌다. 이걸 핑계로 막사에 가볼까 싶다가도, 지금은 보는 눈이 많다는 걸 상기했다. 저녁 먹고 좀 쉬다가 바로 가야지. 그 전까진 아 무 일이라도 맡아 해야 한다. 신발끈을 묶고 바삐 돌아다니는 단원들 사이로 섞여들었다.
“야, 신참. 이거 저 뒤쪽에 갖다줘.”
아침부터 야영지 구석에서 뭔갈 뚝딱거리고 있던 단원이 날 불렀다. 가보니 일정한 규격으로 자른 합판을 차곡차곡 쌓아서 건네준다. 그 위엔 웬 못 같은 게 가득한 작은 상자와 망치가 얹혀있다. 받아드니 제법 무거워서 다리를 휘청거리는데, 단원이 혀를 찼다.
“밥은 먹고 다니냐? 그거 절대 떨어뜨리면 안 돼. 망가지면 다시 만들어야 되거든.”
“합판이요?”
“그래. 무대 수리하는 데 쓸 거라. 얼른 가져다줘. 저 뒤쪽으로 가면 금방 나와.”
단원의 말은 반만 진실이었다. 가리킨 방향으로 한 30분을 걸은 끝에야 공연 천막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짐이 무거워서 느려진 탓도 있겠지만, 여하튼 꽤 먼 거리였다. 관객들이 공연 끝나고 야영지에 실수로라도 침입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선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심했다. 아침 먹은 게 벌써 다 꺼져버렸다.
“이거 가져왔는데요...”
힘겹게 들어서자 벌써 반쯤 완성된 무대가 보였다. 좀 의아했다. 저번엔 이렇게 급하게 설치하지 않았는데. 단원 두세명은 연장을 든 채 무대 아래쪽에서 돌 아다니고 있고, 그 위엔 서수진이 서있다. 다른 사람들은 날 보자마자 인사도 없이 합판만 쏙 가져갔는데 수진은 반가이 웃으며 내 쪽으로 내려왔다. 정말 눈 물나게 고마웠다.
“혼자 들고왔어?”
“네. 팔 빠지는 줄 알았어요.”
“고생했네.”
수진이 어깨를 통통 두들겨준다. 별로 시원하진 않은데 기분이 좋았다.
“근데 왜 벌써부터 무대 세워요? 며칠 남았는데.”
“오늘 새 단장 오잖아. 소연이가 무조건 계약 체결하자고, 무대랑 연기 몇 개 보여주면 확실히 넘어온다 그랬거든. 그래서 나까지 와서 준비 중.”
“그럼 저도 봐도 돼요?”
“어... 되지 않을까? 소연이한테 물어볼게.”
수진은 이 서커스단의 유일한 성인군자같다. 사실 대단히 엄청난 일을 한 것도 아니지만 다른 성질머리들과 비교돼서 더욱 그랬다. 내가 헤벌쭉 웃으니 따라 미소 지으면서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아주는데 뒤에서 후광이 비쳤다.
“왜 이렇게 잘해주세요?”
“너도 미연이한테 이랬으면 좋겠어서.”
“누, 누가 들으면 어떡해요.”
“괜찮아. 쟤네 그렇게 귀 안 밝아. 그리고 너 조심성 없어서 알 사람들은 다 알아.”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앞으로 몸 좀 사려야겠다. 나는 상관없지만 안 그래도 예민한 미연에게 해가 될 짓을 하고 싶진 않았다. 멋쩍게 고갤 끄덕이며 시선을 피하자 수진이 키들거렸다.
“웃지 마세요...”
“너도 웃게 해줄까?”
“어떻게요?”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대.”
마지막? 이해 못한 내가 어리둥절하게 고개만 기울이자 답답한 듯 어깨를 살짝 때린다. “단장 영입 말이야.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했어.”
“정말요?”
“쉿.”
순간 목소리가 튀어올랐다. 수진이 다급히 입을 틀어막는다. 뒤에서 무대 수리하는 단원들은 모르는 얘기라고.
“우리 얘기 듣고 한참 생각했나봐.”
“그럼...”
“잘 됐지?”
“그렇긴 한데... 그때 분명히 흩어져야 한다고...”
둘의 대화를 엿들었던 날, 전소연은 이렇게 말했다. 다 관두고 뿔뿔이 흩어져야 돼. 아마 보험금 사냥을 중단했을 때의 이야기일 거다. 그럼 곧 서커스단 폐업 한다는 소리 아냐? 갑작스레 불안해진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수진이 어깨를 꾹 쥐었다가 폈다.
“인원 감축하고, 공연내용 보충하고, 티켓값 올리고... 그런 식으로 하겠지.”
“그래도 안 되면요? 그게 통하면 진작 바꾸지 않았을까요?”
“그건 옛날에 우리가 더 초라하고 형편없었을 때 얘기고, 지금은 많이 나아졌으니까. 만약 네 말대로 모든 수단이 실패하면,”
“.......”
“글쎄. 정말 산산이 흩어질지도 모르지.”
말도 안 된다. 이렇게 아무렇게나 만든 게 계획이라고? 아니, 아니다. 애초에 차근차근 설계하질 않은 거다. 생계가 걸린 일인데 왜? 어째서 이리도 허술하게 만들었지. 안 되면 말 바꿔서 다시 인간 죽이자고 하려고? 그럼 어떻게 이게 마지막인데?
나는 심한 혼란에 빠졌다. 지금까지 내가 살펴본 전소연은 막나가는 척하지만 실상은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짓을 하면서도 안 들켰지. 하지만 지 금은 나보다도 무모하다. 도통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빛을 보내자 수진이 아주 바싹 밀착했다. 그리곤 귓가에 속삭인다.
“민니야. 잘 들어.”
“......”
“우리한테 미연이는 아주 특별한 애야.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가장 약한 아이란 말이야.”
“......”
“이건 순전히 미연이를 위한 결정이야. 일이 어그러져도 그 애랑 너만은 무조건 빠져나갈 수 있게, 늦었지만 준비하는 거야. 사실 미연이가 말만 하면 당장이 라도 보내줄 수 있어.”
“......그,”
“그런데 네가 준비가 덜 됐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도망쳐봤자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고, 미연을 충분히 지켜주지도 못한다. 전소연은 그걸 다 알고 있어서 유예기간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들어올 단장도,
“일이 성공하면 돈은 다 너에게 줄 거야.”
“......네?”
“미연이는 계좌를 만들 명의조차 없으니까. 정말 너만 믿고 벌이는 짓이야.” “잠깐만요. 너무,”
“부담스럽다는 말은 하지 마. 우린 정말로 미연이가 행복하길 원하거든.”
수진의 눈빛이 결연했다. 그제야 마지막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이해갔다. 본인들에게가 아닌, 우리에게 있어서 마지막이라는 뜻이다. 만약 보험금 사냥 에 성공하면 전소연은 나와 미연에게 모든 돈을 몰아주고 아주 먼 곳으로 보내버릴 것이고, 실패하더라도 최대한 우릴 숨겨두었다가 준비가 끝나자마자 놓아 줄 것이다. 이곳은 위험하고, 불안하고, 사랑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무대니까.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그럼 남은 사람들은 어쩌려고? 아까의 농담처럼 뿔뿔이 흩어지나? 전소연은? 서수진은? 처음엔 언젠가 연 끊는다고 이를 부 득부득 갈던 사람들이었는데 이런 소릴 들으니 얄궂게도 걱정되었다. 나를 바라보는 수진의 눈이 꼭 마음 한켠을 영영 잃어버린 사람 같아 더욱 그랬다.
설마,
“예슈화한테 가려고요?”
“...아냐.”
“거짓말! 당신이 믿는 구석이 그거말고 더 있어요?”
“아니야. 걔한테 가면 나 못 나와. 차라리 집 없이 떠돌고 말지.”
“말은 쉽죠. 당신은 몰라요. 진짜 집도 없는 처지가 되면 사방에서 물어뜯긴단 말이에요. 보호소에서 그런 애들 한두 번 본 줄 아세요?”
“네가 어떻게 아니?”
“내가 그랬으니까!”
마냥 웃어넘기려던 수진이 내 말을 듣고 굳어버렸다. 정색하며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정말이냐고 묻고 있다. 나는 간절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보통 멀쩡한 인간들은 아무리 고아이고 가난해도 서커스단 같은 덴 오지 않는다. 정말 돈이 많아서 단장으로 들어오는 게 아닌 이상 관람하러 오는 일도 드물 다. 하지만 나는 대다수의 인간들과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열 살에 지갑을 훔치고 열다섯 살에 사람을 때려눕히다 감옥까지 갔다왔으니까. 나에게 정상적인 선택지는 그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핑계는 있다. 남의 지갑에 손댔을 땐 사흘을 굶어 쓰러질 지경이었고, 남을 피떡이 되도록 팬 건 그 사람이 내 친구를 해치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돈을 도둑맞을 뻔한 사람과 내가 구해준 친구 빼고는 아무도 내 편이 없었다. 경찰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검거했고, 그때 상황은 아무것도 참작되지 않은 채 판결이 내려졌다. 그 후로 3년. 나는 보호소에 내 자리가 남았을까 불안에 떨며 3년을 내리 보냈다. 그때 감옥 옆방에 나보다 늦게 들어와 함께 출소한 사람 은 한 부랑자를 고문하다 죽였다는 어느 유력가의 자제였다.
서수진이 그걸 견딜 수 있을까? 뭐든 공장에 갇혀 살던 때보다야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 그보다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정 말 죽을 수도 있다고. 보호소에서 내가 본 건 어제 함께 놀던 친구가 오늘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입 줄었다고 기뻐하던 원장의 낯짝이다. 그런 처지를 자각하면 서수진은 무조건 예슈화에게 가고 만다. 그러지 않고선 견딜 수 없으니까.
“제발 그냥 하던 대로 살아요. 나 때문에 다 없애지 말고,”
“미연이 때문이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내 말뜻 몰라요?”
서수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절박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깨를 붙든 손을 잡고 내리면서 속삭인다. “너네만은 이러지 말라고 하는 짓이잖아.”
“......”
“울지 마. 어차피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순 없어. 한 명이라도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야지.” 그러니까 남 걱정은 접고 이기적으로 굴어.
서수진은 끝까지 친절하기만 했다. 왜 이렇게까지 자기 자신은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지 모른다. 미연은 이들한테 대체 어떤 존재이길래. 그리고 그런 존재가 사랑하는 나는? 온 우주가 내 어깨만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내가 그럴 자격이나 있나. 나는 수진의 품에 안겨 고요히 흐느끼면서 짧은 인생의 가장 큰 후회를 되씹었다.
이 따위 서커스단 눈길도 주지 말았어야 했다고, 발도 들이지 말 걸 그랬다고.
-
겨우 마음을 진정하자마자 전소연이 들이닥쳤다. 옆엔 우기와 미연, 그리고 처음 보는 중년 여자를 대동한 채였다. 아마 새로운 단장이자 희생양이겠지. 그 사람은 점잖은 정장이 어색한 듯 뻣뻣하게 걸어와 수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수고가 많아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할까. 심술궂은 트집을 잡으며 훑어본 단장의 정장 주머니엔 명함 같은 작고 하얀 종이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불퉁하게 무대 뒤편에 앉아있는데 미연이 빛과 어둠의 경계선을 지나 내 쪽으로 들어왔다. 시커먼 그림자에 덮여도 얼굴만은 선명하다. 내가 미처 인사하기 도 전에 뺨을 붙들고 입맞춘다. 너 꿈에 나왔어. 자랑하듯 건네는 어조가 너무나 행복하게 들려서 더 맘이 상했다. 서수진은 왜 나한테 그런 소릴 해가지고. 반쯤은 행복을 보장받은 거나 마찬가지인데 이상하게 기쁘지 않다. 왜일까.
“어디 아파?”
미연이 내 이마를 짚어본다. 아마 웃지도 않고 바닥만 쳐다보니까 그런 거겠지. 괜히 걱정시키겠다 싶어서 아니라고 세차게 내저었다. 하지만 미연은 이미 불 안한 얼굴이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오늘 뭐 한다면서요?”
“아, 맞아. 같이 볼래? 소연이한테 얘기해놨어.”
“그래도 돼요?”
“응. 대신 수진이 나올 땐 눈 감아. 엄청 예쁘니까.”
미연이 밉잖게 웃으며 농을 붙인다. 농담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전소연의 부름에 미연이 무대 쪽으로 사라졌다. 나도 무거운 걸음을 옮겨 객석 아무데나 주저앉았다. 단장은 맨 앞 가운데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고, 나는 눈에 띄지 않으려 어중간한 위치를 골랐다. 그럼에도 미연은 티나게 내 쪽만 보고 있었다. 단장이 뒤돌아보겠네. 난 애써 웃으며 다른 곳을 보라고 손짓했다. 그랬더니 괜히 옆눈으로 흘겨본다.
“시작하겠습니다.”
우기가 무대의 시작을 알렸다. 직접 공연하진 않는데도 이런 중요한 일에 끼어있다는 사실에 어깨에 잔뜩 힘준 채였다. 좋겠다. 나도 저리 속 편하게 살 수 있 다면.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걸 알았고 많은 일을 겪었다. 마른세수하며 무댈 올려다보자 첫번째 공연자가 등장했다.
그 사람은 미연도 수진도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둘로는 너무 적어 구색 맞추려고 한 명을 더 끼운 모양이다. 고양이 수인이라는데 뼈가 있나 싶을 정도로 좁 은 틈도 무난히 통과하는 모습에 단장이 조금 놀란 듯 보였다. 전소연은 틈을 놓치지 않고 미연을 불렀다.
어, 미연이?
난 당연히 미연이 마지막으로 나올 줄 알았다. 실제 서커스 때도 맨 뒤 순서니까. 그런데 이번엔 두번째였다. 이유가 뭐지. 미연은 복잡하게 설치된 방해물을 오가며 나 없이도 잘 공연해냈지만, 조금 기분 상했다. 팔불출마냥 미연이가 대미를 장식하지 못하다니,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 없이도 무대에서 빛 나서 더 그랬고.
혼자 입을 삐죽 내밀고 있는데, 모든 불이 꺼지고 무대 중앙을 비추는 조명 단 하나만 빛을 발했다. 사방이 어두워진 틈을 타 누군가 내 옆자리로 와 착석한 다. 인기척에 놀라 돌아보자 어느새 옷까지 갈아입은 미연이 순식간에 키스했다. 얼떨떨해서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자 귓가에 나른하게 속삭인다.
“수진이 못 보게 계속 뽀뽀할까?”
“아, 안 돼요.”
얼른 무대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옆에서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밝았다면 달아오른 내 귀가 선명히 보였을 것이다.
곧 무대에 나비 한 마리가 나풀나풀 날아들었다. 크기가 좀 작았지만, 지나가는 자리마다 반짝이는 가루가 비행하는 모습은 어렴풋이 보였다. 예쁘다. 그렇게 중얼거리자 미연이 내 허벅지를 꽉 쥐었다.
“아파...”
시선을 돌리려는 순간, 무대 중앙까지 날아온 나비가 찰나에 인간으로 변했다. 놀라운 것은 정확한 타이밍에 무대 위에서 흰 천이 낙하해 온 몸을 감쌌다는 점이다. 수진은 이제 마치 눈부신 비단 드레스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믿을 수가 없어 눈을 깜빡이자 미연이 속삭였다.
“이번에 새로 시도하는 거야. 소연이가 개발하느라 애 좀 먹었대.”
이걸 혼자 개발했다니, 전소연은 이런 데 처박혀있을 인물이 아니다. 샛노란 금발의 뒤통수가 경이롭게까지 보이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수진이 뒤를 돌았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여섯 장의 날개.
보통 나비가 두 쌍, 그러니까 네 장의 날개를 갖고 있는 것과 다르게, 수진에겐 두 장이 더 있었다. 원래의 날개를 받치듯 자라난 그것은 은은한 푸른 은하수 같은 두 쌍의 색과 다르게 새카만 밤하늘처럼 까맸다. 반투명한 기존 날개가 훨씬 긴 까만 날개와 겹치니 정말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수진이 그것을 펄럭이자 객석까지 꽃향기가 날아온다. 원래 나비에서 이런 냄새가 나나. 내가 알기론 아니다. 게다가, 수진도...
“미연아.”
“왜, 민니야.”
“저 날개 진짜 맞아요?”
“응.”
수진도 인간 상태에서 또다른 모습을 지닐 수 있다. 그것도 자의로.
문득 미연의 왼팔에 시선이 갔다. 미연은 이걸 스스로 제어하지 못한다. 숨기고 다니는 걸 보면 안다. 반면에 서수진은 원할 때 감췄다가 마음대로 발현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휘황한 광채를 뽐내며 살랑이는 날갯짓을 바라보다 정신차리니 어느새 무대가 텅 비어있었다.
“정말 대단하네요.”
어느새 나비가 단장의 손끝에 가 앉은 채다. 단장은 제 손가락 위에서 세 쌍의 날개를 팔랑이는 나비를 내려다보며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이 떨어 지자마자 나비가 재빠르게 무대 뒤편으로 날아간다. 서수진답다.
“좋아요. 계약하죠.”
단장이 조명이 다 켜지기도 전 박수갈채를 날리며 제안했다. 성급하게 나오는 걸 보면 상당히 맘에 든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차라리 거절했 으면 했는데.
“왜 그래?”
미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아니에요. 대충 둘러댔지만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다.
“솔직히 말해.”
나는 미연의 오른손에 양 뺨을 붙잡힌 채 끙끙거렸다. 처음엔 정말 의심스럽다는 태도로 추궁하더니 나중 가선 내 꼴이 우스웠는지 실소하며 얼굴을 살짝 흔 든다. 지금 불 다 켜졌는데. 걱정스런 마음에 앞쪽을 흘긋거리자 아니나 다를까, 우기와 눈이 마주쳤다.
“......”
우기는 영 못 볼 꼴 본 얼굴로 날 째려보다 단장이 다가오자 얼른 품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단장은 전소연이 건네는 펜도 마다하고 품에서 자기 것을 꺼내더 니 무대 바닥에 대고 서명했다. 진짜 급하네. 서수진이 어지간히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단장님.”
“잘해보겠습니다.”
전소연과 단장이 악수를 나눴다. 나는 미연이 겨우 놓아준 뺨을 매만지며 석연찮은 기분을 떨치려 애썼다.
10.
새로 영입한 단장은 이전의 것들과 다르게 아주 친절하고, 또 세심했다. 매일 곳곳을 돌아다니며 일은 잘 되어가냐고 묻기도 하고 무대구성은 어쩔 거냐, 동 선이 어떻게 되냐 누가 출연하냐 등등 수많은 참견을 해댔다. 그때마다 단원들은 따뜻한 관심이 좋으면서도 굉장히 어색하다는 듯한 태도로 뻣뻣이 설명하곤 했다. 우기를 제외하고.
“단장님. 이번에 저 새로운 묘기 해요.”
“단장님, 우리 서커스단 밥 어때요? 맛있죠?”
“단장님 단장님!”
우기는 단장이 보이기만 하면 신이 나서 연신 떠들어댔다. 다른 단원들마냥 어색해하지도 않고 잘도 가서 꼬릴 흔든다. 그럼 단장은 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허허거렸다. 우기가 원래 붙임성이 좋다지만, 밥먹듯이 야영지를 쏘다니는 단장과 친화력 넘치는 강아지의 조합은 상상을 초월했다.
근데 쟤는 어차피 죽을 사람한테 왜 저리 달라붙지?
보다보니 의문이 드는 것이다. 저 단장, 생명보험 든 지 몇 년 지나서 오늘 당장 죽어도 돈이 나온다고 했다. 적당히 때를 봐서 처리하려고 놔두는 것 뿐인데 우기는 마치 새로운 친구라도 생긴 거처럼 굴었다. 경계심 풀려고 그러나. 하지만 경계하건 말건 미연이 맘만 먹으면 손톱으로 뼈도 뚫을 텐데 불필요한 일이 다 싶었다.
“민니씨라고 했나?”
한참 순회 돌던 단장은 마침내 구석탱이 그늘 밑에서 쉬고 있던 나한테까지 도달했다. 일부러 피해있었던 건데 눈치도 없다. 심지어 언제 들었는지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일개 단원에게 관심이 지극하시네. 마지못해 흙을 털며 일어나자 씨익 웃으면서 손을 내민다. 웬 악수. 일단 잡긴 했는데 손이 상당히 거칠었다.
“굳은살이 좀 많죠?”
