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댄이라더니, 역시 잘 따라오네."



성현의 칭찬에 우영이 산을 한 번 흘긋 돌아본다.



"아유, 잘 해야죠. 어떤 분이 가르쳐주신 건데."



대선배에게 간택 받은 행운의 주인공, 데뷔 2일차 신인 정우영과 최산은 지금 챌린지의 메카 3층 로비에 서 있었다.



"지원이도 이틀 꼬박 걸렸던 안문데. 역시 요즘 친구들 장난 아니라니까."

"야, 이틀은 무슨. 그리고 너보단 빨리 외웠거든?"



주위의 모든 게 비현실적인 공간이었다. 눈앞에서 아웅다웅하는 레비아탄의 멤버들. 각양각색의 착장으로 대기실 드나드는 아이돌들. 그런 연예인 따위 하나도 새로울 거 없다는 듯 바쁘게 오가는 제작진과 스텝들까지. 우영은 그제야 자신이 연습생 시절 그토록 갈망했던 세계에 들어섰음을 실감했다.



"바로 준비해줬는데 미안해서 어떡하지."



갑작스런 PD의 호출에 지원은 적잖이 난감한 모양이었다. 하긴 갓 데뷔한 아기들이 십분간 온 힘 다해 딴 안무가 물거품이 되게 생겼으니, 실망할까 걱정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아녜요.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요."

"아니면 여기서 잠깐만 연습하고 있을래? 조명 확인만 하는 거면 삼십 분 안엔 끝날 것 같은데."

"그래, 그럼 되겠다. 너네 리허설까지 시간 꽤 남았다 그랬지?"



우영과 산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30분이 아니라 3시간도 기다릴 수 있었다. 챌린지 무산되는 것보다야 무한정 대기하는 게 나았으니까. 갓 데뷔한 신인에게 이보다 좋은 기회가 있을까. 어마어마한 팔로워 거느린 레비아탄의 채널에 이름 올리고, 대중들에게 얼굴 도장도 확실히 찍게 될 것이다. 짧은 영상 하나로도 극적인 성공이 가능한 세계였다. 그거 잘 아는 우영은 그냥 사람 좋게 웃었다.



"에이, 저희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다녀오세요. 산이랑 저랑 열심히 맞춰보고 있을게요."



막힘 없이 호쾌한 대답에 지원이 웃음을 터뜨린다. 하하. 볼수록 참 매력있네 이 친구. 그래 좋아. 이따 챌린지도 시원시원하게 부탁할게. 그렇게 떠나려다 말곤 멈춰서서 한 마디 덧붙이는 거였다.


아 참,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도 돼.


형이라고 불러도 돼.

형이라고 불러도 돼.

형이라고 불러도 돼.


네? ... 제가요? 우영은 그대로 눈 동그랗게 뜨고 얼어붙었다. 지원은 대답 대신 어깨를 툭툭 친 뒤 지나가버렸다. 모르긴 몰라도 이건 곧 '너 합격' 증표나 다름 없는 듯했다. 그래. 큰 고비는 넘긴 거야. 게다가 레비아탄의 멤버와 친해져 손해 볼 일은 없지 않은가. 제게 손 흔들며 멀어지는 인영이 끝내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우영이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지난 삼 개월간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과연 전국민이 투표해 구성한 아이돌답게 오션나인의 밸런스는 기가 막혔다. 얼굴 실력 인성 삼박자로 순위 고공행진 이어간 최지훈부터 나이에 비해 월등한 실력 자랑하는 막내 찬영까지, 육각형 멤버만 여럿인 탓에 포지션 나누는 게 무의미한 신인.


오션나인에겐 빈틈이 없었다.

다르게 말해 우영이 긴장을 늦출 만한 구석이 없었다.


데뷔가 끝이 아니다. 음방 하나를 위해 몰려든 그룹 수만 봐도 그러했지만, 경쟁은 팀 내부에서 더욱 치열한 법이었다. 24시간 붙어 지내며 가족보다 가까워졌다 해도 언젠가 계약이 끝나면 각자 갈 길을 가야 할 사이 아니던가. 와중에 회사에선 대놓고 투우장을 만들어줘버렸으니. 소소한 챌린지부터 개인 일정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우영에게는 지켜야 할 게 또 있지 않나.



"몸은 좀... 괜찮아?"



호흡을 고르다 말고 저를 보며 씩 웃는 얼굴에 가슴이 다시 콩닥거렸다. 그래. 인기멤 되기 위한 발악도 맞고 먼 미래 생각한 독기도 맞았지만... 우영은 얘 때문에 여기 온 게 팔할이었다. 님도 보고 뽕도 따고. 꿩도 먹고 알도 먹으려고. 챌린지도 찍고 얼굴도 알리고 애인에게 추근대는 놈도 제거할 작정으로 말이다.