“...그러네요. 힘든 일 많이 하셨나봐요.”
“하하! 그냥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고생 좀 했죠.”
별로 유쾌한 이야기도 아닌데 과장되게 웃으니 더 재미없다. 네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예 그늘 안으로 들어온다. 좀 가... 다른 단원들 앞에선 안 그러더니 여기 오니까 주머니에 손까지 꽂고 삐딱하게 선 꼴이 영 맘에 안 들었다. 하지만 내 표정이 썩거나 말거나 단장은 제 할 말만 했다.
“민니씨는 여기 들어온 지 얼마나 됐어요?” “그냥 뭐... 한 달 좀 덜 됐나.”
“와, 친화력 좋으신가보네.”
“그건 우기죠. 제가 왜요?”
“민니씨 부단장하고도 친하다면서요. 인품이 좋은가봐. 나도 가깝게 지내야겠어.”
하면서, 단장이 어깨를 툭툭 쳤다. 먼지를 터는 듯한 손길에 은근히 불쾌해졌다. 굳은살 박힌 손끝에서 묘한 중압감마저 느껴졌다. 게다가 하는 말마다 영 못 미더웠다. 전소연이 자기가 죽일 사람한테 굳이 내 얘길 시시콜콜 일러바쳤다고? 어디서 주워들은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경로는 아마...
“단장님. 더운데 들어가 계세요.”
우기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단장이 인심 좋은 척 웃으며, 그럴까? 하는 순간 눈이 마주친다. 나도 모르게 경계하는 시선을 보냈던 것 같다. 우기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갯짓으로 인사하고 단장과 함께 멀어져갔다. 나는 나무 그늘 밑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꺼림칙한 느낌을 애써 묻었다.
-
“공연 끝나고 처리한다고요?”
전소연이 입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쉿. 하지만 다들 자러 간 데다 단장은 볼일이 있다며 도심으로 떠났기 때문에 딱히 들을 사람도 없었다. 이 작은 천막엔 나 와 전소연, 그리고 서수진뿐이다. 상의할 게 있다면서 불러놓고 거의 통보식으로 말만 전한다.
“질질 끌어서 좋을 게 뭐있다고 그래요.”
“어제 소개했는데 오늘 죽으면 모르는 애들은 의심하지 않겠어?”
“그냥 서커스단이 구려서 관뒀다고 해요.”
“...너 배고프냐?”
전소연은 내 말투가 영 차갑다며 펜을 휙 던졌다. 얼굴에 찍힐 뻔했다. 투덜거리며 받고 보니 처음 보는 펜이다. “새 거네요?”
“잉크 다 떨어졌다 했더니 단장이 줬어. 자기는 많대.”
“됐고, 저는 그 사람 맘에 안 들어요. 그냥 잘라버리면 안 돼요?”
“왜 그래, 미연이랑 둘이 잘 먹고 잘 살아야지. 그렇게 심지가 약해서 되겠어?”
전소연은 아까부터 장난스럽게 웃기만 한다. 그건 정말로 이 상황이 우스워서 그런 게 아니라, 불안감과 걱정을 덮어버리려는 속임수가 분명했다. 자기 자신 에게 치는 일종의 사기다. 오로지 미연이 행복을 맛봤으면 한다는 이유로 모든 리스크를 끌어안고 있는 꼴이 하나도 멋있지 않았다. 도리어 짜증나기만 했다. 내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는 걸 본 소연은 딴청피우며 말을 돌렸다.
“공연 마지막 날 사고로 죽일 거야. 단장에게는 마지막이니까, 특별히, 뭐 이런 핑계 대면서 무대 올라오라고 하고.” “어떻게 죽이는데요.”
“미연이 독으로.”
미연은 본인이 그 사람을 물면 이 서커스단을 영영 떠나게 될 줄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할 것이다. 속이기만 했지 속은 적은 없는 그녀가 전소연의 계획을 알 고 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두려웠다. 평생 못 만나게 된다는 사실에 화를 낼까, 슬퍼할까, 아니면 배신감을 느낄까. 나에게만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젠 미연의 금안이 다른 의미로 두려워졌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나는 전소연에게 따지듯 물었다.
“방금 단장 무대에 올린다고 했어요?”
“아니. 내가 미쳤냐? 관객들 다 너처럼 여기 묶어놓게?”
소연이 키득거렸다. 그럼 아까 한 말은 뭐야. 얼빠져서 쳐다보고만 있자 수진이 어느새 다가와 등을 탁 때린다. “말만 그렇게 하고 실제론 연습할 때 처리해야지. 너 미연이한테 물려본 적 있어?”
...그 말에 첫키스의 기억이 떠올라버렸다. 실제로 그떄 물리긴커녕 이가 목덜미에 닿지도 않았는데. 새빨개진 내 얼굴을 가만 보던 수진이 허? 코웃음치면서 눈썹을 까닥거렸다.
“물려보기만 한 게 아닌 모양인데. 진도가 너무 빠르네.” “아, 아니거든요.”
“나한테 거짓말 소용없는 거 알지.”
“......”
“귀엽긴. 어쨌든 미연이한테 물리면 십 분 내로 골로 가거든. 아마 들키지만 않으면 성공할 거야.”
십분이라니. 목숨 끊어놓는 데 고작 십 분 걸리는 사람이 내 앞에선 그렇게 웃고 안기고 키스하고... 좋으면서도 섬찟하다. 수진은 또 귀신처럼 알아채고 미연 이 무서워하지 마, 하면서 등을 두들긴다. 지금은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당신이 더 무서운데요. 차마 말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전소연이 비웃음을 던진다.
“아주 사이가 좋네. 미연이가 보면 뒤집어지겠는데.”
“뒤집어지긴 뭐가...”
“야. 그거 알아? 조미연 연애상담 서수진한텐 거의 안 했다? 질투난 건지 뭔지.”
정말요? 놀라서 서수진을 돌아보자 드물게 장난스러운 얼굴로 고갤 끄덕인다. 평범한 친구 사이였으면 진작에 악화됐을 관곈데, 두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 고 서로에 대한 애정은 굳건해보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버텨야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새삼 경이로워서 빤히 쳐다보자 수진이 민망한 듯 어깨를 밀쳤 다.
“난 갈게. 전소연 너도 빨리 자.”
“잔소리는... 아직 할 일 남았어.”
“뭐?”
“단장 짐 좀 뒤져보려고. 프로필이 사실인가 확인해야지.” “그거 제가 할게요!”
나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소연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니가? 그렇게 말하는 눈빛이다. 나는 세차게 고갤 끄덕였다. “...말리지는 않겠지만, 다른 애들이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테니까 조심해.”
전소연은 그러면서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단장의 대략적인 신상과 특징이 적혀있는 서류였다.
-
나는 가짜 단장을 위해 마련된 천막에 몰래 잠입했다. 사치스러울 거라는 예상과 달리 내부엔 별 게 없었다. 입고 있는 정장은 꽤 비싸 보였는데, 짐은 검소하 다. 서류가방 하나와 자질구레한 물건이 담긴 천가방 하나가 다였다. 잘못 고른 거 아냐? 이것저것 들춰봐도 눈에 띄는 게 없다. 단장으로 들어올 정도면 분명 부유할 텐데.
서류에 기재된 단장의 전 직업은 미등록 동물원 운영자라고 되어있었다. 한마디로 허가 안 난 불법 사업이라는 거다. 거기에 진짜 동물이 있을지 수인이 있을 지는 모르는 일이다. 왠지 침구에서 짐승 냄새가 나는 것도 같고. 이불자락을 쥐고 킁킁대다가 뭐하는 짓인가 싶어 의자에 걸터앉았다.
“...무슨 여행객도 아니고 있는 게 없냐.”
암만 도시와 이곳을 오간다 한들 대부분의 시간은 여기서 보낼 텐데, 천막은 희한할 정도로 휑했다. 마치 몇 박 묵고 떠날 숙소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여 기 처음 왔을 때 면접 본 단장은 사무실임에도 불구하고 개인물건이 한가득 있었는데. 왠지 뒷목이 뻐근했다. 어딘가 찜찜하다. 개운치 않다...
나는 무심코 책상 서랍을 열었다. 노트 한 권과 볼펜 몇 자루, 용도를 알 수 없는 작은 금속판이 보였다. 노트를 펼치자 도통 알아먹을 수 없는 문장들이 펼쳐 졌다.
펌알큼 배샬 츠우 래. 킴퀌 처슨 옄. 추킴 바추. 테캊 커셪티 캄ᄃ큿 븣.
밤, 토이켬큿 토칭다사.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은 세 걸음을 간 것과 같다. 둘 중 하나에만 적용된다.
“...이게 뭔 소리야?”
혹시 어디가 이상한 사람인가? 외계어 같은 문장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게다가 밑에 적힌 말은 외계어는 아니어도 똑같이 정신 나간 소리다. 당장 쫓아내자 고 보고해야지. 나는 재빨리 노트를 덮고 제자리에 밀어넣었다.
서랍에 들어있던 펜들은 아까 전소연이 던진 것과 같은 종류였다. 아깐 처음 보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만 생각하니 단장이 서류에 서명할 때 쓴 것과 비슷하 게 생겼다. 어쩌면 완전히 똑같다. 뒷머리를 딸깍딸깍 눌러봤지만 아무 이상없이 잘 나온다. 노트에 써보려다가 흔적이 남겠다 싶어 그만두었다.
마지막으로 살펴본 건 금속 판이었다. 명함 크기의 반만한 그것은 어두운 조명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리저리 돌리며 살펴봐도 뭐에 쓰는 용도인지 모르겠어서 집어넣기 직전, 무심코 뒤집는 순간 뭔가 눈에 띄었다.
“...숫잔가?”
대충 보면 모를 정도로 작은 숫자와 글자들이 돌기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손끝으로 만지자 오돌토돌한 감각이 전해졌다. 숫자는... 너무 많아서 모르겠다. 중 간중간 하이픈도 들어가 있었다. 아마 무언갈 식별할 때 쓰는 것 같았다.
“웬 이름이...”
숫자 밑에는 친절하게도 한글이 적혀있었는데,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단장의 명함 취향이 독특한가 했더니 이름 다른 거 보면 그것도 아닌 듯했다. 대체 어 디다 쓰는 물건이지. 전소연이 이 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알려줄 수 있었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가져다주려고 일어선 순간, 어깨를 무언가가 짓눌렀다.
“여기서 뭐하는 거죠?”
단장이었다. 도시로 간다더니 어느새? 나는 너무 놀라 비명조차 못 지르고 퍼드득 떨었다. 단장이 묘한 눈빛으로 날 살피더니 손에 들린 물건을 빼앗아갔다. 변명할 틈도 없이 서랍을 정리하고는 꽉 밀어 닫는다. 그동안 난 바보처럼 도망치지도 않고 옆에 서있었다.
“염탐은 끝났나요?”
“...여, 염탐이 아니라.”
“어떤 곳일지 예상은 했지만... 좀 비범하네요.”
단장은 정확히 입꼬리만 웃고 있었다. 눈도 목소리도 냉랭하게 굳어 날 쏘아붙인다. 단순히 맘에 들지 않는 정도였던 낯짝이 지금은 무서울 정도였다. 뭐라고 변명하지. 한참 눈을 굴리는데 어깨가 또 짓눌렸다.
“나가봐요. 비밀로 해줄 테니.”
마음씨가 이리도 넓은 사람인가? 왜 당장 전소연에게 일러바치질 않고. 하지만 베푸는 아량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찍소리도 못한 채 꾸벅 인사하고 도망쳤다. 등 뒤에 끈질긴 시선이 들러붙는 것 같았다.
-
결국 그날 일을 함구한 채 공연 날짜가 다가왔다. 전소연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말해봐야 걔가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없다. 그저 단장 눈치나 좀 더 보면서 불편한 시간을 보낼 뿐이지. 게다가 그 이상한 노트 내용도 외우질 못해서 수상하다고 전해주지도 못했다. 단장이 없을 때 몰래 다시 침입했지만 서랍은 깨끗이 비워진 후였다. 어쩐지 아주 중요한 내용을 놓쳤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긴장했어?”
분장을 마친 미연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내가 시름시름 앓으며 앉아있자 표정이 덩달아 어두워진다. 북돋아줘도 모자랄 판에 자꾸 걱정시키고 폐끼친다 생 각하니 마음이 안 좋아졌다. 애써 웃어보이는 순간 미연이 뒷목을 감싸며 날 품에 안았다.
“...사람들 보는데.”
“네가 우선이야.”
이 서커스단 통틀어 제일 쌀쌀맞던 사람이 이렇게 굴 때마다, 심장이 이대로 녹아내리는 거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주위에서 보거나 말거나 끌어안은 손에 힘주고 머릴 쓰다듬는다. 예전에 거하게 앓았을 때도 미연이 품에 안아줬다는 이유로 하룻밤만에 회복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꼭 그때같다. 뺨에 닿는 촉감이 좋아서 조금 부비적댔더니 오른손이 등을 찰싹 때린다.
“응큼하네.”
“먼저 안아줘놓고 왜 그래요. 이리 와요.”
“사람들 보는데?”
“아, 말 따라하지 마요.”
칭얼거렸더니 미연이 푸스스 웃는다. 조금 가까이에 서있던 단원이 못 볼 거 본 마냥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자릴 피했다. 나는 미연을 데리고 더 으슥한 곳에 가 서 한참이나 위로받았다. 잘 될 거야. 오늘부터 며칠만 버티면 모든 일이 끝날 테고 결론도 날 것이다. 아마도, 좋은 방향으로.
그럼 미연이를 데리고 아주 먼 곳으로 떠나야지.
무대의 막이 오르기 전 천천히 입맞춤하면서 머릿속을 공상으로 가득 채웠다. 어디로 떠날지, 뭘 타고 갈지, 남겨진 사람들에게 인사는 어떻게 할지 연락은 어떤 식으로 취할지. 그리고 뭘 하면서 살아갈까. 아직 한참 먼 얘기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머리를 채워야 다른 생각을 막을 수 있었다. 미연은 내 속도 모르고 셔츠 깃을 세게 틀어쥐며 숨차했다. 입술을 떼고 바라본 얼굴에 홍조가 선연했다.
“...이대로 도망가고 싶다.”
미연이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며 웃었다. 나도 따라 미소지었다.
공연 순서는 금세 지나가서 어느덧 우리 차례가 왔다. 사방팔방에 반짝이는 가루를 흩날리고 온 수진이 잘 하라며 등을 툭 밀었다. 야, 하지 마라. 미연이 발 끈하면서 주먹을 들어보였는데 수진은 그저 재밌다는 듯 웃어넘겼다. 어쩌면 귀여워하는 것도 같았다. 미연과 가깝지 않았을 때 봤다면 기절초풍할 광경이었 다. 그 조미연을 귀여워하다니? 하면서 징그러워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이해되고도 남지만.
내게 어울리게 디자인된 마스크를 쓰고 단상에 올라가자 객석 한가운데 앉아있는 단장의 얼굴이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씨익 웃는다. 왠지 속이 울렁거렸 다. 그날 이후 단장은 내게 별다른 질책도 하지 않고 그저 마주할 때마다 미소만 지었다. 그게 더 수상했다. 나도 모르게 배를 움켜쥐었더니 무대 아래서 대기 하던 미연이 입모양으로 아프냐고 묻는다.
“여러분. 뱀에 물려보신 적 있으십니까?”
사회자가 미리 준비한 멘트를 읊었다. 대다수가 고갤 젓는다. 시작이 좋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뱀으로 변해 등장한 미연을 보면 각본이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무서워서 얼어붙어버린다. 그때 무대를 흰 천으로 가리고, 순식간에 사람으로 변해 목덜미를 물어버리면 여기저기서 떠나가라 비명이 터진다. 좀 더 공포심 을 주고 싶을 땐 인간으로 변하지 않고 뱀인 채 내 목을 조르다가 덮치면 금상첨화다. 아주 옛날엔 그걸 보고 실려나간 사람도 있다고 했다.
“뱀을 만나보신 적은 있으신가요?”
이번에도 다수가 고갤 젓는 동안, 미연은 무대 아래에서 독니에 마개를 끼우고 있었다. 저번에 내게 상처 분장해준 그 단원이 미연의 이에 조심스럽게 투명한 플라스틱을 씌운다. 어쩐지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표정이 좋지 않다. 아까까지는 날 보며 산뜻하게 웃고 있었는데.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싶었지만 마개를 다 씌우자마자 원래대로 돌아간다.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마개를 씌울 때의 감각이 안 좋은 기억을 불러일으킨다는 것.
그래서 왼팔에도 장갑은 절대 안 끼는 건가...
잠시 공상에 빠진 찰나 사회자가 멘트를 모두 끝냈다. 이제 미연이 등장할 시간이다. 원랜 수인이 등장하기로 했는데 진짜 야생뱀이 출몰한 척, 예상하지 못 한 척 놀라며 공포에 물들 때가 왔다. 미연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부끄러운 듯 다른 델 보라는 손짓에 서둘러 고갤 돌렸다. 미연도 그렇고 모든 수인은 자기가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한다.
“...어?”
내 시선은 자연스레 객석 뒤의 출입구로 향했는데, 우기가 천막을 빙 돌아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금쯤 무대 뒤편에서 전소연에게 어디가 좋았고 어디가 어색했네 하는 잔소리 듣고 있을 시간인데. 우기는 약간 굳었으면서도, 어딘가 상기된 낯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문득 저걸 막아야 한다는 예감이 들었다.
“잠깐...”
무심결에 뱉은 말은 마스크에 막혀 나가지 못했다. 안 돼. 느낌이 좋지 않다. 내가 허공에 손을 뻗는 순간 우기도 출입구의 천에 손을 댄다. 단장이 내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본다.
안과 밖을 가로막고 있던 커튼이 한쪽으로 열리며 뒤에 있던 것을 드러낸다. 익숙한 멀건 낯이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본다. 예슈화. 쟤가 왜 여기 있지. 이 상함을 감지한 관객들이 하나둘 웅성거리며 몸을 돌린다. 예슈화는 숨지 않는다. 분명 떳떳하지 않을 텐데. 오히려 당당하게 목을 쳐들고 무대를 가리킨다.
나를, 가리킨다.
그와 동시에 천막 입구가 완전히 찢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부로 밀려들어온다. 개중엔 사복을 입은 사람도 있고, 경찰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저새끼들 을 잡으라며 닥치는 대로 관객을 헤치고 달려온다. 두 다리가 땅에 뿌리박은 듯 굳었다. 열다섯 살의 기억이 쇠사슬처럼 몸을 휘감아 묶어버렸다.
“김민니! 뛰어!”
전소연의 목소리가 아득히 들려온다. 나는 미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소용없다는 걸 머리가 알아버렸다. 영문 모른 채 미친듯이 달려 도망치는 단원들 틈 으로, 여유롭게 걸어오는 예슈화가 보인다.
“미안해요, 민니씨.”
하얀 손이 내 손목에 수갑을 채운다. 이제 보니 이 손에도 굳은살이 박혀 있다. 그래... 꼭 단장처럼.
“악감정은 없어요.”
예슈화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을 지껄이며 날 결박했다. 시선을 던진 무대 아래쪽엔 조미연도, 뱀도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침묵하며 눈을 감았다.
11.
예슈화가 날 체포한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단원이 그들에게 포박당했다. 관객은 이미 모두 도망친 지 오래고, 초토화된 천막 내부에 무릎꿇린 대다수의 사람 들은 전후사정도 모른 채 공포에 떨고 있었다. 표정만 봐도 누가 이 서커스단의 내막을 아는지 모르는지 티가 난다. 나는 잡힌 이들을 둘러보며 익숙한 얼굴 을 찾으려 애썼다. 전소연도 서수진도 조미연도 없다. 제발 멀리 도망쳤으면 좋겠다는 안도감과 나만 홀로 남아있다는 씁쓸함이 동시에 감돌았다.
“팀장님, 안 죽었네요.”
예슈화는 불과 십 분 전까지 우리의 단장이던 사람에게 다가가 농을 건넸다. 그러면서 부르는 이름이, 아. 그 금속 판에 새겨져 있던 것과 똑같다. 왜 진작 눈 치채지 못했을까. 그 물건의 용도는,
“죽길 바랐지? 승진에 미쳐가지고.”
“무슨 소리세요. 팀장님 실종되면 시체라도 꼭 찾으려고 선물까지 드렸는데.”
슈화가 팀장의 손에서 금속 판을 빼낸다. 언젠가 저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시신이 오래 방치되어 신원 확인이 어려울 경우를 대비해 지니고 있는다는 물건. 그러니까 특수조사팀 팀장은 죽음을 불사하고 이곳에 잠입한 것이다. 계획이 어그러지면 유골이라도 찾아달라고. 무슨 놈의 보험사 직원이 저렇게까지 열정적인가.
“저는 이제 뭐하면 되나요?”
절망감에 고갤 푹 숙이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우기가 팀장과 예슈화 쪽으로 잰걸음쳐온다. 이제 뭐하면 되냐니. 마치 전소연이 시킨 잡 무를 다 마치고 그 다음 할 일을 찾는 것마냥 너무나 태평한 말이다. 서커스단을 다 뒤집어놓고, 정작 본인은 저렇게 초연한 얼굴로 남의 상사 명령을 기다리 고 있다. 끓어오르는 배신감에 노려보자 조금 주춤거리는가 싶더니 눈에 띄게 나를 등진다. 저 유치한 짓거리는 대체 뭐야?
“수고했어요.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이제 우리랑 가서 진술 몇가지만 해주면 됩니다.” “네. 저, 그런데요.”
“응?”
“사람이 되게 많네요? 원래는 전소연만... 잡아가신다고...”
우기가 슬금슬금 날 흘깃대며 덧붙인다. 따지는 주제에 자신감도 없어서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쟤 지금 뭐하는 거야. 제대로 된 대답도 없이 시선교환만 하 는 팀장과 예슈화의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어딘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 상황파악 덜 된 나조차 감지한 걸 우기가 못 알아챌 리 없는데, 박력있게 몰아 붙이긴커녕 가만히 침묵하고 있다. 이럴 때 물어야 될 거 아냐. 왜 하필 지금 말 잘 듣는 개가 됐는데. 속에서 천불이 인다. 가서 물어뜯으라고 외치고 싶다.
“원래 조사하려면 관련자는 다 모아놔야 해서 그래요. 그게 관습이에요.”
“끝나면 이 사람들 다 풀어주는 거 맞죠?”
“뭐 결과에 따라...”
닥치는 대로 묶어서 바닥에 꿇려놓고 이게 ‘모아놓은’ 거라고? 말이 어불성설이다. 그냥 변명이란 게 빤히 보이는데 우기는 더 캐내지도 못하고 물러났다. 멍 청아. 나보고 바보라더니 이 꼴이 다 뭐야. 손이 자유롭기만 했어도 당장 멱살부터 잡았다. 속 터져서 노려보고 있을 때 우기가 문득 이쪽으로 돌았다.
“......”
마주친 시선에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얗게 번졌다. 우기는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모든 걸 쑥대밭으로 만들자고 결심했을 땐 그만한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었어? 뒷감당이든 뭐든 할 자신이 있으니까,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어서 그런 거 아니었냐고. 그런데 왜 팀장의 무책임한 대답 하나에 표정이 저렇게 무너지냔 말이야. 책망하고 다그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우기는 무릎꿇은 내 앞에 두 다리로 서서 내려다보면서도 꼭 밑에 있는 것 같은
사람의 눈빛을 했다. 분명 날 내려다보고 있는데 표정에 여유라곤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후회해?”
나도 모르게 질문이 떨어졌다. 아주 작은 소리로 말해서 바닥의 흙알갱이들조차 못 들었을 법한 그 말을, 우기는 용케 알아챘다. 힘없이 늘어진 고개가 번쩍 치켜세워지더니 울망한 눈을 부릅뜬다. 크고 까만 눈동자에 내 얼굴이 흔들리며 비춰졌다.
“아니.”
“......”
“안 해.”
나는 그것이 명백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더 추궁하지 못했다. 천막 밖에서 여러 대의 차에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렸고, 곧 경찰이 하나 둘 단원들을 끌 고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맨 마지막까지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예슈화의 손에 이끌려 승합차에 몸을 실었다.
-
몇 시간을 달린 끝에 도착한 경찰서에서 나는 어두컴컴한 독방에 밀어넣어졌다. 다른 단원들과는 뿔뿔이 흩어져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예슈화도 어느 순간 사라져 그야말로 완전한 격리였다. 앞을 지키며 서성이던 경찰관은 진작 부름을 받고 사라졌다. 나는 어둠 속에 홀로 남았다.
서늘하고 딱딱한 암흑 속에서 조미연의 품을 떠올렸다. 눈 감고 그 안에 몸을 맡기면 꼭 이렇게 어두웠다. 다른 점이 있다면, 미연에게선 묘한 향기가 났고, 머리 위로 쏟아지는 숨소리가 좋았고, 뺨에 닿는 감촉이 안정감을 줬다는 것이다.
날 감싸안는 마른 몸과 체온이 없으니 금세 불안해졌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방황하지만 식별되는 게 없었다. 꺼내줘. 돌아오는 대답은 정적뿐. 나는 쇠 창살을 붙들고 앞뒤로 마구 흔들었다. 꺼내달라고. 어둠 속에서 내 목소리만이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전소연은, 서수진은. 그리고 조미연은. 다들 지금 어디 있을까. 송우기는? 익숙한 낯들이 무척 그리워졌다. 제대로 도망쳤다면 영원히 소식이 끊길 것이고 그 러지 못했다면 언제든 전해들을 것이다. 혼자 남은 이 감각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다시는 교도소 같은 곳에 끌려가고 싶지 않아...
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공허하게 울리는 발자국 소리, 열쇠를 밀어넣는 소리, 내가 잡고있던 창살이 밖으로 당겨지는 감각. “나와.”
순경이 날 데려간 곳은 밝은 취조실이었다. 아무 설명도 없이 앉으라고 손짓하더니 나가버리고, 또다른 형사가 들어와 서류를 한참 넘긴다. 수많은 페이지 사 이에 언뜻 단원들의 이름과 사진이 비쳐보였다. 그중에는 전소연도 있었다. 혼자만 시뻘겋게 이름이 칠해진 채로.
“이름?”
“김... 민니입니다.”
“김민니?”
“그냥 민니요.”
형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날 노려봤다. 지금 저랑 장난하나 싶을 것이다. 어느새 전소연이 억지로 붙여준 이름에 익숙해진 내 모습이 낯설었다. 입안이 쓰 다.
“거기서 얼마나 일했어?”
“...한달쯤...”
“똑바로 말 안 해?”
형사가 답답한 듯 책상을 쾅 내리친다. 날짜를 세질 않아서 정말 정확한 일수는 기억나지 않는다. 뭘 대답하라는 건지. 생각하면 할수록 몇 년 전의 기억이 떠 올라 머릿속이 복잡해지기만 한다. 그냥 풀어줘. 나는 아무것도...
“잠시만요.”
허공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예슈화? 불에 데인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봐도 취조실엔 나와 형사뿐이다. 벌떡 일어서려다가 어깨를 짓눌려 주저앉 았다. 왜 자꾸 다들 어깨를 압박하는지 모르겠다. 여기 닿은 손길 중 미연의 것 빼고 좋았던 게 아무것도 없는데.
“저 보이게 해주세요.”
작게 소근대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이제까지 거울이던 것이 반투명한 유리창으로 변했다. 참관실에서 불을 켠 것이다. 예슈화는 마이크에 몸을 숙인 채 날 똑 바로 응시하며 말하고 있었다.
“민니씨. 나가고 싶으면 내 말에 잘 대답하세요.”
“......”
“서수진 어딨어? 다른 놈들은 전부 모른다고만 하고, 지금 잡혀들어온 사람 중에 알 만한 게 당신밖에 없는데.”
서수진? 잘 도망친 건가. 초조한 예슈화의 표정과는 반대로 내 마음은 안도감에 휩쓸렸다. 수진이 이런 데 잡혀와서 고초 겪는 꼴은 상상만 해도 괴롭다. 그 고운 성정에 갖은 신문을 당하면 분명 녹초가 될 것이다. 전소연하고 같이 도망갔을까. 둘은 거의 항상 붙어다니니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조용히 한숨을 내 쉬자 예슈화가 불쑥 덧붙인다.
“안심하지 마. 전소연은 진작에 처넣었으니까.”
“...여기 있다고?”
“그래. 조미연도 함께.”
심장이 철렁한다. 그대로 추락하는 기분이다. 미연이 여기 있다니. 말도 안 돼. 보험사 직원과 경찰이 쳐들어왔을 때 미연은 분명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 어느새 찾아내서 가둬놨단 말이야. 그리 쉽게 잡힐 리 없다.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노려보자 예슈화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선택해. 아는 거 다 털어놓고 참작받을지, 입 꾹 다물었다가 오만 죄목 다 적용돼서 평생 썩을지.”
참관실에서 몇몇 형사가 예슈화를 말리는 게 보인다. 자기들이 해야할 말을 보험사 직원이 했다고 저 난리다. 어차피 나한텐 누구 입에서 떨어지든 청천벽력 인 것을. 내 앞에 있던 형사가 말을 이어받으려고 하는데 예슈화가 다시 끼어든다. 눈빛에 광기가 엿보인다. 옆에서 아무리 말리고 잡아당겨도 시선 한 번 주 지 않는다.
“입 여는 게 좋을걸? 지금 옆방에서 전소연 신문 중이야. 둘 중 한 명만 협조하면 비협조자에겐 무슨 수를 써서든 죄다 뒤집어씌울 거고, 협조한 놈은 두발로 걸어나가게 해줄게. 둘 다 말 잘 들으면, 뭐, 무사히 풀려나진 못하겠지만 뒤 좀 봐줄 수는 있겠지. 혹시라도 의리가 끝내줘서 너네 모두 닥치고 있으면 가벼 운 처벌로 끝날지도 모르지만 글쎄, 전소연이 너한테 그만한 신뢰가 있을까?”
“예슈화씨!”
앞에 앉아있던 형사가 버럭 소릴 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슈화를 제압하거나 끌고나가는 사람이 없다. 아무리 기강이 해이해졌다지만 일개 사기업 직원 에게 쩔쩔매다니, 저 인간의 등 뒤에 있는 게 누구인지 짐작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겨우 한마딜 던졌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서수진.”
“...그러니까 사기꾼들을 잡아야겠다거나 피해자를 찾겠다거나 하는,”
“그딴 건 상관없어. 서수진 어딨냐고!”
제정신이 아니다. 이거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예슈화가 고함치는 순간 형사가 마이크를 차단했고 취조실 안은 끔찍한 정적에 휩싸였다.
나는 찬찬히 예슈화의 제안같은 협박을 곱씹었다. 전소연과 내가 모두 입을 다물면 가벼운 처벌로 끝날 가능성이 있다는 듯 말했다. 증거 찾기 어려운 모양이 지. 우기가 배신했다고 한들 시체를 어디다 버렸는지는 모르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 믿고 침묵했다가 전소연이 조금이라도 정보를 흘리면 괘씸죄로 가중처벌받게 된다. 공장에 평생을 갇혀 자란 전소연이 감옥에서 썩고 싶어할까?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서수진과 친구들을 찾고 싶어하지 않을까?
만약 내가 입을 열면? 물론 나는 서수진의 행방에 대해 짐작가는 게 아무것도 없지만 적어도 마지막 희생자의 시체 위치를 안다. 그걸 말하면 아무 대가 없이 바로 풀려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소연이 침묵했을 때라는 가정이고, 그쪽에서도 똑같이 머릴 굴려서 일러바쳤다간 꼼짝없이 죄목이 드러나고 정 직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내가 뭘 잘못했는지 골몰했다. 살인현장을 보고도 방관한 것? 범죄자에게 동정심을 품은 것? 보험사기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것? 서수진이 멀리멀리 도망쳤으면 좋겠다는 발칙한 생각을 하고 전소연을 안타까워하고 조미연의 금안에서 사랑을 느낀 것?
......머리가 지끈거린다. 생각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고 처음 서커스단 전단지를 발견한 시점까지 되돌아갔다. 건방지게도 보호소에서 뛰쳐나와 혼자 잘 살 수 있다고 자만했었다. 이런 삼류 서커스단이라면 얼마든지 날 받아줄 거라고, 내가 들어가서도 기죽지 않을 거라고 과신했다. 하지만 그 섣부른 행동의 결과 는 날 옭아맨 감정과 차가운 쇠사슬이었다.
“전소연...”
“뭐라고?”
형사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입을 열자 화색이 돈다. 자백하겠구나, 짐작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슈화에게 협조하는 게 최선의 선택지다. 전소연이 침묵하건 입을 열건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자백해야 한다. 만약 부단장이 침묵을 선택 했다면 똑같이 침묵하는 것보다 자백해버리는 게 유리하다. 곧바로 자유의 몸이 될 테니까. 반면 부단장이 예슈화에게 협조하기를 고른대도 여전히 배신해야 한다. 그때 입을 다물었다간 꼼짝없이 가중처벌 받을 테니. 그러니까 나는 협조해야 한다. 예슈화에게 내가 아는 걸 전부 고해야 한다...
“대체......”
참관실에 있던 형사가 스피커 볼륨을 올리는 것이 보인다. 나는 숨을 참았다가 있는 힘껏 내질렀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 이 개새끼야!”
이성적인 생각은 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딴 거 여기 잡혀온 순간부터 집어치운 지 오래다. 조미연의 금안이 보고 싶었다. 그 섬뜩하고 아름다운 눈에 입맞추 고 안아주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거 누리던 거 몽땅 앗아가놓고 뭘 협조하라고. 그러면서 자긴 사랑을 찾아? 내 앞에서?
예슈화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당장이라도 유리벽을 부수고 들어올 기세ᄋ다. 형사들이 예슈화의 팔을 잡아당겼고 나는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 였다.
“마음대로 해. 이제 다 뺏겨서 잃을 것도 없으니까. 너 분명히 나만 풀어준다고 했지. 미연이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잡아가둘 거잖아. 그러면서 협상하는 척 전소연이 어쩌고 조건을 들먹여? 이 개자식아. 내가 아니라, 전소연이 아니라 니가 사기꾼이야!”
“너 돌았냐? 감방에 묫자리 깔고 싶어?”
“마음대로 하라고 했지. 그래봐야 너만 아쉬워. 송우기 붙잡고 열심히 추궁해봐! 아무것도 안 나올 테니.”
예슈화가 잠시 말을 잃었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지독한 정적이 흘렀다. 모두 얼굴이 새파래져선 우리 둘만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점점 가라앉는가 싶더니, 이내 예슈화가 머릴 쓸어넘기며 픽 웃었다.
“그래, 니 말이 맞아.”
“...뭐?”
“정말 아무것도 안 나오더라. 송우기한테선.”
예슈화는 그 말을 끝으로 참관실을 박찼다. 곧 형사가 날 붙들고 취조실 밖으로 끌어냈다. 나는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예슈화 의 말이 무슨 뜻인지 계속 생각했다.
“...왔네.”
그러나 곧 그럴 필요조차 없어졌다. 텅 비었던 유치장 안에 송우기가 들어와 있었으니까. -
왔네, 는 무슨. 처음엔 내가 미쳤나 생각했다.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 분명 우릴 등졌던 녀석이 나와 사이좋게 같은 꼴이 됐다니. 이것도 뭔가 정보를 캐내려 는 예슈화나 그 팀장의 계획 중 일부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송우기를 구석에 밀쳐놓고 최대한 떨어져 앉았다. 곧 그게 의미없고 유치한 짓인 걸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송우기는 아까부터 기묘한 낯빛으로 날 응시했다. 울음을 참는지 웃음을 참는지 모호하고 어정쩡한 얼굴. 뭔갈 말할 듯 말 듯 입술이 달싹인다. 하지 마. 목소 리를 들으면 폭발할지도 몰랐다. 귀를 틀어막았지만 곧 무감각이 무서워 몸을 둥글게 말았다.
“김민니.”
송우기의 목소리가 발치까지 다가왔다. 고갤 들자 내려다보는 두 눈이 보였다. 왜 자꾸 위에서, 저렇게 고압적인 시선을 보낼까.
“옆에 앉아.”
“싫어.”
“목아파.”
“......”
우기는 입을 꾹 다물고 한발짝 물러섰다. 나는 아예 일어나 마주했다.
“대체 왜 이래? 너 우리한테 왜 그랬어? 말이나 해봐.”
“우리?”
조소 섞인 비아냥이 들린다. 지금 누가 누굴 비웃어? 주먹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송우기는 두려워하긴커녕 도리어 억울하고 성난 표정을 했다. 니가 뭔데. “언제부터 김민니가 서커스단 일원이 됐냐.”
이젠 알 수 없는 소리까지 한다. 암흑 속 잠긴 표정을 읽어내려 노력했지만 달빛에 흔들리는 눈동자 외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언제부터냐니. 계약서에 사인한 순간부터 일원이었지. 아니야?”
“그딴 거 말고.”
“......”
“니가 언제부터, 아니 어떻게 핵심이 됐냐고.”
“너 지금 심문하냐?”
“아니야!”
송우기가 버럭 외친다. 그때 달을 가린 구름이 걷히면서 완전한 표정이 드러났다.
우기는 울고 있었다. 아까 억지로 참던 것과는 달리, 완전히 자신을 놓고 얼굴이 흠뻑 젖도록 운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이 무섭다기보다는 위태로웠다. 항상 생글거리던 낯에 저런 표정이 떠오른 게 얼마만일까. 여하튼 아주 오래된 건 분명했다. 울음소리를 어떻게 토할 줄도 몰라서 입을 꾹 다문 채였으니까. 아주 오랫동안 울지 못했거나 몰래 울었거나...
“난 너보다 훨씬 어릴 때 들어왔어. 어리다고 아무 일도 못 받다가 겨우 단원으로 인정받은 지 딱 3년이란 말이야. 그래도 아직 천덕꾸러기래. 근데, 근데 너 는 어떻게. 3년이 뭐야, 30일도 안 돼서 전소연 사무실에 들락거리고...”
“......”
“그냥 그것뿐이면 참으려고 했어. 원래도 난 쭉 참으면서 살았으니까.”
우기가 소매로 눈을 훔쳤다. 어찌나 힘조절을 못하는지 그 한번에 피부가 새빨갛게 쓸렸다.
“근데 넌 정도를 모르더라. 서수진도 조미연도 네 앞에서만 달랐어. 특히 조미연 걔는 뭐야? 다른 단원들은 돌멩이 보듯 걷어차면서 너한테만 웃고 잘해주고. 전소연은 말리긴커녕 너만 불러서 중요한 얘기 쑥덕거리고!”
“송우기,”
“아주 오래 일한 사람이면 억울하지나 않지. 네까짓 게 뭔데, 햇병아리 주제에 나보다 빨리 올라가냐고...”
그제야 지금껏 석연찮던 행동이 이해가기 시작했다. 마냥 밝던 우기가 이따금씩 어두워졌을 때, 불쾌감을 드러냈을 때, 이 하나하나가 전부 같은 맥락에 이어 져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해서 질투했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었다. 우기는 내 처지를 탐냈던 거다. 정작 당사자인 나는 벗어던지고 싶었던 나의 입장을, 우 기는 그렇게도 가지고 싶어했다.
어이없게도.
“그래서 이딴 짓을 했어?”
“...뭐?”
질책하듯 쏟아진 말에 우기가 울음을 그쳤다. 예슈화도 그렇고 송우기도 그렇고 왜 다들 날 화나게 하는지 모르겠다. 두 사람이 꾸민 폭풍의 눈에 왜 내가 서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제 더이상 눈도 아닌 것 같은 이 어지러움 속에 나는 똑바로 버티는 것도 벅차다. 벅차서, 자꾸 열이 올랐다.
“그렇게 억울해서 나온 결과가 이거냐고. 결국 넌 전소연 배신하고 단원들도 엮어넣었잖아. 왜 널 말단으로 놔뒀는지 뻔히 보이지 않아?” “김민니!”
“고작 그런 이유로 몇 명을 해친 거야. 지금 여기 있는 꼴 보니까 이용당했다는 것도 알겠어. 후회하고 있지. 그렇지?”
“아냐. 나는... 난 후회 안 해. 분명히 다 풀어준다고 했어. 전소연이랑 서수진만 빼고 원래 자리로 복귀시켜주겠다고...”
“그러면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말문이 막힌다. 떨어진 입술 새로 정적만이 흘러나온다. 도대체 무슨 대답을 할지 궁금해서 마냥 기다렸지만 우기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시간이 길어질수 록 기가 찼다.
“대답해봐. 너 혼자, 그 많은 사람들을 다시 모아서 단장으로서 이끌겠다고? 그럴 수 있어?” “......너보다는,”
“뭐라고?”
“너보다는 가능하겠지!”