"왜 말 안 했어?"

"응? 뭐를?"

"우영이 너도 선배님들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산의 한 마디에 가슴 한 켠이 뜨끔했다. 당연히 몰랐겠지, 산아. 당연해. 안 좋아하니까. 마땅한 핑곗거리를 생각해내려는데 머리가 영 돌아가질 않았다. 그냥 이실직고 할까 싶기도 했다. 질투에 눈 멀어서 거짓말 한 거라고, 미안하다고. 어쨌거나 우리 같이 챌린지 하게 된 거니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고.



"...열은 어제보다 좀 내린 것 같긴 한데."



우영은 괜히 말을 돌린다. 이마에 손을 올리자 사르르 내려오는 머리칼이 간지러웠다.



"응. 누구 덕분에 푹 자서."

"......."

"근데 있잖아, 나 아직도 안무가 너무 헷갈려."



팔을 들어올리는 산의 옷 군데군데가 뚫려 우영의 집중을 방해한다. 아니 만들다 말고 천이 모자랐나... 이거 마감이 왜 이래. 왜 이상한 데에 구멍이 뚫렸대. 산의 옷은 대체 어떻게 된 모양인지 팔 아래가, 정확히는 겨드랑이 부위가 훤히 뚫려 있었다. 누가 볼까 싶어 두리번거린 뒤 산에게로 한발짝 다가섰다. 끌어안듯 손을 맞잡자 산이 어깨를 살짝 마는 게 느껴졌다.



"여기선 이렇게. 발끝이 바깥으로 향하게."



성현과 지원도 금방 돌아온다고 했으니, 따로 매니저에게 연락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레비아탄의 신곡 안무는 좀 어려운 정도가 아니었다. 이걸 챌린지용 안무로 만들다니 제정신인가.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갠 비트 위로 언밸런스하게 얹은 멜로디가 난해의 극치를 달렸다. 하씨. 로탄 4기인 척만 안 했어도. 빼도 박도 못할 상황에 처한 우영은 원래 알던 안무인 양 초인적인 암기 능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그러니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랐다. PD의 호출로 벌게 된 이 30분이란 시간은.



"시선은 손이랑 같이 이렇게, 아래로 떨어지게."

"이렇게?"

"아니지. 손이 먼저 내려가버렸잖아."



단호한 지적에 산이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히잉. 여기가 제일 어렵단 말이야. 그러고선 제 눈치를 슥 보는 표정이...... 깜찍했다.


미쳤나. 진짜 미쳤나봐. 다른 멤버였으면 주먹부터 나갔을 리액션에 열받긴 커녕 가슴만 콩닥거리는 게 문제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히잉이라니. 히잉이라니. 미친. 존나 귀엽잖아. 얼굴 시뻘겋게 달아오른 우영이 괜히 헛기침을 했다.



"막상 익히고 나면 잘 할 거면서 엄살이지 또."

"아닌데... 진짜 어려운데."



언제 그런 소리를 냈냐는 듯 다시 차분해진 목소리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래. 이래서 안 된단 거야. 자꾸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귀여운 소리 내니까. 깜찍한 얼굴 하고 막 그러니까. 산이한테 안무 가르치는 건 나 하나면 된다고. 스텝도 내가 알려주고 동작도 내가 알려줄 거라고. 우영은 자꾸만 사랑에 눈 먼 애새끼 짓을 하게 됐다. 탈진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최산 남친 자리 하나만은 지키고 싶어졌다.



"이 정도로?"

"어어, 그 정도로."

"......."

"여기 디테일이 한 끗 차이거든."



대답처럼 다 나은 건 아닌 듯했지만, 산의 컨디션은 확실히 전날보다 나아보였다. 홍조도 많이 가라앉았고, 뱉는 숨에도 열기가 적고... 습관처럼 딱 붙어 동작 하나하나 코칭하던 우영은 문득 산과 저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지난 몇 달간 산과의 스킨십은 늘 이런 식이었다. 무너진 퍼스널 스페이스와 모호한 바운더리. 어디까지가 멤버간의 자연스러운 터치고 또 어디까지가 적당한 친밀도인 건지 모든 게 혼란하고 또 모든 게 헷갈리는.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이 정도는 적당하지 않나... 이 정도는, 이 정도는... 그러다 또 덜컥.



"......미안. 너무 참견했지."



겁이 나는 거였다. 제 실수로 산마저 곤란해질까봐. 중요한 타이밍에 옮아버린 감기처럼, 대신 아파줄 수도 없는 일들이 벌어질까봐. 시무룩하게 손을 거둔 우영이 한 걸음 물러났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굳이 따지자면 주변 시선을 좀 더 경계하는 건 우영 쪽 아니었나? 산이 키스해달라고 아무리 칭얼대도 양심상 세 번은 피하는 게 정우영 아니었냐고. 어젯밤을 기점으로 제 안의 어떤 브레이크가 고장나버린 게 분명했다. 자제력을 다 잃어버린 거야. 키스보다 더한 거 생각에. 반성에 반성을 거듭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거라고.


정우영이 누구인가. 소속사에서 쫓겨나고도 예리한 수요 분석으로 데뷔까지 직행한 정통파 아이돌이다. 의도한 대로, 아니 의도했던 것보다 더 성공적으로 메이저 씨피 왼 자리를 차지한 독기남이다. 우연은 다시 한 번 어떻게든 적정선을 찾으리라 다짐했다.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옷매무새를 고친 우영이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딱 세 번만 더 맞춰보고 형들 기다리자, 우리."



마지막 단어에 유난히 힘이 들어간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산과 그렇게 묶이는 건 저뿐이면 했으니까. 오늘도, 내일도, 5년 뒤에도.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 먼 미래에도. 우영은 산의 곁을 지킬 것이었다. 누구도 곤란하지 않을 포지션으로.


스쳐 지나가는 경쟁자들 얼굴 떠올리던 우영의 앞에 산이 다시 다가온다.



"우영아, 근데 있잖아."



이어진 말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형이라고... 안 하면 안 돼?"

"어... 어?"

"선배님들한테 형이라고, 안 그러면 좋겠는데."



이게 갑자기 무슨... 곧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끔벅이는 우영을 보며, 산이 난감하다는 듯 살짝 웃었다.



"실은... 아까부터 엄청 신경 쓰여서..."

"......."

"나 질투나는 것 같아."



그렇게 우영의 심장 박동은 다시 위험 수준에 이르게 된다.







당신의 오션나인에게 투표하세요!

W. 서파







메이저는 망해도 삼대를 가고, 명작은 해체 후에도 입덕을 부른다 했던가. A씨는 아이돌의 인기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 알페스라고 생각했다.


Real Person Slash.


그 중에서도 팬픽션. 고대에는 텍파의 형태였고 근래에는 포타로 통칭하게 된 이 콘텐츠는 결국 영업의 한 방식이었다. 세상 사람들아 여기 좀 보세요. 제가 파는 애들 좀 보세요. 예쁘죠. 귀엽죠. 사랑할 수밖에 없겠죠? 전단지 돌리듯 일단 보여주는 거였다. 유익한 건 나누고 싶고, 좋은 걸 보면 함께 하고 싶은 게 당연한 거니까. 무대 영업 인성 영업 금수저 영업 다 해봐도 안 통할 땐 이것만큼 통하는 게 없었다. '진짜 사랑' 영업 말이다.


근데 말이죠. 저는 사랑에 빠지면... 그 남자가 나오는 소설을 보고 싶어져요. 아주 막 정신 못 차리게 미쳐서 진짜 사랑을 하는 그런 소설 있잖아요. ... 네? 누구를 사랑하냐고요? 당연히 서로를 사랑하는 거죠. 되게 기본적인 걸 물어보시네. 아니 그럼 뭐 저를 사랑하겠어요 갑자기?


울고 불고 빌고 겁박해서라도 일단은 읽혀야 했다. 맛없어도 먹고 판단하게 둬야 했다. 다 좋은데 걔네 어차피 계약 끝나면 찢어질 애들 아니야? 냉랭한 표정 짓는 이들에게 슬쩍 떡밥 링크 몇 개 더 보내면 끝이었다.


그래도 캐해는 솔직히 맛있죠. 드라마 한 편 뚝딱이죠. 얼굴 모르고 이름 몰라도 끝까지 읽을 만큼 흡입력 미쳤잖아요? 그런데 심지어... 〈충격 동성애 진짜 계심〉 이라니. 이 얼마나 아멘이냐고요.


명작 먼저 읽히고 자컨 들이미는 영업은 올타임 100%의 승률을 자랑했다. 지금 A씨의 오티피에게 필요한 것도 승리였고.


[ 일단은 뭐 ... ]
[ 도입부 정도긴 한데 ]


트친 P의 연락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A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드디어 오셨구나. A씨는 지금 잔인한 전투의 첫 총알을 장전하려 하고 있었다. 적군의 폐부에 깊숙이 파고들어줄 총알. 향후 10년간 널리 회자될 '날퓌 신작 포타'를 말이다.