악에 받친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퍼진다. 이러다 누가 들어도 듣겠지 싶었다. 입을 막아보려고 했는데 그대로 밀쳐졌다.
“네가 뭐라든 상관없어. 어차피 넌 당분간 바깥구경도 못할 거고, 난 그동안 뭐라도 할 수 있으니까. 다른 곳을 들어가든 사람을 모으든 너보단 나아. 네 처지 보다는...!”
“니가 탐낸 게 그거잖아. 아니야?” “아니야. 절대 아니야...”
우기가 얼굴을 감싸쥐었다. 이젠 화도 나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그럴 이유가 없다. 우기 말대로 화내봤자 바뀌는 건 없고, 애초에 저 애가 해하려던 대상은 내 가 아니었다. 누구라도 내 자리에 있으면 목표물이 되는 거였다. 나라서 특별히 노린 것이 아니라... 그걸 깨닫는 순간 너무도 허무해서 온몸에 힘이 빠졌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곧 먼 곳의 중문이 열리더니 심기 불편한 목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낮에 날 감시하던 순경이었다. 우기의 상태를 살피고 대번에 인상을 찌푸린다. “자식아. 너는 캐내라고 보냈더니 니가 울고 있냐?”
내 앞에서 저런 얘길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려면 상관없어진 모양이다. 아니면 나를 아주 무시하거나. 순경이 혀를 쯧쯧 차더니 우기만 빼내고 철창 문을 다시 닫았다. 비척비척 끌려가는 뒷모습이 나보다도 쓸쓸했다.
...그런데, 우기가 지금까지 한 말은 전부 진심 아니었나? 쟤가 날 유도신문하려고 와서 울 일이 뭐가 있다고. 결국 송우기는 예슈화나 경찰들의 특명을 지니 고 와서 자기 진심 털어놓은 것밖에 안 된다.
그리고 그 진심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무거워서, 나는 한동안 불편함을 떨쳐내지 못했다.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원망하던 우기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 랐다.
-
바깥 구경도 못할 거라던 말대로, 나는 유치장에 며칠이나 갇혀있었다. 가끔 배식하러 오거나 예슈화의 종용을 전달하러 올 때 빼고는 찾는 사람도 없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불안감은 커져가고, 때때로 그냥 말해버릴까 하는 유혹도 찾아왔다. 하지만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감이 그랬고, 상황 돌 아가는 꼴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입 다물고 있으라고.
만약 전소연이 뭔갈 고했다면 진작 나에게도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얘는 말했고 너는 침묵했으니 괘씸죄까지 묻겠다거나, 아니면 한 번 기회 줄 테니 말해 보겠냐는 회유가 들어왔겠지. 하지만 예슈화는 그러지 않았다. 전소연은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버티는 중이다. 서수진이 걱정되기는 했다. 언제까 지 참을 수 있을까?
“에취!”
상념에 잠긴 찰나 순경이 재채기를 했다. 퍼뜩 놀라 바라보니 교대 중이었다. 경찰은 두셋이 번갈아가며 나를 감시했다. 이제 막 들어온 사람이 인상 쓰며 손 을 옷에 문질렀다.
“아 드럽게. 침 튀었어.”
“미안. 요즘 밤에 코가 계속 간지럽더라.”
“나도 그렇긴 해. 어, 너 발 밑에.”
한 사람이 몸을 숙여 뭔가를 주워들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은은하게 빛나는 작은 조각이었다. 멀리서 봐도 꽤 예뻐 보였다. 순경도 그리 느꼈는 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야, 이거 뭐냐? 플라스틱인가?”
“아닌 것 같은데. 에취!”
또다시 재채기. 이젠 나도 코가 간질간질했다. 감기 들려나. 아픈 상태의 유치장 생활이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해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저거.
초록색이잖아.
순경이 들고 있는 짙은 녹색의 조각이 언뜻 밝게 빛났다. 다음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나비가 내 뺨을 스쳐지나갔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 다. 그 나비의 날개는...
“뭐, 뭐야! 어디서 들어왔,”
홀더에서 허겁지겁 총을 꺼내던 순경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길다란 그림자가 그 목덜미에 감겼다가 순식간에 다른 놈에게로 옮겨가는 것이 보였다. 두번째는 양손으로 어떻게든 그것을 떼내보려다가 이내 힘없이 쓰러졌다. 몸을 조금씩 움직이고 켁켁대는 것을 보면 살아있긴 하지만...
미연이한테 물리면 십 분 내로 골로 가.
수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렸다. 때마침 밤하늘을 닮은 나비가 내 머리 근처를 맴돌고 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철창을 향해 걸었다. 길다랗게 늘어져있 던 그림자도, 내 쪽으로 느리지만 유려하게 다가온다.
“미연아.”
세로로 길게 찢어진 시커먼 동공과 눈이 마주쳤다. 이제는 내게 구원과도 같은 금안이었다.
·뱀의 눈: 금안을 지닌 사람
나는 피투성이가 된 내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차라리 안 보이게 뱀으로 변해있을까도 생각했지만 그래봐야 바닥에 쓸려서 덧나기만 했다. 화끈거리는 통증에 이를 악물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열한 개.
오늘 뜯긴 비늘의 개수. 그들은 무슨 보석에 심는다느니, 어느 샹들리에에 장식한다느니 하는 희한한 핑계로 생살을 뽑아갔다. 그 과정에서 내가 몸부림치건 아파하건 상관없었다. 비늘 하나당 들어오는 현금이 산처럼 쌓여 시야를 다 가렸으니까. 작업이 끝나면 최소한의 치료만 한 채 방에 내팽개쳐두고 회복을 기 다린다. 말이 회복이지 나에게는 다음 고문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나는 매일밤 내게 평범한 몸을 달라고 기도했다. 이따위 돌연변이 말고, 다른 사람과 다름없는 지극히 정상적인 몸을 달라고. 왼팔의 비늘이 아무리 단단하고 아름다워도, 사지를 속박당하고 독니에 마개까지 덧씌워지면 아무 쓸모가 없다. 도리어 지금처럼 먹잇감이 되어 도려내어질 뿐이지. 외모 또한 마찬가지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유리하게 작용했을 모든 조건이, 여기서는 ‘돌연변이인 데다 얼굴까지 아름다운 희귀한 수인’으로 둔갑해 날 옥죄었다.
“징그러워...”
내가 나를 보면서 하는 말은 매번 그것뿐이었다. 너무 흉측하고 징그럽다. 작업이 끝난 직후의 왼팔은 정말이지 두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그래 서 애써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기면 최소한의 가구밖에 없는 삭막한 방이 눈에 들어왔고, 다시 고갤 숙이면 이번엔 새카만 손톱이 보인다.
이 손톱도 원랜 남들처럼 평범한 분홍빛이었다. 1년 전, 생지옥을 견디다 못한 내가 이 손으로 문을 부수고 공장의 감시원들까지 죽이고 탈출했을 때, 다시 생 포한 사장이 모조리 뽑아버린 뒤로 검게 물들었다. 조금 기다리면 원래대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욱 까매지기만 했다. 이젠 아예 원래부터 이랬던 것 처럼 자연스러웠다.
“괜찮아?”
그때 문 밖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끌려갔다 돌아오면 꼭 찾아와 안부 묻는 사람. 이 공장 내에서 유일하게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아니. 아파.”
“이거 발라.”
소연이 내게 작은 연고 튜브를 건넸다. 분명히 직원들 비품창고에서 몰래 빼온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며 괜히 날 선 말을 했다.
“청소하랬더니 재고도 청소하는 거 알면 사장이 가만 있을까?”
“야, 조용히 해. 나 잘려.”
하면서, 소연이 제 목을 그어보였다. 목 잘려. 섬뜩한 말이지만 이곳에선 농담 축에도 못 낀다. 하지만 나는 웃었다. 웃을 거리가 없으니까.
“일은 잘 돼?”
내가 묻자 소연이 주위를 휘 둘러보더니 문에 바짝 밀착했다. 아주 작게 난 식기 투입구로 소근대는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야. 나 오늘 사장실 근처 복도도 닦았거든. 근데 누구 온지 알아?”
“모르지.”
“변호사가 왔더라.”
“변호사?”
소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사 무신경한 애가 이렇게 열성적인 모습은 처음 본다. 덩달아 나도 귀를 기울였다. 근데 변호사가 정확히 뭐지? “내가 살짝 엿들었는데, 변호사가 사장한테 엄청 뭐라하더라고.”
“왜? 뭐 잘못했대?”
“그건 모르겠는데, ‘이딴 식으로 운영하실 거면 장사 접으세요! 저까지 위험해진단 말입니다!’ 하더니 박차고 나오더라고. 딱 걸릴 뻔했지.” “조심해...!”
나도 모르게 다급해졌다. 하나뿐인 친구를 허무하게 잃고 싶지는 않았다. 사장은 성격이 아주 고약해서 자기 기준에 못 미치는 직원은 바로 목을 날려버리기 로 유명했다. 그 목이 진짜 목인지 비유적인 의미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뭐든 간에 전소연이 사라진다는 건 변함없으니까.
간절한 표정을 읽은 소연은 속도 모르고 킬킬대며 투입구로 손을 넣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어깨를 툭툭 두들겨준다. 그리곤 다시 빼느라 한참을 낑낑댔다. 투 입구는 식판이 겨우 들어갈 만큼 좁았다.
“여튼, 뭔가 좋은 소식이 있는 것 같아. 사장이 망하면 우리한텐 좋은 거니까. 종종 얘기해줄게.”
“절대 들키지 마.”
“알아서 잘 하지.”
전소연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저 애가 저렇게 웃을 때면 아무것도 없는데 괜히 안심이 됐다. 그걸 알고서 저러는 것이다. 소연이 가자마자 잊고 있었던 왼 팔의 통증은 다시 살아났지만, 그날밤은 그렇게 우울하지 않았다. 그 새로운 소식이 뭘까 상상하느라.
-
요즘 공장이 부쩍 바쁘게 돌아간다. 그 말은 내 팔도 쉼없이 혹사당한다는 뜻이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특히나 더욱 자주 불려갔 다. 내 비늘이 이 공장에서 제일 ‘돈이 되는’ 물건이란다. 덕분에 회복하기가 무섭게 도로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는 날이 잦아졌고, 내 몸은 견디다못해 새 비 늘을 돋우지 않기 시작했다. 원랜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회복되곤 했던 자리에, 핏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얇은 피부만이 돋아났다.
“미친 거 아니야?”
전소연은 내 왼팔을 보고 복도가 떠나가라 빽 소리질렀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황급히 입을 틀어막은 뒤 주위를 둘러봤지만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목소리 좀 낮춰.”
“그러게 생겼어? 이새끼들 다 죽여야돼. 평생 회복 안 되면 어떡하냐?”
“안 그래도 오늘 보고 가면서 나 폐기처분한다 그러더라.”
“뭐?”
“아니, 확실한 건 아니고. 좀 지켜보다가.”
“나 잠깐 방화 좀.”
정말 기름이라도 들이부을 기세로 돌아서는 소연을 손가락 하나로 간신히 잡아챘다.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을 텐데 그대로 잡혀있다. 거봐 용기도 없으면서. 장난스럽게 놀리자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친다. 그때 다른 직원이 근처를 지나갔고, 소연은 한동안 깨끗한 바닥을 빡빡 닦는 척하다가 다시 돌아왔다.
“야 그리고 저번에 말했던 변호사.”
“어.”
“진짜 공장 문 닫을 거 같던데? 말하는 거 들어보니까.”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전혀 믿지 않았다. 까마득히 어린 시절, 처음 기억나는 순간부터 쭉 생활했던 이 음습한 공장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생 각은 엄두도 못 냈으니까. 하지만 전소연은 그 후로도 계속 그 변호사의 소식을 전했다. 사장한테 답답한 듯 소리를 친다느니, 서류를 잔뜩 가져와서 판례가 어떻고 뇌물이 얼마고 일장연설한다느니, 하루는 아예 자기 그만둔다고 사직선언까지 했단다. 그리고 사장은 옷깃 붙잡으며 매달렸다나.
“말이 돼? 그 새끼 성격에 주먹을 날렸으면 날렸지.” “아냐. 진짜야. 나 그거 엿보다가 들켜서 죽을 뻔했잖아.” “그동안 못 온 게 벌받느라 바빠서였어?”
“어. 지하실 진짜 개더럽더라.”
전소연은 진절머리난다는 듯 고개를 마구 저었다. 지하실이라. 가장 좁고 가장 습한 그곳은 이 공장에서 ‘밥만 축내는’, 그러니까 ‘돈은 안 되고 유지비만 들어 가는’ 수인들이 모인 곳이었다. 곱씹을수록 불쾌한 표현이었지만 사장은 그런 말을 매일같이 지껄이고 다녔다. 그 새끼를 지하실에 가둬놓고 열흘 내리 굶기 면 주둥아리를 놀릴까 못 놀릴까? 아마 아사해도 입만 유령으로 살아남아서 저주의 말을 퍼붓고 다닐 것이다. 내 예상은 그랬다.
“여튼 다음부턴 절대 사장실 근처도 가지 마. 진짜 죽어.” “아 알겠어. 진짜 딱 한 번만 더 듣고,”
“야!”
“네네...”
그러나 소연이 약속을 지키는 일은 없었다. 아예 엿들을 기회가 증발해버렸기 때문이다.
-
“고맙지?”
나는 뻔뻔하게 이죽거리고 있는 사장의 낯짝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마 금안일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게, 머리가 띵할 정도로 속이 끓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적이고 역겨운 새끼. 아까 분명히 지하실에서 수많은 포대자루를 끌어내어 트럭에 싣는 걸 봤다. 크기가 딱 성인 한 명씩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다.
“너희는 특별히 살려주는 거야. 그동안 내 지갑에 많은 공헌을 했으니.”
비계가 덕지덕지 붙은 몸이 쉼없이 꿀렁거린다. 살려줘? 아주 건방진 표현이다. 마치 우리도 지하실 사람들마냥 트럭에 차곡차곡 적재되었을 수도 있다는 협 박처럼 들린다. 실제로도 그 뜻이 맞을 것이다. 요즘 공장을 지나치게 가동한다 싶더니, 폐업 전 마지막으로 한탕 벌이려는 수작이었나. 고맙게도 그 덕에 내 왼팔은 아직 새 비늘을 반 정도밖에 돋우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상처를 쓰다듬으며 물러서자 비계덩어리가 아가리를 크게 벌려 웃는다.
“네녀석들도 상태 안 좋았으면 어디 묻어버렸을 텐데. 우리 변호사 나리가, 너흰 나중에 증인이 돼도 비교적 건강하니까 나한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네? 하하.”
정신이 어찔해질 정도로 미친 소리다. 그런데 옆에서 어서 가자고 재촉하던 변호사가 부정하는 말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게 사실이라면... 무슨 법이 이래? 주위를 둘러보자 다들 경악한 표정이다.
“그럼, 가자고.”
사장이 뒤돌아 세단으로 향했다.
순간, 기회는 이때뿐이다, 라는 생각이 번뜩 스쳐갔다. 여기는 행인조차 없는 외진 폐공장 앞. 주위에 있는 거라곤 저 사장과 변호사, 경호원 몇 명, 그리고 풀 려난 우리들 뿐. 경호원 덩치가 아무리 크다한들 나 같은 수인 몇 명이면 제압은 일도 아니었다. 물리적으론 충분히 보복할 수 있다. 충분히.
하지만...
“잘 살아봐라, 어디.”
우리에겐 결정적인 게 없었다. 죽이겠다는 각오. 죽일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없었다. 평생 좁은 밀실에 갇혀 폭력을 당했으면 당했지 가해본 적은 없던 사람 들이다. 전소연이 연고를 도둑질할 때도 심장이 그리 뛰었다던데, 하물며 죽이는 일을 손쉽게 실행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우린 한마디 말도 못해보고 허망하게 차를 떠나보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내 삶의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 그것이다. 그때 사장을 죽이지 않은 것. 용기 를 냈더라면 그 뒤의 수많은 도륙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얘들아.”
무력감에 주저앉았을 때, 전소연이 비장한 목소리로 우릴 불렀다. 고갤 들어보자 답지않게 진중한 표정이 보였다. 슬며시 눈썹을 치켜올리니 부끄러운 듯 괜 히 주먹질한다. 허공에.
“앉아만 있을 거야? 일어나. 우리... 뭐라도 해야지.”
그 말에 몇몇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남았고, 나머진 알아서 살길을 찾겠다며 흩어졌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소연의 곁에 남기로 했다. 외로운 것보단 함께 갈 사람이 있는 게 좋아 보여서.
“너 믿어도 돼?” “그럼. 무조건 믿어.”
소연은 작은 덩치로도 아주 듬직해보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가슴팍을 팡팡 두들기는 모습에 나는 처음으로 소리내어 웃었고, 소연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올 려다보았다. 그것이 비로소 내 인생의 시작이었다.
-
나와 전소연은 재주 있는 수인들과 함께 서커스단을 차렸다. 처음에 서수진은 끼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그 애의 아름다운 날개를 잘 알고 있던 우리가 극구 말려서 남았다. 한때는 그 애 덕에 예슈화를 얻었으니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당연히 아니다. 서수진을 갖겠다는 집념 때문에 서커스단 자체를 부숴버릴 줄은 누가 알았겠나.
여하간 이건 나중의 일. 우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관객을 그러모았고, 공연을 인상깊게 봤다며 접근한 인간 후원자를 단장으로 섭외해서 제법 구색까지 갖췄다. 단 한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역시 재정상태였다. 티켓을 아주 비싸게 받지도 못하는데 월급은 계속 나가니 이대로라면 존속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골머리 앓던 어느 날이었다.
“미, 미연아! 조미연! 야!”
전소연이 허둥지둥 달려와 날 붙들었다. 단원들 앞에선 위신 떨어진다고 이름도 함부로 안 부르던 애가 왜 이러나 싶었다.
“빨리 와. 너 지금 독 있지?”
공장에서 이따금 독성반응 실험을 한다며 내 독을 모두 추출해가는 일이 있었다. 처음엔 괜찮았지만, 몇 년이고 꾸준히 반복하니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땐 독이 아예 생성되지 않는다. 전소연은 지금 그걸 묻는 것이다. 있다고 고갤 끄덕이자 다짜고짜 손목을 잡아당긴다. 끌고 가는 곳은 단장의 천막이었다.
“저새끼 좀 어떻게 해봐, 빨리!”
막사 입구를 걷어올린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단장이라는 새끼가 어린애 하날 붙잡고 제 쪽으로 마구 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은... 어쨌든. 별 로 묘사하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나는 그 즉시 뱀의 모습을 드러내어 단장을 물었다. 일부러 말단부인 발목을 노려서 독이 퍼지는 정도를 조절했는데도, 단장은 채 30분을 못 넘기고 죽어버 렸다. 내 독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젠장. 전소연은 머리를 감싸안고 욕지거릴 뱉었다.
“미연아, 우리 잡혀가면 어떡하지? 또 갇히면 어떡하냐고. 나 진짜 감옥 같은 데 다시 들어가면 혀 깨물고 죽을 거야.” 소연이는 그날 밤새워 나를 붙들고 울먹였다. 그땐 우리 둘 다 어리고 겁도 많았다.
그대로 한달이 흘렀다. 멋모르는 우리는 단장의 죽음이 조용히 묻힌 줄 알고 안심하고 있었다. 야영지를 옮기고 새로운 공연을 준비할 때, 새하얀 얼굴의 어 린애가 정장 차림으로 쳐들어와 여기 담당자가 누구냐고 질문하기 전까지는.
“--생명 손사팀 사원 예슈화입니다. 협조 부탁드려요.”
보험사 이름이 새겨진 명찰을 받자마자 전소연의 낯은 종이보다 더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경찰만 아닐 뿐 경찰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방문했다. 손사팀이 뭔 진 모르겠지만 자기네 회사 고객이 실종되었으니 분명 조사를 할 거고, 그럼 수상한 냄새를 맡을 것이다. 조금만 조사하면 우리가 어설프게 버린 시체도, 그 몸에 남은 나의 독도 들통나고 만다. 우리의 안색이 나빠지자 예슈화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훑었다. 예나 지금이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성 미였다.
우리 예상대로, 예슈화는 여기저기 탐문하고 다니며 점점 더 많은 실마리를 찾아냈다. 애초에 한 번 옮긴 야영지까지 어찌어찌 추적했다는 게 보통 실력은 아 니었다. 나중에 말하길 그때 회사에서는 별로 돈 안 되는 고객이니 그냥 보험금 주고 치우라는 식으로 지시했는데, 왠지 신입의 패기로 조사하고 싶어서 쫓아 왔다고 했다. 그리고 수진을 만났으니 이건 운명이라며. 예슈화는 지겨운 ‘운명론’을 끈질기게 설파하고 다녔다. 우리의 귀에 딱지가 앉을 때까지.
예슈화가 사건의 전말을 밝히기 직전까지 갔을 때, 서수진이 처음으로 그 애 앞에 나타났다. 슈화는 당장에 메모하던 수첩을 찢어버리고 다음 장에 수진의 이 름을 받아적었다. 번호도 알려달라고 했는데 우린 개인 전화가 없었으니 당연히 불가능했다. 예슈화는 요즘 세상에 핸드폰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불신하 다가, 소연이 장부를 보여주자 믿었다. 그리곤 모든 사건을 깨끗이 덮어버렸다. 앞으로 따라다녀도 된다는 조건과 함께. 거액의 보험금은 덤이었다.
첫 살인이 그렇게 수습되자, 나는 안도감에 더해 일종의 통쾌함마저 맛봤다. 수인을 우습게 보고 학대하는 인간 중 하나를 내 손으로 직접 처리했다는 도취감 이었다. 몇 년 전 허무하게 보내주었던 공장 사장 대신 복수한 듯한 착각도 들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스운 감정이지만, 그땐 그랬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그 격앙된 감정은 자취를 감추고, 되려 정반대의 불쾌감만 머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사장의 목숨을 다른 인간 으로 대체했다는 사실은 더이상 어떤 위안도 되지 못했다. 오히려 패배감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정말 죽이고 싶은 놈은 멀쩡히 살아숨쉬고, 비교적 만만한 대 상만 처리할 수 있는 내 현실이 뼈저리게 와닿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인을 멈추지 못했다. 서커스단의 재정 문제도 있었지만, 내가 약간이나마 무력감을 떨쳐버릴 수 있는 순간이 그때밖에 없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는 나약한 돌연변이가 아니라고, 길바닥에 기어다니는 하잘것없는 뱀 따위가 아니라고 그때만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물론 자고 일어나면 자괴감 뿐이었다. 살아도 산 것 같지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빠른 시일 내로 미쳐버리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 애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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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 사실 첫인상이랄 것도 없는 게, 정말 첫 번째로 마주쳤을 때는 내가 무시하고 지나쳐버렸다. 밥도 맛없고 사람이 너무 많아 피곤해 서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같은 공장에서 비슷한 고초를 겪은 사람들이었지만 사적으로 아주 친한 것도 아니고, 일단 체력 자체가 썩 좋지 않아서 얼른 자 고 싶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첫인상’이란 시선 한 번 마주치지 않은 사이에 목욕하던 장면부터 들켜버린 그때를 일컫는 것이다. 나도 꽤나 당황했지만 민니는 목 위로 온통 새빨개져서 물에 빠진 사람마냥 허우적거렸다. 처음엔 일부러 들어왔나 의심했는데, 반응을 보니 몰랐던 게 분명해서 약간 장난기가 동했다. 좀 놀 려볼까 싶었다. 그땐 인간인 걸 몰랐으니.
“써. 내가 갈게.”
일부러 바짝 다가가 말했더니 눈에 띄게 얼어붙었다. 바닥에 떨어져 더러워진 칫솔을 든 채 멍하니 굳은 모습이 재미있었다. 눈도 커다래서 시선이 어딜 향하 는지 명확히 보였다. 샤워가운이 채 가리지 못한, 이제는 거의 본모습을 되찾은 내 왼팔의 비늘.
“신기해?”
목소리는 태연히 그리 물었지만, 감정은 감추지 못했다. 내 눈은 주인에 대한 배려도 없이 숨기고픈 기분마저 다 드러낸다. 낯선 이의 시선이 왼팔에 꽂혔다 는 것만으로도 옛 기억이 떠올라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안 돼. 주문 외우듯 스스로에게 읊조리면서 민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히 떠들고 다니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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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니가 입단했을 때 존재했던 단장은 한 6개월 동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곧 보내버려야겠다고 전소연과 합의를 본 참이었다. 성격이 아주 더러웠 기 때문이다. 단원에게 욕하질 않나, 공연이 맘에 안 든다고 때리질 않나. 이런 곳에 제발로 들어오는 인간들이 으레 평균 이하의 수준이긴 했지만, 그 잘 웃 는 우기가 몰래 훌쩍거릴 정도로 폭언을 쏟아부은 걸 보고 확신했다. 시간 끌지 말자고.
문제는 어떻게 죽이냐였다. 가장 간단한 건 뱀으로 변해 목덜미나 다리를 콱 물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단장 얼굴만 봐도 역겨워서 입대기는커녕 손으로 만지기도 싫은 게 문제였다. 게다가 어디서 뭘 먹고 다니는지 몸에서 엄청난 비린내까지 풍겼다. 근거리에서 입을 벌렸다간 아무리 후 각 약한 나라도 기절할 게 뻔했다.
“무는 게 제일 확실한 방법이야. 그냥 한 번만 참아.”
“싫다니까? 다른 방법 많잖아. 독을 따로 주사하든지.”
“너 누가 독니 만지기만 해도 싫어하잖아...”
하긴 그랬다. 내가 남을 물 때는 상관없지만, 누군가 인위적으로 이를 만지려고 하면 공장 직원들이 억지로 마개 씌우던 감각이 생각나 거부감부터 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공연할 때 쓰는 단도를 챙겨들었다. 전소연이 진심이냐고 물었지만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 다음엔 단장을 처리할 천막을 여기저기 정비했다. 핏자국 막는다고 바닥에 비닐덮개도 깔고 할 건 다 했는데, 출혈이 워낙 많아서 물건에 튀기도 하고 옷 을 적시기도 했다. 쓰러져 꺽꺽대는 단장을 내려다보며 난감해하는 찰나 사건이 터졌다. 민니가 들어온 것이다.
아마 그날 민니가 우리와 엮이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서커스단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 아이가 내게 특별한 사람이 되지도 않았을 테 고, 내 인생은 여전히 전소연과 서수진뿐인 채 위태롭게 흘러갔겠지. 하지만 민니가 하필 그때 그 천막을 열고 들어옴으로써 모든 게 변했다. 나의 미래와 우 리 모두의 운명까지.
......어쩌면 예슈화의 운명론이 실재할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그때는 이런 여유로운 성찰할 틈이 없었다. 그저 큰일났다. 라는 생각뿐이었다. 피를 보고 흥분한 머리가 민니를 보고 차게 식었다. 이대로 저 애가 경 찰에 달려가 우리 인생을 끝장내겠구나, 짐작할 때였다.
민니는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미연아, 얘 뭐냐?”
전소연이 벌러덩 드러누운 민니를 발로 툭툭 치며 말했다. 글쎄, 겁쟁이? 그리 대답하면서 나도 모르게 웃었던 것 같다. 자각하지 못했지만, 나는 민니를 처음 만난 날부터 그 애 때문에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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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리가 단번에 가까워지진 않았다. 시체를 은닉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 애가 인간임을 알아버려서였다. 얘는 무슨 수인일까 궁금해 목덜미를 핥았는데 한순간에 훅 끼쳐오는 인간의 냄새란. 갑자기 동굴의 어둠이 공장의 그것으로 변모해 날 덮쳤고, 나는 본능적으로 민니를 밀어냈다. 나에게 ‘믿을 만한 인 간’이란 그때까지 전소연 정도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행위였다.
“난 인간이 싫어. 너만 보면 날 괴롭혔던 것들이 떠올라. 네 얼굴에 그 인간들이 겹쳐보여.”
하지만... 이 말은 좀 후회한다. 아니, 아직까지도 마음에 남아 나를 괴롭힌다. 이제는 민니를 볼 때마다 그 애를 뺀 세상이 온통 하얗게 번지는데, 민니의 반듯 한 얼굴에 그런 끔찍한 인간들 따위 전혀 겹쳐지지 않는데, 그 애가 혹시라도 이 헛소리를 기억하고 있을까 두렵다. 괜한 걸 들쑤실까봐 입밖에 내진 못하지 만 항상 마음 한켠에선 물어보고 싶다. 아직 저 말을 되새기냐고. 그렇다면 완전히 잊어달라고...
이런 나도 전소연이 민니를 내 조수로 붙인다고 했을 때 완강히 반대했었다. 심지어 민니 앞에서 들으라고 불평하기도 했다. 아무리 싫어도 그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민니가 어떤 성품을 가졌는지 알았다면, 내 왼팔을 잡아 부축했을 때 떨쳐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때 나는 날 보호하고 숨기기에 급급해서 눈앞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지도 못했다.
“제 냄새 싫다면서요. 부축 받아도 되나?”
그래서 어쩌면, 민니가 바보처럼 군 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그 애가 보기보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멍청이임을 깨닫는 순간, 내 마음이 나도 모른 새 풀리 고 있었으니까. 왜 그랬을까? 나보다 잘 알고, 강하고, 날카로운 인간은 언제든 날 이용해먹거나 해칠 것 같아서? 그 반대의 사람은 비교적 편안하니까?
“넌 며칠 내로 내쳐질 거야. 둔한 사람 질색이거든.”
나는 오만하게도 민니의 부축을 받으며 이렇게 단언했다. 오히려 그 애가 그렇게 둔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들어올 수 있다는 상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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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니가 내 조수로 배치되었을 때, 내가 가장 걱정한 건 역시 공연이었다. 저 어리버리한 녀석이 날래게 움직이며 나와 합을 맞출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컸 다. 전소연은 어차피 민니를 서커스단에 묶어놓기 위해 무대에 올리는 것이니 대충 해도 된다고 했지만, 난 굳이 그 애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이 때부터 민니에게 이상하게 신경 썼던 것 같다. 일반 단원들의 숙소에 그 애를 깨우러 들어갔을 때 우기가 깜짝 놀라기까지 했으니.
“선배님 뭐하세요?”
우기는 꼬박꼬박 나를 선배님이라고 불렀다. 그래봐야 뒤에선 조미연 조미연 하는 거 다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 길에서 쓰러져 있는 걸 데려온 순간부터 이 애한텐 우리가 ‘선배님’이었다. 대체 어떤 분야에서 선배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우리를 따라잡고 싶다고도 말했다. 그때부터 우기에게 신경 써 줬어야 했던 걸까?
어쨌든 나는 민니를 깨우려고 했을 때 우기의 표정과 말투가 묘했다는 걸 알아채지도 못했다. 그냥 입가에 손을 대고 쉿, 바람소리만 냈을 뿐이다. 우기는 석 연찮은 얼굴로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민니에게 내 방으로 오라고 속삭이는 걸 듣자마자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보니 왜 몰랐나 싶을 정도로 티를 많이 냈다.
“아, 안 돼!”
내 침소로 돌아온 지 한참이 지나고서야 민니가 느릿느릿 들어왔다. 일부러 달려들어 무는 척까지 하자, 조각상처럼 뻣뻣이 굳어있더니 뒤늦게 날 쫓아온다. 웃긴 건 안 된다고 다급하게 비명까지 지르며 달려왔다는 점이다. 내가 뱀인 걸 알고 쫓아오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벌벌 떨면서도 날 구하러 온 거였다. 막상 침대에 뱀은 없고 나만 누워있자, 바보 같은 얼굴로 뱀이에요? 묻는 그 애 때문에 웃음이 터질 뻔했다. 일부러 티 안 내려고 가시 돋친 말을 했는데 목소 리에 웃음기가 묻어나왔다. 민니는 그것도 모르고 불퉁하게 날 노려봤다.
연습하려고 개인 창고로 데려가는 내내, 그 애는 졸졸 따라오면서도 도망치고 싶은 기색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옆에서 시끄럽게 종알대면서 안 하면 안 되냐 고 묻는 목소리가 참 다급했다. 자기 속마음을 제대로 감출 줄도 모른다. 아무리 머리 굴려봐야 절대 보내줄 생각 없는데. 어떻게 하면 달아날 엄두도 못 내게 만들어줄까 고민하다가 그 애가 들고있던 짐가방을 찢었다.
“......”
그런데 민니의 반응이 예상보다 더했다. 그냥 겁만 줄 용도로 손톱을 휘둘렀는데, 완전히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한참 지난 후에 야 다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나는 왠지 모르게 내 손톱이 부끄러워졌다.
첫 연습 내내 민니를 까칠하게 대했던 것 같다. 물론 그 애 잘못이 아니라 내 심경의 문제였다. 나는 지금까지 돌연변이인 걸 사방에 티내는 비늘과 손톱을 감 추며 살아왔지만, 그건 남들이 나를 나쁘게 생각할까봐 그런 것이지 내 몸이 창피해서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때 처음으로 부끄러워진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수치심은 괜히 화살을 민니에게 돌렸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위험하게 칼을 던지고 험한 말을 하면서 낯뜨거운 감정을 죽이려고 노력했다.
“아야야...”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민니는 순식간에 내 태도를 무너뜨렸다. 바보같이 칼에 베여서 피 철철 흘리며 울상 짓는 얼굴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항상 갖고 다니는 천으로 지혈해주자 반듯한 얼굴이 멍하니 풀어지더니 내 쪽에 시선을 고정한다. 왠지 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매듭을 꽉 묶어버렸다.
“오해하지 마.”
“뭘요?”
“인간 피냄새 맡기 싫어서 막은 거야.”
내가 살면서 뱉은 말 중 제일 멍청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민니도 그걸 알아챈 듯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는 게 다 보였다. 나는 또 한 번 창피해졌다. -
민니가 나의 ‘처음’을 차지한 게 세 가지 있는데, 하나는 전소연을 제외하고 품에 안겨서 자도 안심되는 유일한 인간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리에 힘이 풀 릴 정도로 정신없이 웃게 해줬다는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내 밤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셋 다 민니가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지만 그중 두번째는 단원들 뿐만 아니라 예슈화까지 기함할 정도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조미연 미쳤어?”
슈화는 아예 주저앉은 날 바라보며 소연에게 그리 물었다.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빙빙 돌려가며. 한 대 때려주고 싶었는데, 얼굴이 새빨개진 채 씩씩대는 민니 때문에 더 웃겨서 그러지 못했다. 그 애는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반쯤 울먹이며 내 왼팔을 잡아당겼다. 희한하게도 뿌리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땐 너무 웃겨서 거부감 느낄 정신도 없는 거라고 넘겨짚었었다.
하지만 예슈화와 대화하고 온 민니가 내게 화를 냈을 때, 나는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어떤 것이 내 마음속에서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고 있 었다. 그 애가 화낼 만한 이유로 화를 내고, 소리칠 만한 까닭에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니 받아들이기 싫었다. 나를 보며 찌푸 린 얼굴에 서운함을 느꼈던 것 같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때 우리 사이가 뭐라고? 심지어 그 감정은 꽤나 격했다. 금안이 튀어나올 정도로.
“너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이러니까 짜증난다.”
나는 맘에도 없는 말을 뱉으며 민니를 쫓아냈다. 사실 짜증나는 건 나 자신이었다.
민니는 그날 이후 꽤 지독하게 앓았다. 공연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오질 않아서 묻자 우기가 난감한 표정으로 아프다고 답했다. 그냥 꾀병이거나 감기려니 했 는데, 밥도 거르고 누워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덜미가 잡힐까 외출도 최소화하는 우리는 그 애를 병원에 데려갈 수 없었고, 나는 불안한 마음에 우기 더러 민니를 잘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 얘길 듣자마자 우기의 얼굴이 굳었지만 반쯤 눈 뜬 장님이었던 내가 알아챌 턱이 없었다.
“아직도 아파?”
“내일 들것에 실어나르게 생겼어요. 밥도 안 먹어요.”
우기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손에 든 물수건을 만져보니 꽤 따듯했다. 분명 찬 물에 적셨을 텐데.
나는 고민하다가 야영지를 옮기기 전날 밤 민니를 침실에 들였다. 며칠 전 그 애가 나를 안아주었을 때 아주 편안하게 잠들었던 기억 때문이었다. 재우면서도 이게 통할까 조금 긴가민가했지만, 걱정한 게 무색하도록 민니는 말끔히 회복했다. 은근히 뿌듯해하는 나에게 전소연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며 짓궂게 놀렸고, 서수진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사라졌다.
“야, 너 그 쿠키 뭐야?”
그런데 수진이는 대뜸 과자를 가져다 민니에게 안겼다. 안 그래도 그 애한테 욕하고 소리지른 단원 때문에 기분이 가라앉은 참이었는데, 그 꼴을 보자 짜증이 확 치밀었다.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신경질적으로 따지자 수진이는 조용히 웃었다. 얘는 언제나 시끄러운 법이 없다.
“밤에 민니 좀 빌려갈게.”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운전하던 소연이 우리 쪽을 보지도 않고 다급히 말렸다. 난 서수진을 노려보느라 귀에 들리는 게 없는 상태였다. 좀만 더 하면 금안도 나오겠다고 생각했을 때, 수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그 애 좋아하잖아. 내가 부탁할 게 있어서 그래.”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소연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도로를 바라보며 어깨만 으쓱한다. 서수진은 이제 창 밖을 보면서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래? 나는 내 마음을 채 파악하지도 못했는데 주변에선 벌써 다 알아챘다. 서수진도 전소연도 나를 나보다 잘 안다. 그럼 민니도? 민니는 나 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 생각을 하고 있긴 할까?
나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조용히 감정을 삭였다. 하여간 서수진은 언제나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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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이는 민니를 데리고 야시장에 놀러갔다. 왠지 잠들 수가 없어서 천막 밖에서 그 둘을 기다렸다. 겉옷은 입고 있을까 했는데 그냥 벗었다. 이제 민니에겐 왼팔이든 뭐든 숨기고 싶지 않았다. 나를 있는 그대로 마주했을 때의 그 애 반응이 궁금했다.
“이거 선물이요.”
다행히 민니는 나를 보고도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귀엽게 생긴 악어 인형을 들이밀며 선물이라 말했다. 장난기 넘치는 커다란 눈이 꼭 민니를 닮았다. 그 애는 악어 인형을 보고 내가 생각났다고 했지만 나는 그걸 보고 민니를 떠올렸다. 그게 우리의 공통점이자 차이점이었다.
“잘 자, 민니야.”
내가 인형의 손을 잡고 인사하자, 민니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내가 생각해도 믿기 어려운 충동적인 행동에 그 애는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이 좋다. 어딘가 바보같지만 그래서 순수한 그 애. 전소연이 자기 월급을 다 제한 줄도 모르고 나에게 선물이라며 큰소리치는 모습이나, 바 보같다고 놀릴 때마다 벌컥 화내기보단 멍하니 뺨을 긁는 모습 같은 게 좋았다.
도망치듯 천막으로 돌아왔을 때도 민니의 얼굴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렸다. 나는 괜히 악어 인형을 끌어안고 뒤척이다가 악악이라는 이름을 붙여버렸다. 전소 연이 내 방에 달아준 커튼 이후로 처음 받아보는 선물이었다. 잠들기 전까지도 그 커다란 눈이 날 응시하는 것 같았지만, 무섭긴커녕 포근하기만 했다. 마치 민니가 곁에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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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첫키스는 분장실 천막에서 이루어졌다. 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장소였다면 훨씬 좋았을까? 그건 아닐 것 같다. 민니가 갑작스레 입술을 겹쳤을 때, 머리가 터질듯이 달아올라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곳이 어두컴컴한 산 속이든 아름다운 폭포 위든 나는 눈앞의 민니밖에 못 봤 을 것이다. 그러니 상관없다.
“선배 괜찮아요?”
입가에 묻은 가짜 피를 닦으며 천막을 뛰쳐나온 순간, 앞에서 서성이던 우기와 맞닥뜨렸다. 우기는 날 보자마자 어디 다친 줄 알고 다가오다가 표정을 굳혔 다. 내 눈이 어느새 샛노란 금안으로 변해있어서였다. 거기에 짓이겨진 캡슐 껍질을 바닥에 버리는 것까지 보고 나서는 완전히 전후상황을 파악해버린 것 같 았다. 우기는 언제나 눈치가 빨랐다. 마치 항상 주변만 살피는 것처럼.
“민니랑 있었어요?”
우기는 그 말을 던져놓고 답도 듣지 않은 채 가버렸다. 마치 대답 듣기를 회피하는 모양새였다. 어차피 말해주지도 않을 것이었다. 뭘 했는지 뻔한 상황에, 누 구와 있었다고 스스로 인정해버리면 소문에 불붙이는 꼴이 되니까. 하지만 멀어지는 뒷모습이 은근히 신경 쓰였다. 저 작은 머리통에서, 내가 예상하는 것보 다 더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요즘 송우기 이상해.”
전소연은 날 불러놓고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리 말했다. 맞아. 맞장구치는 순간 서수진이 고갤 끄덕였다. 어릴 땐 마냥 방긋방긋 웃으며 우릴 따라다니던 아 이였다. 그 우기가 요즘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바라보는 눈빛이 어두워졌다. 왜 그럴까. 입을 열려는 찰나 소연이 둥글게 만 종이뭉치를 꺼냈다.
“일단 이건 나중에 생각하고, 다들 봐봐. 슈화가 갖다준 건데, 다음 단장은 여기서 뽑아보라고 했거든.”
아직도 이따금 생각한다. 이때 소연이를 설득해서 우기 이야기를 더 했더라면 많은 게 달라졌을까? 그 녀석이 예슈화의 꾐에 넘어가 우릴 배신하지 않았으려 나? 이제와 부질없는 추측이지만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셋은 당장 분위기가 어두워진 단원 한 명보다, 서커스단의 재정 상태를 좌지우지 할 단장을 고르는 게 더 중하다고 생각했다. 전소연과 서수진에겐 이 마지막 단장이 단순한 보험금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어쨌거나 이 젠 다 소용없게 되었다.
예슈화가 빼돌린 고객 명단엔 누가봐도 먹잇감으로 적합한 사람이 딱 하나 있었다. 직업도 수상하고, 거주지도 자주 바뀌는데다, 가족은커녕 친인척조차 없 고 무엇보다 보장금액이 가장 높은 사람. 정말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완벽한 조건이었다. 그래. 우리를 위해. 이때부터 수상함을 감지 했어야 했다. 그 사람은 예슈화가 준비한 미끼였다.
“얘로 할까?” “좋아보이네.”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던 우리는 그물에 들어가는 물고기처럼 그를 새로운 단장으로 낙점했고, 예슈화에게 통보했다. 이때 서수진과 전소연은 이미 나만 빼놓고 마지막 보험금으로 우릴 도망보내기로 작정한 상태였다. 어쩐지 단장 골라놓고 계속 내 쪽만 보더라. 전소연이 뭔갈 말할 듯 말듯 입술을 달싹이는 걸 서수진이 만류하는 장면도 봤다. 그 애는 계획을 밝히면 내가 완강히 거부할 것을 예상한 것이다. 언제나 서수진은 그렇게 똑똑하다.
단장을 고른 직후, 나는 당분간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했다. 그저 전소연이 일처리 잘하기를 바라며 공연에만 집중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런데 그건 큰 오산이었다. 민니가 나를 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너 왜 나 피해...”
그건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상황이어서, 나는 날이 갈수록 우울해졌다. 아직 그 애를 좋아하는 만큼 뭔갈 하지도 못했는데 민니는 자꾸만 거리를 뒀다. 내가 싫은가. 질렸나. 뭘 잘못했지. 매일 악어 인형을 끌어안고 닿지도 않을 질문을 중얼거리다 잠들었다. 보다못한 전소연이 김민니를 끌고오네 어쩌네 격분 했지만 그랬다간 그 애가 완전히 나를 경멸하게 될까봐 극구 말렸다.
“부단장님이 내 얘기 엄청 했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그래서 얼굴 마주치기 부끄러워서... 다른 이유는 없어요.”
하지만 막상 마주한 민니가 내놓은 이유란 허무할 정도로 단순했다. 이런 보잘것없는 이유 때문에 며칠간 마음고생했다고 생각하니 억울할 정도여서, 마구 때리며 화라도 내고 싶었다. 그런데 내 몸은 제멋대로 민니를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이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행동조차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이름 불러도 돼요?”
민니는 건방지게도 내 이름을 부르고 싶다 청해왔다. 간지럽게 미소지으며 미연아, 속삭이는 얼굴이 얄미우면서도 밉진 않았다. 이젠 나도 내가 낯설 지경이 었다.
“미연아.” “...웃지 마.”
나는 민니의 목을 감싸며 그리 속삭였고, 그 애는 대답 대신 내 쪽으로 천천히 힘을 실었다. 항상 혼자 자는 게 익숙하던 침대 위로 저항 없이 쓰러지는 순간 온몸이 끓어오르듯 뜨거워졌다. 쌀쌀하던 밤공기가 열대야의 그것처럼 뭉근하게 살갗을 스쳤고,
민니는 내 처음을 세 번째로 가져갔다. -
그날 이후 민니 앞에서만 유독 느슨해지는 날 보고 전소연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최소한 단원들 앞에선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잔소릴 들었 는데 그게 맘처럼 안 됐다. 나는 생각보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평소에 항상 억눌러가며 지내서 그런가보다고 수진이 다독여줬다.
새로운 단장이 영입된 이후 서커스단은 전에 없이 바빠졌다. 공연 준비도 준비지만, 그 가짜 단장이 하도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일은 잘 되냐고 물어오는 통에 더욱 그랬다. 가만히 늘어져있을 수는 없으니 보여주기 식으로라도 일하느라 다들 정신이 없었다. 이제 생각해보면 그것도 우릴 방해하려는 수작이었 다. 혼을 쏙 빼놔서 자길 의심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래서 공연 당일까지도 서커스단의 모두가 분주히 돌아다녔고, 전소연은 무대 뒤편에서 뭔갈 열심히 쓰고 있었다. 나는 민니에게 고함친 단원놈을 칼 던지 기 묘기에 투입하자고 조르기 위해 소연에게 갔다가 그 모습을 발견했다. 뒤에서 들여다보니 혼자만 알아볼 실력으로 그린 지도와 삐뚤빼뚤한 글씨가 보였 다. 지금은 그게 뭔지 알지만 그땐 까마득히 몰랐던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연의 등 뒤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 깜짝아!” “뭐야. 귀신 봤어?”
공장에서 벗어난 이후 평범한 사람은 상상도 못할 일들을 하도 겪다보니, 전소연은 자기를 놀래키는 것에 이골이 나 있었다. 그런 애가 화들짝 놀라며 종이를 숨기는 모습에 흥미가 동한 나는 그걸 빼앗으려 마구 손을 뻗었다. 야 안 돼. 필사적으로 뺏기지 않으려던 소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다 펜을 떨어뜨렸고, 내가 그걸 밟았다.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에 동시에 시선을 내린 우리는 반으로 두동강난 펜을 발견했다.
“...어?”
나는 대수롭잖게 여기고 새 것을 가져다주려 했는데, 부러진 펜을 집어든 소연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버렸다. 왜 그래? 가까이 다가가자 오지 말라고 손을 내저었다. 그때 저 멀리서 한 단원이 나를 불렀고, 난 의문을 품은 채 분장실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소연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전소연은 구석으로 조용히 날 불러냈다. 전에 없을 만큼 심각한 표정이었다. 옆엔 서수진도 서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 났어?” “어. 존나 큰일.”
전소연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안한 듯 사방을 경계했다. 얘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처음이었다. 덩달아 긴장해서 재촉하자 소연이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냈다. 아까 내가 밟아서 부러뜨린 펜이었다.
“뭐야. 이게 어쨌다고.”
“안에 봐봐.”
그 말에 수진과 나는 펜대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인다. 이리저리 돌리며 불빛에 비추는 순간 뭔가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원래 펜이 이렇게 생겼나?
보통 볼펜 내부는 펜촉과 스프링, 그리고 잉크 정도밖에 없다. 뭐가 더 있어봐야 겉으론 보이지 않는다. 헌데 이 펜은 잉크 튜브가 중간에서 뚝 끊겨있고 그 위엔 복잡하게 생긴 장치가 숨어있었다. 급히 끝부분을 열어보자 희한하게 생긴 사각형의 모서리가 나를 맞이했다. 부분부분 황금색으로 칠해져 있는 그것은 마치 어딘가에 꽂는 것처럼 생겼다.
“이게 뭐야?”
“나도 모르겠어. 근데 그냥 펜이 아니라는 건 확실해.”
“누가 가져왔는데?”
“...새 단장.”
우리의 시선이 동시에 객석으로 쏠렸다. 태연히 웃으며 앉아있는 단장이 보였다. 설마. 아니겠지.
“얘들아. 잘 들어. 아무래도 이상해. 무슨 일이 날 것 같아.”
소연이 우리의 어깨를 꾹 눌러잡았다.
“일단 공연은 예정대로 해야돼. 안 그러면 단장이 눈치챌 테니까. 오늘이 무사히 지나가면 밤에 저놈을 처리할 거고, 중간에 무슨 일 터지면 너희라도 꼭 도망 쳐야 해. 너넨 그럴 수 있잖아.”
“너는? 우리 없이 너 혼자 달아날 수 있어?” “...어.”
“거짓말하지 말고!”
“진정해. 나 구하자고 너희까지 붙잡힐 순 없잖아.” 나 믿어도 돼. 무조건 믿어.
소연은 애써 웃어보이며 언젠가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전혀 안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는다고, 나와 민니의 차례가 돌아왔을 때 예슈화가 사람들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그 옆에 태연히 서있는 우기를 보며 나는 지나 간 시간을 후회했다. 저 아이를 되돌릴 수많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무시한 건 우리였다.
“김민니! 뛰어!”
전소연이 다급히 외치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고, 나는 뱀의 모습으로 사람들 사이를 지나 천막 밖으로 도망쳤다. 민니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한 번 돌아 보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몸에 쓸리는 흙의 촉감이 그 어느 때보다 따가웠다.
-
나와 수진이는 경찰이 모두 철수할 때까지 풀숲에 숨어 숨을 죽였다. 예기치 못한 급습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미리 알아챘다면 전 소연이 뭘 어떻게 하라고 지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애는 지금 수갑에 묶인 채 예슈화의 손아귀에 끌려갔고, 남은 건 우리 둘뿐이었다. 우리가 어떻게든 이 상황을 헤쳐나가야 한다.
“...쫓아갈까?”
한참만에 출발하는 차들의 뒤꽁무니를 보며 수진이 그렇게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원들이 수감된 경찰서를 찾아내는 데는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차는 쉴틈없이 이동하는데 우리는 중간중간 쉬어줘야 했기 때문이다. 나보다 체력소모가 덜 한 수진이 더 넓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차들이 가고 있는 방향을 찾았고, 막판엔 우리 서커스단이 있던 위치를 바탕으로 관할 경찰서가 어디일지 유추하면서 몇 군데나 돌아다녀야 했다. 그때도 수진이가 고생깨나 했다. 나는 돌아다니면 상당히 눈에 띄지만, 수진이는 몸집도 작고 날 수도 있어서 소리소문없이 들락 날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민니랑 소연이 찾았어.”
단원들이 체포된 다음날, 수진은 두 사람이 수감된 유치장 위치를 알아냈다. 무기력하게 숨어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던 나는, 제대로 식사도 못했다는 걸 까먹 고 드디어 민니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성급히 일어섰다. 순간 머리가 띵하고 눈앞이 번쩍 빛났다.
“괜찮아?”
수진이 날 부축해 앉히며 걱정스런 시선을 보냈다. 나는 그냥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는 않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내겐 저 경찰서에 쳐들어가 민니 를 꺼내오는 것 외의 선택지가 없었다. 있어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나 혼자 어떻게 안 되려나?”
“무기도 없잖아.”
“너 무리하다가 다칠까봐 그러지. 움직일 순 있어?”
“...민니 보면 힘 날 것 같아.”
“진짜 답도 없다.”
수진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피식 웃었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진심이었거든.
하지만 우린 위치를 알아내고도 바로 침입하진 못했다. 경찰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언제 교대하는지, 나가는 경로는 어떻게 설정해야 좋은지 조사해야 했 기 때문이다. 이것도 거진 수진이 했지만 아주 어두운 밤에는 나도 함께 돌아다녔다. 우린 주로 환풍구 통로와 책장 뒤처럼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어두운 곳을 골라다니며 내부 상황을 파악했다. 때때로 수진이의 날개가루나 내 비늘 때문에 사람들이 반응했을 땐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대충 경로는 정해진 것 같은데, 시간이 좀 아슬아슬해.”
며칠간 잠도 못 자고 조사한 끝에 두 사람을 빼낼 방법을 찾았다. 다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경찰들이 교대하는 틈을 타 침입하려고 했는데, 민니와 소연이 수 감된 유치장은 거리도 꽤 멀었고 뭣보다 비는 시간이 겹치질 않았다. 한쪽의 경비가 허술해지면 다른 쪽은 이미 교대가 끝나는 식이었다. 어떡하지. 우린 바 닥에 그려놓은 도면을 보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
“...한쪽은 포기해야,” “죽이자.”
마침내 수진이 말을 꺼내던 찰나, 내가 가로막았다. 뭐? 그 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정도로 동요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항상 내가 감정을 표출하고 서수 진이 받아주는 식이었는데, 지금은 그 반대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한 얼굴로 수진을 바라보았다.
“미쳤어? 그러다 걸리면 걔네 망설임없이 발포할걸? 너 죽여서라도 막는다고.” “상관없어. 둘 중 하나도 포기 못해. 하나는 내 친구고, 하나는...”
“......”
“...민니인걸.”
사랑인데, 라고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순간 전소연이 서커스단을 만들었을 때 농담처럼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셋은 절대 사랑한다느니 그런 말 하지 말 자고. 중요한 순간에 그 단어를 입에 담으면 무조건 죽는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민니의 이름을 불렀다. 사랑이나 마찬가지인 그 음절을.
수진은 한참이나 나를 말리다가 포기했다. 정 안 되면 혼자라도 도망치라고 했더니 그제야 내 의지가 얼마나 완강한지 짐작한 모양이었다.
우린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환풍통로로 잠입했고, 첫번째 목적지인 민니의 유치장 앞 복도까지 무리없이 도달했다. 때마침 교대하려고 들어온 경찰관이 보였다. 저 사람이 중문을 열면 소리없이 뒤따라 들어갈 것이다.
“야, 이거 뭐냐? 플라스틱인가?” “아닌 것 같은데. 에취!”
재빨리 이동하다가 툭 튀어나온 돌부리에 쓸려 비늘조각이 벗겨졌는데, 멍청한 그들은 그걸 집어들고는 플라스틱이네 뭐네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수진은 그 순간에도 사방에 가루를 흩뿌리고 있었다. 저 가루를 들이마시면 한동안 끊임없이 재채기가 튀어나온다.
“뭐, 뭐야! 어디서 들어왔,”
나는 그들이 정신없어진 틈을 노려 가까이 있는 놈의 목덜미에 힘껏 달려들었고, 경찰관은 허겁지겁 총을 꺼내려다 그대로 쓰러졌다. 두번째 놈을 처치하는 찰나, 철창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는 민니가 보였다.
“......미연아.”
내 사랑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이젠 뱀의 모습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평소와 똑같이 애정을 담은 눈빛을 올려다보며, 나는 민 니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마침내, 다시 마주했다. 이제는 내게 구원임이 분명한 한 인간을.
12.
눈앞의 뱀이 미연인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직감이 말해줬다. 게다가 내 주위를 맴돌고 있는 건 세상에 둘도 없는 세 쌍의 날개를 가진 나비인 걸. 나는 무방비하게 무릎을 꿇으며 뱀과 눈높이를 맞췄다.
“미연......”
이름을 채 다 부르기도 전, 뱀의 형상이 사람의 그것으로 변모했다. 모든 과정을 낱낱이 목도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워낙 사위가 어둡고 순식간에 지나가버려 제대로 기억할 수 없었다. 뱀 대가리였던 것이 찬연한 얼굴이 되고 길다란 몸통이었던 게 가냘픈 인체가 된다. 지금껏 미연이 못 보게 했던 모습을 본다는 것 보다, 그 창백한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혼미했다.
“나 안 봐?”
미연이 살포시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봐.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들으라고 킥킥댄다. 은빛 월광만을 입은 채 내 앞에 쪼그려앉은 미연은 그대 로 철창 안에 손을 넣어 내 턱을 잡아돌렸다.
“난 너 보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어진 말에 심장이 폭발할 듯 뜨거워졌다.
“너 얼굴 빨개.”
“...나갈래요.”
“잠시만. 열쇠 있나 볼게.”
“옷도...”
“알았어.”
미연은 축 늘어진 간수에게서 옷을 탈취했다. 시간이 없으니 셔츠와 바지만 빼앗아 입었는데, 미연의 작은 몸을 헐렁하게 덮은 경찰복을 보자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이 상황에, 돌았지. 나는 괜히 뺨을 때리며 심호흡했다. 옆에서 날아다니던 나비가 날 한심하게 쳐다보는 것 같다.
“이거 맞나...?”
교대하러 들어온 놈에겐 아무것도 없었고, 쭉 이 자릴 지켰던 순경이 열쇠뭉치를 갖고있었다. 몇 개를 열쇠구멍에 꽂고 돌린 끝에 금세 맞는 것을 발견했다. 철컹 소리가 나며 유치장 문이 열렸고, 나는 반사적으로 튀어나가 미연을 끌어안았다. 안 그래도 마른 허리가 더 앙상해졌다.
“민니야. 울어?”
“아니요...”
“울지 마. 뚝.”
“안 운다니까...”
“이런 일에 울면 나중엔 어떡하려고 그래.”
미연은 녹아내릴 것 같은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그래도 감정이 가라앉질 않아서 계속 끌어안고 있었더니 나비가 우리 사이를 가로막으며 끼어들었다. 빨리 가자? 수진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조금 민망해져서 한발짝 물러나자 미연이 내 손을 잡고 중문으로 이끌었다. 약간 고인 눈물을 닦으면서 말하는데, 목소리에 물기가 배어나온다. 부끄러웠다.
“예슈화는 수진씨 빼고 다 잡아들였다고 했는데. 거짓말이었어요?”
“걔가 그래? 우리 다 잡혔다고?”
“네. 하도 자신감 넘치게 말하길래, 진짜 그런 줄 알고...”
“계산하는 거 적성에 안 맞아서 발로 뛰는 부서로 간 애가 순순히 말했겠어? 걔 말은 반 정도 허풍이야. 협박해야 술술 분다고 버릇처럼 겁주고 다니거든.” “그럼 부단장은,”
“그건 진짜고. 지금부터 소연이 구하러 가야 돼.”
미연의 손이 중문 손잡이에 닿았다. 이 문을 열면 경찰들이 돌아다니는 복도가 펼쳐진다. 마음속으론 몇 번이고 맞서 싸웠지만 막상 부딪친다 생각하니 긴장 으로 몸이 뻣뻣해졌다. 정말 총이라도 발포하면 어떡하지. 이미 둘이나 희생시켰으니 우리에게 실탄을 발사할 명분은 충분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퍼뜩 감시카메라의 존재가 떠올랐다.
“저 뒤에 시체... 누가 보는 거 아니에요?”
“카메라 깨놨어. 알아채려면 조금 걸릴 거야. 밤에는 계속 졸고 있더라고.”
“그래도 숨겨놔야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금세 발각될 텐데. 그리고,”
미연이 중문을 살짝 열고 틈새를 살폈다. 덩달아 긴장해서 숨을 죽였다. 들려오는 발소리는 없었다. 잠시 기다리자 문을 도로 닫더니 속삭인다. “이제부터 시간싸움이야. 하나하나 신경 쓸 틈 없어.”
“무서워요...”
“나랑 수진이가 있잖아.”
“다시 못볼까봐 무서워...”
“그럴 일은 없어.”
아직 중요한 말을 안 했거든.
미연은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리며 내 손을 꽉 붙들었다. 중요한 말?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곧바로 빠른 설명이 이어져서 할 수 없었다.
소연이 감금된 곳은 길게 뻗은 복도를 지나 왼쪽으로 꺾인 곳에 있다고 했다. 경찰서 출입구에서 꽤 멀리 떨어진 위치다. 나는 죽은 순경의 옷을 빌려 교대할 경찰관으로 가장해 잠입하고, 미연과 수진은 각각 뱀과 나비로 눈에 띄지 않게 따라온다. 이때 진짜 야간 교대자가 함께 들어오면 자연히 혼란이 일어날 테 고, 경찰수첩의 사진과 내 얼굴을 대조하는 순간 모든 게 발각된다.
“그때 내가 하날 쓰러뜨릴 거야. 다른 한 명도 바로 제압하면 좋겠지만 잘 안 풀릴 수도 있어.”
“그럼 그건 제가?”
“응. 소란만 못 피우게 붙들어놔.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게.”
그렇게 말하는 미연은 어느 때보다 결연하고 또 어느 때보다 멋있어서, 상황에 맞지 않게 열이 올랐다. 나는 애써 침착한 척 옷을 갈아입고 문 앞에 섰다. 미 연이 셔츠 깃을 고쳐주며 물었다.
“문 열어도 돼?” “네.”
“...뭘 그렇게 봐?”
“이제 그거 벗나 싶어서...”
“너 지금 아쉬워하는 거야?”
“아, 아니에요.”
괜히 찔려 시선을 피하자 미연이 작게 웃는다. 반쯤 얼빠진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창피해서 귀가 벌겋 게 달아오르는 찰나 경찰복이 스르륵 떨어졌다. 바닥을 내려다보자 짙은 녹색 뱀의 금안이 날 올려다보고 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밀었다. -
복도를 지나는 동안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는데도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이곳에 내 편이라곤 미연과 수진, 그리고 소연 뿐이라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내 허 리춤에 순경의 총이 매여있긴 하지만 제대로 된 사용법을 모르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고, 수진은 공격 수단이 전무하며, 전소연은 머리만 비상한 인간이다. 미 연의 독니 외에는 믿을 구석이 없다는 뜻이다. 과연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까? 미연은 정문이 아닌 지하도를 통해 빠져나갈 거라고 했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 에 누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여긴가?”
내가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수진이 문고리에 살포시 내려와 앉는다. 여기 맞구나. 등 뒤를 한 번 쳐다보고 심호흡했다. 교대자가 올 시간이 임박했으니 서둘러 들어가야 한다. 바싹바싹 타는 입안을 축이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고릴 돌렸다.
“왜 이렇게 늦게 오냐?”
유치장 앞 의자에 늘어져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며 기지개 켰다. 분명 제시간보다 일찍 왔는데. 일하기 싫어 안달난 놈이 분명하다. 어쩌면 두명을 동시에 상대할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다가가서 손을 내밀자 주섬주섬 열쇠뭉치를 건네준다.
“열쇠 받고, 어?”
“......”
“처음 보는 얼굴인데. 신참?”
“네, 어, 어제 발령받은,”
“인사는 됐어.”
다행히 이 게으른 경찰은 후임의 신상을 꼬치꼬치 캐묻는다거나 의심하는 열정까지 보이진 않았고, 몇가지 전달사항을 일러주더니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허무하게 끝나버린 대면에 정신 못차리던 나는 유치장 안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재빨리 그쪽으로 다가갔다.
“김민니. 어떻게 왔어?”
좀 전까지 쥐죽은 듯 웅크리고 있던 소연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철창에 붙는다. 자는 줄 알았더니 연기한 모양이다. 역시 전소연. 왠지 웃음이 비실비실 나왔 다. 소연이 철창 밖으로 손을 뻗어 팔뚝을 때렸다.
“웃지만 말고 설명해봐. 갑자기 경찰이 돼서 나타나냐.”
“얘긴 나중에 해요. 언제 쫓아올지 몰라. 일단 빨리...”
“누구시죠?”
섬찟 오한이 돌았다. 올 게 왔구나. 다음 교대자가 방문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마주하니 근육이 뻣뻣해졌다. 자연스럽게. 위축되지 말고 태연하게. 나 는 몇 번이고 자기암시를 건 후에야 삐걱이며 돌아섰다.
“처음 보는 분이 계시네...”
어둠 속에 얼굴을 가린 사람은 천천히 거리를 좁혀왔다. 한발짝 가까워질 때마다 손에 힘이 들어간다. 혹시 몰라 시간을 끌기 위해 유니폼 속 경찰수첩을 뒤 적이는 찰나, 어두운 구석에서 매끄러이 움직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미연이 교대자의 뒷덜미를 노리며 금안을 번쩍인다. 내 역할은 이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시선을 끄는 것. 사실 딱히 애쓰지 않아도 이미 내 쪽만 바라보 고 있다. 갑자기 등장해 우물쭈물대는 나에게 수상함을 감지한 것이다. 촉이 좋다.
“소속과 이름 좀,”
수첩을 꺼내기도 전 말이 끊겼다. 어느새 뛰어올라 목을 휘감은 녹색의 뱀이 가차없이 이를 꽂아넣었다. 살을 파고드는 독성에 감전된 듯 파르르 떨던 몸은 어느 순간 힘없이 추락했고, 내 발치로 의식 없는 손이 떨어졌다. 으. 소름끼치는 감각에 서둘러 물러섰다가 유치장 철창에 등이 닿았다.
“김민니!”
소연이 다급히 외쳤다.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시간이 없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급히 열쇠뭉치를 꺼내 하나씩 꽂아넣는데 도통 맞지를 않았다. 왜 이래. 열 개가 넘는 것들을 모조리 다 돌려보고 나서야 마지막 열쇠에서 잠금이 풀렸다. 시간은 이미 몇 분이나 지난 후였다.
“빨리 나와요. 이제 지하로 내려가야,”
그때 내 말이 뚝 멎었다. 어두컴컴하던 방 안이 순식간에 환해진 것이다. 심장 박동도, 눈동자의 움직임도 그대로 멈추고, 후덥지근한 공기에 서늘한 정적만 이 가득 찬다. 그리고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
“너 수인이냐? 쥐새끼처럼 잘도 돌아다니네.”
예슈화가 문간에 기대 서있었다. 나는 그대로 열쇠뭉치를 떨어뜨렸다.
-
당장이라도 경찰들이 쳐들어와 우릴 제압할 줄 알았는데, 사방이 잠잠했다. 믿을 수 없게도 혈혈단신으로 쫓아온 거였다. 왜? 정신 나갔나? 내가 멍청하게 눈 만 깜빡이며 바라보자 예슈화는 보일 듯 말 듯 입꼬릴 치켜올리며 푹 웃었다. 그야말로 사람 깔보는 표정으로.
“수진아.”
그러더니 갑자기 구석의 모서리를 쳐다보며 말하는 것이다. 순간 쟤가 미쳤나 싶었는데, 그 시선이 향한 곳엔 푸르고 검은 나비가 가만히 앉아있었다. 수진은 사람으로 변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단번에 발견해냈지. 집념과 애착이 뒤섞여 도사리는 눈동자는 흔들림없이 나비에게로 향했다. 마치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 형태를 박제해버릴 듯이...
“왜 그러고 있어. 나비한테 이런 곳은 안 어울려.”
예슈화는 대답도 할 수 없는 수진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한발짝, 두발짝 가까워질 때마다 나비의 날개가 조금씩 팔랑였다. 어쩌면 날갯짓이라기보다는 떠는 것도 같았다. 함께 수세에 몰린 미연도 예슈화를 공격할지 말지 망설이며 계속 동태를 살피는 듯했다. 헌데 당사자는 조금도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미연 이 덮치지 못할 거란 믿음이 있다기보다는, 뭐랄까...
나비 외엔 뵈는 게 없는 듯했다.
“수진아, 나랑 가자. 내가 안전하게 지켜줄게.” 나비는 침묵한다.
“너도 편안하게 살고 싶잖아.”
여전히 대답이 없다.
“나한테 와. 그러면 네 친구들도 보내줄 테니까.” 뭐?
예슈화의 입에서 믿기 어려운 제안이 떨어졌다. 우릴 다 잡아들였을 땐 최소한 회사에 충성하는 마음이라거나, 정의를 구현한다거나 뭐 그딴 동기가 있을 줄 알았다. 말로는 아니라고 했지만 내심 정상적인 이유가 존재할 거라 짐작했다. 그런데 뭐? 서수진이 제 품에 안기면 우릴 다 놓아준단다. 경찰도 아닌 인간이 제멋대로 들쑤시고 다니는 걸로 모자라 마음대로 풀어준다고. 그것도 주동자를. 머리에 총 맞은 제안이다.
“수 쓰지 마. 또 거짓말하는 거잖아.”
나는 예슈화가 취조실에서 떨었던 허풍을 상기하며 가로막았다. 줄곧 수진에게 꽂혀있던 시선이 그제야 들어올려진다. 까만 눈동자는 흔들림 한 점 없다. 거 짓말.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면서 누가 이런 눈빛을 띠고...
“수진이한테는 거짓말 안 해.”
예슈화는 아무 근거도 없이 자길 믿으라 요구했다. 원래대로라면 바로 밀치고 반박해야 마땅했다. 헌데 쉽사리 부정의 말이 나오질 않았다. 수진이한테는 거 짓말 안 해. 수진이한테는. 저 속이 진심일까 거짓일까? 진심이라면 난 어떻게 대처해야 하지?
“거래할래?”
혼란스러워진 찰나, 회유하는 목소리가 모든 생각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거래. 예슈화는 이미 그것을 두 번이나 파기했다. 첫번째는 서커스단과 관련된 것이 고, 두번째는 전소연을 볼모로 한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지금 저 입에서 나오려는 말. 신뢰도가 바닥친 마당에 뭘 거래할 수 있을까.
“우린 이미 한 번 협상에 실패했잖아. 조건이 너무 복잡해서 니가 생각을 포기했나 싶었거든. 그러니까 이번엔 단순하게,”
“......”
“수진이 넘겨. 그럼 최선을 다해 너희 존재를 덮어줄게.”
이번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조건이다. 일대일 교환, 하나를 주면 하나를 얻는다. 어떤 함정이나 패널티도 없다. 이론적으로는. 하지만...
“야, 꺼져.”
바로 옆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거절하려던 나조차 놀라 돌아보니, 소연이 유치장 문을 열고 걸어나오고 있었다. 철창살을 틀어쥔 한쪽 손이 하얗게 질려있다. 내가 말리는 것도 뿌리친 채 예슈화에게 다가간다. 순간 소연이 주먹이라도 휘두를 줄 알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내뱉어진 말은 주먹보다 치명적인 것이었다.
“수진이가 너한테 가면. 여기 갇히는 거랑 뭐가 달라?”
“...뭐?”
“아니, 아니지. 차라리 여기가 낫지. 너는 수진이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잖아. 안 그래?”
예슈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말 말려야 한다. 지금 저녀석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
나는 둘 사이를 가로막기 위해 한걸음 내딛었다. 가능하면 예슈화를 제압하고 달아날 심산이었다. 일단 말로 해결하려는 척하며 정신을 빼놓은 뒤에,
“아...!”
갑자기 눈앞으로 길다란 그림자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동시에 예슈화가 손목을 움켜쥐고 비틀거렸고, 조명이 암전한다. 급작스러운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눈 이 초점을 잃고 방황했다. 정전인가? 당황하며 전소연의 손을 찾아 잡는 순간, 발목을 휘감는 비늘의 촉감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미연이 이 상황을 만들었다는 걸. “멈춰!”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예슈화가 전등 스위치를 누르고 비상벨을 울렸다. 장내에 귀를 찢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퍼졌다. 자고 있던 사람도 곧바로 일어날 듯한 굉음이었다. 망할. 전소연은 연신 욕을 내뱉으며 어깨에 나비를 얹은 채 앞서갔고, 나는 미연이 벗어놨던 옷가지를 챙긴 뒤 뱀을 쫓아 달렸다.
“야! 저새끼들 잡아!”
벌써부터 추격이 붙었다.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마구 계단을 밟아내려가는데 층계참 위에서 쩌렁쩌렁한 고함이 들렸다. 잡히면 끝이다. 본능적인 예감 에 다리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미연은 힘들지도 않은지 뱀의 모습을 하고서도 가장 빠르게 움직였다.
“지하통로로 내려갑니다!” “능구렁이 같은 새끼들이...”
어지러이 메아리치는 대화 속에서, 언뜻 ‘발포를 허가한다’라는 문장을 들은 것 같았다. 온몸에 오한이 끼쳤다. 내가 맞는 것보다, 지금 함께 도망치는 이들 중 누구라도 다치는 걸 보면 과연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두려웠다. 언제라도 총성이 터지고 피가 튈 것만 같다. 무서워. 패닉에 빠져 발을 삐끗하자 전소 연이 소리지른다.
“김민니, 정신차려!”
“발포... 허가한다고...”
“그러니까 더 빨리 뛰어야지. 저 앞에 문 안 보여?”
과연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육중한 철문이 도사리고 있다. 저곳을 통과하면 탈출로가 펼쳐지는 모양이다. 뒤에서 우르르 쏟아져내려오는 발자국 소리와, 저 멀리 어둠에 파묻혀있는 한줄기 희망. 나는 이악문 채 앞만 보고 내달렸다. 공포라는 감정은 생각보다 거대해서, 마치 다리에 총상을 입은 듯 사람을 옥죄었 다.
“이거 잠겼는데?”
소연이 문 손잡이를 철컥철컥 돌렸다. 안 열려. 한시가 다급한 상황에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뒤쪽에선 온갖 고성과 소음이 점점 거리를 좁혀왔고, 이제 완 전히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미연이 문 아래로 사라졌다. 다급히 몸을 숙이니 정말 팔뚝만 간신히 통과할 듯한 틈이 있었다. “미연아, 미연아?”
불안함에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것은 정적. 잠시 후, 철커덕 하며 뭔가 엇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손잡이를 돌려보니 문이 아가리를 벌린다. 미연이 바깥쪽에서 잠금장치를 해제한 것이었다.
“빨리 와, 이거 잠가야 돼!”
소연은 날 끌어당긴 다음 도로 철제 빗장을 질러넣었다. 한발 늦은 경찰들이 험한 욕설을 뱉으며 발로 문을 쾅쾅 걷어찼다. 잠시 그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 는 나를, 전소연이 힘껏 끌어당겼다.
우린 시커멓고 축축한 지하도를 쉴새없이 달렸다. 유사시에 은밀히 쓰는 통로인지, 관리가 안 되어 곰팡이 냄새로 가득하다. 바닥엔 웅덩이가 있어서 뛸 때마 다 바지에 물이 튀었다. 하지만 옷 더러워지는 것보단 미연이 더 걱정되었다. 추우면 어떡하지, 감기 걸리면 어떡하지 뭐 그런 염려들. 이 상황에서조차 머릿 속은 미연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속도가 느려질까봐 한마디도 못 꺼낸 채 달리길 십여 분, 드디어 구불구불한 통로가 끝나고 빛이 보였다. 숨차올라 터질 듯한 가슴을 진정시키며 지하도의 끝 으로 달렸다. 이제 나갈 수 있어. 달빛처럼 스며드는 희망에 미소까지 떠오르던 찰나, 우린 우뚝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왜, 왜 여기도 창살이 있는 거야...”
소연이 망연자실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지하도의 끝에는 유치장의 그것보다 훨씬 두껍고, 훨씬 단단해보이는 창살이 경계를 가로막고 있었다. 마치 두 번 다시 태양빛을 받을 수 없을 거라고 선언하는 듯한 위용으로,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닿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차단한다. 잠시나마 피어올랐던 희망이 손에 잡히지도 않은 채 흩어진다.
“미연아.”
나는 힘없이 미연의 이름을 불렀다. 뱀의 눈이 이쪽을 향하더니 이내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온다. 할 말이 있냐는 듯 물끄러미 날 올려다보는 검은 눈동자가 보인다.
“미연아...”
나는 다시 한 번 읊조리며 손에 든 셔츠를 미연의 등에 덮어주었다. 등 뒤에선 문을 여는 것인지 부수는 것인지 모를 소음이 점점 크게 울리고 있었다. 이제 조 금 있으면 저들이 들이닥치고, 나의 자유는 아주 오랫동안 구속될 것이다. 유년시절의 악몽을 되새겨주는 좁은 공간에서 끝없이 기억에 매달려 살아가겠지. 나는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미연은 그리 놔둘 수 없다.
“미연아, 넌 이 틈으로 빠져나갈 수 있잖아.”
“......”
“수진씨랑 둘이서라도 도망쳐요. 우리가 시간 끌 테니까, 빨리 가요.”
내 사랑은 답이 없다. 언제까지고 열리지 않을 듯한 입술로 조용히 침묵을 지킨다. 분명 고민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함께 쌓아올린 감정과 앞으로 펼쳐질 미 래 중 후자를 선택하기 위한 긴 과정 속에 놓인 거라고 짐작했다. 결국 고갤 끄덕이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떠날 거라고,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고 지레 결 론지었다.
“싫어.”
하지만 미연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히 내 말을 거절했다. 싫다고. 확인사살까지 한 뒤 셔츠 단추를 잠그며 일어선다. 작은 몸을 덮은 헐렁한 옷 틈으로 밤바람 이 들이친다. 감기 걸릴 텐데. 나는 미연을 끌어안으며 마지막으로 체온을 나눠주려 했다. 헌데 미연은 내 팔뚝을 잡아 가로막았다.
“너 두고 어딜 가.”
“...그치만 나는,”
“이깟 포옹 앞으로 천 번도 더 할 거야. 그러니까 말 함부로 하지 마.”
찰나였지만 미연의 말투 속엔 애정에서 비롯한 원망도 느껴졌다. 이런 어조는 처음 들어본다. 그제야 내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애써 숨기려 하지만, 미연은 끔찍이도 싫어하고 있었다. 내가 그린 미래를.
하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저 견고한 철창을 어찌 파괴한단 말인가. 나와 소연은 저 사이로 통과할 수도 없고, 아득히 들려오는 파괴음은 점점 커지기만 했다. 대체 어떻게 이 상황을...
그때 미연이 눈가를 닦으며 돌아섰다. 언뜻 바라본 눈동자가 금안이다. 내가 또 울렸구나. 마음이 불편하고, 심장은 뚝 떨어지는 것 같다. 금방이라도 휘청일 듯한 작은 등을 끌어안고 싶어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나 방해하면 안 돼.”
미연이 검은 손톱으로 철창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미연은 한눈에 봐도 무리하고 있었다. 이마엔 핏대가 뚜렷이 불거지고, 금안은 고유한 색이 다 가려질 정도로 붉게 충혈됐다. 비늘이 감싼 왼팔은 멀리서 봐도 알아챌 만큼 바들바들 경련하고 있었다. 안 돼. 말리려고 달려드는 순간 소연이 온몸으로 날 막았다.
“놔!”
“미연이 하는 대로 놔둬.”
“저러다 다친다고!”
“여기 있어도 똑같이 다쳐! 아니, 더 심하겠지. 니 입으로 쟤네가 발포 허가했다 그랬잖아!”
소연은 날 놔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미연은 안간힘을 써가며 신음했다. 언제까지고 건재할 것 같던 검은 손톱이 반쯤 들리고, 그 밑으로 시뻘건 핏물 이 새어나왔다. 가느다란 몸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붉은 액체에 눈이 반쯤 뒤집힐 지경이었다. 저러다 미연의 몸이 완전히 상해버릴 것만 같았다. 안 돼. 다 치지 마. 피가 너무 많아. 움푹한 곳에 웅덩이를 이루었다가 끝내 내 신발코까지 흘러오는 핏줄기가 꼭 경고처럼 보였다. 미연이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경 고.
“놓으라고!”
마침내 소연을 뿌리치고 달려갔을 때, 그 굳건하던 철창은 반쯤 일그러져 휘어진 채였다. 하지만 그걸 보고도 기뻐할 수 없었다. 미연이 그만큼 타격을 입었 으니까.
“하지 마!”
금안에 고여있던 눈물이 마른 뺨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린다. 미연의 팔을 붙들었지만 어찌나 단단히 마음먹었는지 도저히 떼어낼 수가 없었다. 원래 힘이 이 렇게 셌나. 당황스러워 허리를 감싸 품으로 끌어당기는 순간이었다.
“열렸습니다!”
철문이 무너졌다. 한 무리의 경찰들이 이쪽으로 달음질치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몇 분 후면 이곳에 당도할 것이다. 제발 그만해. 애원하듯 외치며 미연을 끌 어안았지만, 왼팔엔 더욱 단단히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미연아...”
창살을 거진 다 부수었을 때, 미연의 손은 완전히 붉게 물들어버렸다. 녹색 비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촘촘히 피부를 뒤덮은 핏물에 꼭 내가 다친 것 같았다. 싫어. 하지 마. 너 아프잖아. 무슨 말하는지도 모르고 어린아이처럼 떼쓰는 나의 모습은 아마 퍽 꼴사나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딴 거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저기있다, 잡아!”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틈이 만들어졌다. 그와 동시에 경찰들이 코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릴 발견하자마자 총구를 겨누는 놈들도 몇 있었다. 그 시커 먼 구멍을 보는 순간 미연을 도망 보내야 한다는 생각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지르며 미연의 몸을 밀었다.
“빨리 나가, 얼른!”
수진은 이미 철창 틈으로 빠져나가 풀숲에 숨어들었고, 미연도 그 뒤를 따랐다. 나는 사색이 된 소연까지 바깥으로 밀어낸 후 허겁지겁 움직였다. 틈이 좁아 서 옷과 다리가 자꾸만 걸렸다. 억지로 발을 빼내다가 날카로운 쇠붙이에 종아리 전체가 베여버렸다.
“으...”
“민니야! 괜찮아?” “아, 아파...”
미연은 한쪽 팔에 피칠갑을 하고도 나부터 걱정했다. 손을 맞잡고 풀숲을 헤쳐달리며 자꾸만 서로의 상처를 살핀다. 이젠 날 선 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금안 이 계속해서 내 다리에 머무른다. 미연은 다행히 뛰는 데 지장이 없었지만, 나는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베인 곳이 욱신거려 속도가 느려졌다. 이대로 가다간 미연까지 잡힐지도 몰랐다.
“먼저 가요...”
“내가 그런 말하지 말랬지!”
깍지 낀 손을 빼내려 하자 미연이 무섭게 으르며 날 끌어당겼다. 정신 차려야 하는데. 높게 자라난 풀들이 자꾸만 상처를 간질이고, 소연과 수진은 어느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미연의 팔에선 자꾸만 피가 흘렀다. 경찰을 피해 어둠 속으로 뛰어들 때마다 다리의 통증이 심히 들끓었다. 눈에 똑바로 힘을 주려 해 도 정신은 제멋대로 몽롱해져만 갔다. 무서워. 언제라도 큼직한 손이 내 어깨를 잡아누를 것 같았다. 어깨를...
탕!
그때 한 발의 총성이 나를 관통했다. 내 청각을 꿰뚫고, 육신 또한 꿰뚫었다. 왼쪽 어깨에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순간적으로 몸에 힘이 풀려 풀숲에 쓰러져버렸다. 미연이 다급히 돌아와 내 몸을 끌어안는다.
“민니야. 일어나. 김민니...”
혹여 위치가 발각될까, 내 이름조차 숨죽여 속삭이는 미연은 이제 완전히 울고 있었다. 한때 마냥 사나워보이기만 했던 금안은 내 얼굴을 담는 순간 달보다 유약한 것으로 변모하고, 가냘프기만 했던 몸은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 아주 포근한 안식처가 된다. 머리론 당장 일어나 뛰어야 함을 아는데, 여러 번 충격을 겪은 신체는 자꾸 힘없이 늘어지기만 했다. 안 되는데. 미연이 나 버리고 못 갈 텐데.
“민니야...”
미연이 내 뺨을 붙들고 계속해서 쓸어내렸다. 정신 차려봐. 그 말에 미약하게나마 대답했던 것도 같다. 내가 뭐라고 했었지. 어쨌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채 끝마치지도 못하고 무의식에 침잠했으니까.
눈을 감기 전 마지막 촉감은 내 몸이 어딘가로 끌려가는 것이었다. -
나는 끊임없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드나들었다. 이따금 정신이 들었을 때 내가 어딘가에 누워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그곳은 아주 어둡고 축축해서 순간 적으로 지하통로에 다시 끌려갔다 착각하기도 했다. 결국 또 붙잡혔구나. 몽롱한 와중에도 밀물처럼 덮쳐오는 절망감에 그대로 잠들어버렸던 것 같다.
“......”
잠시 후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저 멀리 어딘가에서 어수선한 소음이 들려왔다. 뭔가가 풀숲을 스치는 소리, 강물이 흐르는 소리, 사람이 걷는 소리, 뛰는 소 리, 그러다 넘어지는 소리, 다급한 비명과 숨 넘어가는 소리... 일련의 소음들이 귀를 간지럽히고 나면 한참 적막이 흘렀다. 그랬다가도 금세 언제 조용했냐는 듯 비스무리한 자극이 들려오는 것이다. 중간중간 욕설과 고성이 환청처럼 뒤섞이기도 하면서.
미연아...
나는 다시금 잠에 빠지며 그 이름을 불렀다. 사랑한다고 제대로 말해준 적도 없는데. 부끄럽다는 이유로 차마 입밖에 내지 못했던 감정의 파편이 계속해서 맘 을 맴돈다. 미연아. 이제는 내가 중얼거리는 건지 속으로 되뇌는 건지도 모르겠다.
조미연......
어지러운 의식 속에 세 글자가 끝없이 메아리친다. 온몸에 힘이 빠진다. 귓가에 뭔가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13.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다.
사실, 정말로 아주 오래되었나? 물으면 확실히 대답할 수 없었다. 굳이 날짜를 세지 않았으니까. 함께하는 시간 동안 행복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쓸 틈이 없다. 달과 태양이 떠오르고 저무는 횟수 따위 눈앞에 햇빛 같은 사람이 있으면 하등 쓸모없는 것이 된다. 지금 내 생활이 그랬다.
“민니야. 호수 근처에 꽃 피었더라.”
미연이 침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작은 바구니를 흔들었다. 손짓에 따라 처음 맡는 향기가 은은히 퍼졌다. 또 따왔구나. 읽던 책을 내려두고 팔을 벌리자 가 느다란 몸이 순식간에 뛰어들었다.
“너 주려고 가져왔어.”
“같이 보러가는 게 더 좋아.”
“여기서도 보고 산책도 하면 되지...”
미연이 입술을 삐죽였다. 자기는 삐졌다는 티를 내는 건데 보는 입장에선 영 다른 마음만 들어서 곤란했다. 내 눈길이 입술에서 벗어나질 못하자 잠시 얼굴 붉히던 미연이 바구니로 머리를 툭 때렸다.
“아파요.”
“이럴 때만 존댓말이지 너.”
“미안해.”
말끝을 늘이며 안기자 곧 부드러운 손길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미연은 내가 존댓말을 할 때면 옛날 기억이 떠올라 약해지곤 한다.
몇 년 전의 서커스단은 우리 추억 속에만 잠들어 있었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남긴 흔적은 이제 정말 몇 남지 않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두막 옆에 작게 지어 놓은 천막의 구조나, 내가 미연에게 선물했던 악악이를 모방해 만든 어설픈 인형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때를 회상할수록 복잡하게 얽혀있던 안 좋은 기억까지 떠올라 일부러 모조리 정리해버렸으니까.
하지만 단 한 가지 정리할 수 없는 게 있었다. 내 왼팔이다. 탈출할 때 왼쪽 어깨를 총에 맞은 후유증으로, 나는 왼팔에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입었다. 병원을 가지 못해 미연이 임의로 치료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움직일 때 조금 불편하다는 것을 빼면 손을 높이 들 수 없는 정도의 가벼운 후유증임에도, 미연은 이따금 눈시울을 붉히며 미안해했다. 사실 의사에게 치료받지 않고 이정도로 회복한 게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 점을 계속 강조해도 미연이는 죄책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방법은.
“민니야. 너 팔...”
“사랑해.”
미연이 그 얘길 꺼낼 때마다 이런 식으로 묻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힘주어 끌어안고 이마에 입맞추자 부끄럼도 많은 내 사랑은 황급히 방을 나가버렸다. 푸흐흐. 바보처럼 실실 웃음이 나왔다. 지금도 내가 왼손으로 꽃바 구니를 치우려다 팔이 안 뻗어나가는 바람에 오른손으로 바꿔들자 표정이 안 좋아지던 참이었다. 아침부터 산책 잘 다녀와놓고 또 울겠다 싶어서 얼른 사랑 퍼부어줬다. 그랬더니 효과가 좋다.
“미연이 바보.” “혼난다!”
최근엔 미연이 내게만 하던 바보 소리를 시도해보고 있는데, 반응이 아주 귀엽다. 서커스단 시절엔 사람한테 벽 세우느라 저렇게 마음껏 감정 표출도 못했던 걸 생각하니 안쓰럽기도 했다. 뭐, 이제 나랑만 있으니까 상관없나. 미연은 요 근래 얼굴이 완전히 폈다.
나는 책을 덮어서 책장에 꽂아놓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이래봐야 침실과 욕실을 짓고 남은 작은 공간이긴 하다. 집이 너무 작은 것 같아 설계를 공부하는 중 이지만 증축은 생각보다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미연에게 약속한 기한 내에 집을 못 넓힐 것 같아서 눈치 보는데, 정작 본인은 완전히 까먹었는지 재촉도 않았 다. 요즘 미연의 최대 관심사는 다른 데에 있었다.
“민니야, 이거 봐. 잎은 향신룐데 줄기는 염색약 같아.”
식탁에서 뭘 하나 했더니, 방금 채집해온 꽃을 해부하고 찧어보고 향기까지 맡는 중이다. 그러더니 나도 맡아보라며 잎 한장을 팔랑팔랑 흔든다. 코끝에 갖다 대자 알싸하면서도 상큼한 냄새가 퍼졌다.
“또 백과사전에 하나 추가하겠네.” “그럼. 약효도 있으려나?”
미연의 요즘 관심사는 식물이었다. 그냥 관상만 하는 게 아니라 거의 책을 쓸 기세로 연구하고 있었다. 내가 과거에 크게 다쳤을 때, 지혈할 천이 모자라서 근 처의 풀을 엮어맸는데 그게 은근히 회복속도를 높였단다. 그 일을 계기로 식물에 흥미가 생긴 미연은 요즘 산책 나갈 때마다 처음 보는 꽃이나 풀들을 몇 가 지씩 캐와서 이곳저곳 응용하곤 했다. 성공률은 들쭉날쭉해서, 어떤 날은 집안에 향기가 가득했지만 어떤 날은 미각이 마비되기도 했다. 그럼 미연은 그걸 종 이에 그림과 함께 기록해서 차곡차곡 정리해놓았다. 민니의 열을 내리는 데 효과가 있었다. 민니가 맡아보더니 향이 좋다고 했다. 민니가 맛이 이상하다고 밥 을 다 남겼다. 이런 식으로.
“염색도 돼?”
“응. 봐봐. 손톱에 바르고 있었더니 물들었어.”
미연이 자랑스럽고 뿌듯한 표정으로 왼손을 내밀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정말로 옅은 푸른색이 감돈다. 꼭 화창한 대낮의 하늘 같은 색이다. 근데 이거... “멍든 것 같다.”
“야!”
손가락으로 배를 쿡쿡 찌른다. 간지러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미연의 손길이 좋아서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이렇게 놀릴 수 있는 것도 미연의 손톱이 원래대로 돌아왔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날 때부터 검은색인 줄 알았던 그것은 알고보니 공장에서의 사건 때문에 변 색된 거라고 했다. 그런데 지하도 철창을 부수는 과정에서 손톱이 모두 빠졌고, 약초로 적절히 관리해준 덕에 다시 말짱한 분홍빛을 띠게 되었다. 무시무시한 위력은 여전하지만 겉보기엔 내 것과 완전히 똑같아진 그것을 미연은 꽤나 마음에 들어했다. 돌연변이 같은 점이 줄어들어 좋다나. 미연이 그리 말했을 때 나 는 이렇게 반박했다.
“나는 네가 남들과 달라서 좋아. 그 손톱으로 나를 구했잖아. 비늘도 예쁘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때 미연이 뭐라고 답했더라. 얼굴을 붉힌 건 확실히 기억난다. 여하간 그 대화 이후 미연은 더 이상 자신의 비늘과 금안 같은 것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금안은 내가 보여달라고 조르기도 한다. 밤이나, 밤에...
“너 또 이상한 생각하지.”
물끄러미 손톱 구경하다가 엄한 데까지 뻗은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봤는지, 미연이 놀리는 투로 말했다. 내 턱을 한 손으로 쥐고 강아지 다루듯 살살 쓰다듬는 다. 이러면 진정은커녕 더 자극만 되는 걸 미연도 뻔히 안다. 알면서 이런다.
“지금 아침인데.”
“널 누가 말려?”
“니가 유혹하고 있잖아.” “맞아.”
미연이 예고없이 몸을 일으켜 내 다리 위에 걸터앉았다. 목을 감싸안고 내려다보는 눈이 어느새 금안이다. 옛날엔 어떻게 이걸 다 감추고 살았대. 농담하듯 흘리자 귓가에 입술 바싹 붙이며 속삭이는 말.
“그래서 나 맨날 더워했잖아. 몰랐지?”
“......”
나는 미연을 번쩍 안아들고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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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뒤엉켜 있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다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밤이었다. 점심도 거르고 저녁 늦게까지 잠들어버린 것이다. 밖에서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새콤한 음식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옆자리를 짚어보니 휑했다. 미연은 이럴 땐 은근히 부지런했다.
“잘 잤어?”
“아니...”
나는 칭얼거리며 미연의 등을 끌어안았다.
“또 그 꿈이야?”
“응. 기분 안 좋아.”
“언제쯤 그 꿈을 안 꿀까...”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위로처럼 내려앉았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악몽의 불쾌감은 가셨지만 완전히 개운하진 않았다.
탈출에 성공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까지 그때 꿈을 꿨다. 내 몸이 축축한 바닥에 뉘여있고 사위는 칠흑처럼 캄캄하다. 움직이려 하면 할수록 몸은 뻣뻣해지고, 입을 열어도 소리낼 수 없다. 미연아. 마음속으로 미연을 애타게 찾지만 사랑하는 그 얼굴은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수많은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발자국 소리, 그들이 나를 찾으며 고함치는 소리, 수백 마리 뱀이 땅을 기어다니는 소리만이 점점 증폭되어 감각을 마비시킨다. 뱀의 소음이 커질수록 인간의 발자국 소리는 잦아들고, 끝내는 수백마리 독사가 내 전신을 휘감으며 끝이 난다.
어쩔 때는 간신히 잊고 있던 사람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연신 눈물을 닦으며 날 원망하는 송우기와, 그 옆에서 뭔갈 계속 속삭이는 예슈화. 그러다 서수진이 등장하면 꿈의 배경은 갑자기 들판으로 탈바꿈한다. 예슈화의 손에는 어느새 작은 철창이 들려있는데, 아무리 작은 생물도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할 정도 로 촘촘하다. 수진은 인간의 모습이든 나비의 형상이든 아주 먼 곳으로 날갯짓해 사라지고, 예슈화는 철창을 든 채 그 뒤를 쫓는다.
마침내 나와 우기만 남으면 우리가 서있는 곳은 들판에서 천막 내부로 변한다. 그 옛날 내가 종종 들락거렸던 전소연의 사무실이다. 익숙한 주홍빛 천막과 간 소한 가구를 살펴보고 있노라면, 향수에 젖을 틈도 없이 사무실 주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민니야, 앉아.
그럼 우기는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하는 것이다.
저는요? 제 자리는 없어요?
너는 가서 소품이나 날라.
현실의 소연보다 백 배는 냉정해진 환상이 그리 말하는 순간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광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거짓말. 전소연 너는 단장 자격도 없어. 내가, 내가 증명할 거야. 내가...!
송우기는 답답한 듯 가슴팍을 퍽퍽 치면서 고함지른다. 동그란 뺨에 흐르던 눈물은 점차 메마르고, 전소연의 사무실이던 풍경이 어느새 유치장 내부로 변한 다. 내 손에는 언제 채워졌는지 모를 쇠사슬이 아주 묵직하게 매달려있다. 다급히 고갤 들어보면 송우기는 언젠가 미연이 단장을 죽일 때 사용했던 낯익은 단 도를 든 채 내게 달려오고 있다.
안 돼...!
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유치장 문을 박찬다. 놀랍게도 그것은 잠겨있지 않다. 간신히 빠져나가는 순간 송우기의 칼이 내 어깨를 스친다. 꿈 속임에도 통 증이 선명하다.
나만 두고 가지 마...
송우기는 철창 문 앞에 무릎꿇은 채 그리 말한다. 문 열려있잖아. 내가 의문을 품고 속삭여도 그 애는 따라나오지 못한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송우기를 가 로막고 있는 것처럼, 그 녀석은 끝끝내 유치장 안에 붙박인 듯 머무를 뿐이다.
나는 이 일련의 꿈들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특히나 두번째 꿈은 깨어날 때마다 식은땀이 흥건할 정도로 두려웠다. 우기를 마주 대하는 것이 두렵고, 전소연과 서수진을 회상하게 되는 것이 싫었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언젠가 신문을 통해 접했던 부단장의 소식을 제외하곤 아는 것이 없었다.
소연은 탈옥 시도 끝에 다시 붙들려 재판에 회부되었다. 가중처벌은 받겠지만, 살인사건의 주범이 아니라 형벌은 그리 세지 않을 거라고 했다. 게다가 체포된 단원들도 조사에 협조하지 않거나 아는 게 아예 없어서 대부분의 혐의가 증거불충분이었다. 신문 칼럼은 전소연이 아닌 주동자, 즉 적극적으로 범죄를 실행 한 조미연이 가장 주요한 인물이라고 지적하며 그를 체포하는 게 우선이라 주장했다. 당연히 여론은 들끓었지만, 소연이 내가 걱정한 만큼 오랜 시간 수감될 가능성은 낮아보였다.
하지만 그 사실도 내게 큰 위로가 되진 못했다. 어차피 전소연이 풀려날 때쯤이면 우리의 거취에 대한 실마리는 모조리 사라져있을 것이고, 송우기도 예슈화 도 서수진도 어디서 뭘 하는지 알 수 없다. 다시 만나고 싶어도 우리가 철저히 숨어 지내는 이상 연락할 방도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쪽에서 온갖 위 험을 무릅쓰고 도시에 가기도 어렵다. 결국 평생 그들을 그리워하고 궁금해하며 꿈에서나 만나야 한다. 그것도 악몽처럼 끔찍한 방식으로.
나는 한숨을 내쉬며 미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평소같으면 간지럽다고 쳐낼 텐데 이번엔 반응이 없다. 내가 무슨 얘길 할지 짐작한 모양이다. “미연아.”
“...응.”
“그날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주면 안 돼요?”
“안 돼.”
미연은 단호하다. 내 말이라면 쉬이 내치지 못하는 사람이 이리 나올 때면 절대 말을 번복하는 법이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미연을 놓아주었다.
그날, 우리가 탈옥에 성공했던 날, 나는 아직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반쯤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나를 미연이 어떻게 구해냈는지, 수많은 추격자들은 대체 어떻게 따돌렸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자꾸만 그곳에 누워있는 악몽을 꾸는 것이다. 마음속에 남은 의문을 풀어보려는 듯, 내 머리는 계속해서 그 순 간으로 기억을 되돌렸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다. 내가 답답함에 목을 움켜쥐고 잠에서 깨어나는 것.
미연은 그럴 때마다 심히 걱정하면서도 진실을 말해주진 않았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안 한다기보다 못 한다는 게 맞을 것이다. 초조히 입술을 달싹이면서도 끝내 삼키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어느정도 짐작이 간다. 내가 완전히 정신을 차렸을 때 누워있던 곳은 산 속 깊은 곳에 숨겨진 캄캄한 동굴이었다. 미연은 입가에 채 씻어내지 못한 피를 묻힌 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고, 공기중엔 비릿한 악취가 은은히 퍼져왔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빠져나와 숲 속을 이동하면서 계속 기시감이 들었 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 마치 이전에 왔던 곳과 흡사한 듯한 그 굴의 분위기...
신문에서 우리의 탈옥 직후 다수의 경찰관이 실종되었다는 기사를 봤을 때, 나는 질문을 덮어두기로 했다.
물론 지금처럼 불쑥불쑥 묻고 싶은 충동이 이는 적도 많다. 특히나 악몽을 꾼 직후엔. 미연이 언제쯤 속시원히 털어놔줄까 기다리면서 가끔씩 찔러보곤 한다. 매번 거절당하지만, 그래도 언젠간 말해줄 거라는 희망이 있다. 예를 들어,
“나 힘드니까 뽀뽀해줘요.”
내가 이렇게 칭얼거릴 때. 미연은 안쓰럽고 미안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면서 내 얼굴을 쓰다듬고는 한다. 좀 더 밀어붙이면 끝내 웃음을 터뜨리지만, 표정 에서 불편함이 가시지는 않는다. 슬슬 한계에 다다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계속 옆을 지키다보면 말해줄 것이다. 내가 그날의 전말을 듣고도 미연의 곁을 떠 나지 않을 것을 확신하면...
여하간 지금 당장은 아니다. 나는 입술과 뺨에 여러 번 입맞춤을 받고서야 미연에게서 떨어졌다. 냄비에 오늘 아침에 따온 꽃잎을 뿌려넣는 모습을 보다가 오 두막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