[ 당장 읽고 올 테니까 ]
[ 어디 가지 말고 딱 기다려요 ]


[ 가볍게 쓴 거니까 넘 기대는 말고요 ㅋㅋㅋ ]


멘트와는 달리 전혀 가볍지 않은 분량의 텍스트가 이어진다. 작살나게 써놓고도 겸손을 넘어 기만을 떠는 인간인 걸 잘 아는 터라, 가볍게 썼단 말 따윈 애초에 믿지 않았다. 홀린 듯 스크롤을 내리던 A씨가 특정 파트에서 끝내 비명을 지른다. 아니 씨발. 도입부만 봐도 좆되는데? 책상에 엎드려 발버둥 치고 키보드 붙잡은 채 울부짖는 건 덤이었다.


날것의 맛 미쳤는데 이거.


과연 P였다. 죽기 전 읽을 단 하나의 날퓌 포타를 고르라면 고민 않고 「아삼륙¹」을 꼽을 작정이었던 A씨는 그 전설의 포타를 쓴 당사자, P로 인해 또 한 번 붕괴되고 만 것이었다.


[ 좀 어떤 것 같아요? ]

[ ....... ]

[ 님아... ]

[ 뭐예요 반응 ㅋㅋㅋ 불안하게 ]

[ 아 참 ]

[ 결말은 쓰면서 좀 바뀔지도? ]


어젯밤, A씨는 트친 P와 백전백승을 거둘 전략을 짰다. 이순신도 혀를 내두를 그 전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홍콩하면 날퓌만 떠오르게 만드는 것. 소재의 최초성 확보하는 순간 싸움은 훨씬 유리해진다. 조합 1위 먹을 놈들은 애초에 내정되어 있다는 양 굴어야 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투표 기간 내내 지겹도록 홍콩 서사를 처먹이는 거다. 분업식 웹툰 공장처럼 연재물을 찍어내는 거다. 그렇다고 양산해선 안 됐다. 퀄리티 챙기고 진정성 담아내는 건 필수였다. 정우영? 아 오션나인 금성무? 소리 나올 때까지. 최산? 그 구룡성채 포타 나온 걔? 비계 트윗 눈에 띌 때까지. 


[ 하....... ]

[ 이거... 몇 화 짜린가요 ]


[ 글쎄요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
[ 길어봤자 3화 ... ]

[ 한 번에 묶어 올리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


죽을래. 나 그냥 죽을래요. 음소거 비명을 세 차례 지르고 나서야 답장을 쓸 정신이 들었다. 어제 흘러가듯 얘기했던 게 10이면 지금 P가 제게 떠안긴 건 100이었다. 아니, 1500일지도.


글 속에 나오는 우영이 너무도 생생했다. 이건 실제의 우영보다도 더 우영이잖아. 이 여자 어디 가서 애 잡아먹고 온 거 아냐? 말투 하나 행동 하나 눈에 그려지는 게 고문 그 자체였다. 그래. 이건 고문이야. 뒷이야기가 더 없다는 점도 최악 중의 최악이고.


[ 장편으로 가자... 제발요 ]

[ 소장본 내자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 저 지금 진지해요 ]
[ 업로드까진 얼마나 보고 계셔요? ]


두 손 그러쥐고 간절히 빌었다. 제발 이번 주말이길. 제발. 같은 전술을 쥰퓌판에서도 짰을까봐 갈수록 마음이 초조했다. 우리가 먹어야 한다고. 이 소재 우리가 획득해야 한다고요. 입술 짓씹던 A씨의 눈앞에 P의 메시지가 날아든다.


[ 빨리 쓰면 ]

[ 6 ]

[ ? ]


6일? 오 신이시여. A씨가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6일 뒤면 무조건 다음 주잖아. 거의 일주일 뒤잖아. 그럼 늦는다고. 당장 어제 구상한 포타를 주말 안에 내놓으라는 게 무리한 요청인 건 알지만. 지금은 전시 상황이 아니던가. 본디 전시 상황에는 밥도 10초 안에 먹고 잠도 1시간만 자는 게 당연한 거였다. 아니 사실 그것도 사치였다. 언제 포탄이 날아들지 모른다고. P님 내가 이런 거 구구절절 말 안 해도 알면서 어떻게...


[ 아니다 ]
[ 5시간이면 될 듯 ]
[ ㅋㅋㅋ 머리에 다 있긴 해서요 ]


순간 A씨가 멈칫한다. 이게 무슨 말이지. 단번에 이해가 가질 않아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니까 6이... 6일이 아니고 6시간? 6시간을 뜻했단 거야?


...아멘. 


조용한 방 안에 짧은 기도가 울려퍼진다. 여태 교류해온 게 존잘이 아니라 예수였음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지지와 숭배의 메시지를 날리려던 찰나였다. 오션나인의 라이브 알림 팝업이 날아든 것은.



[•REC] 승현 CAM



A씨는 빠르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제가 지금 진짜로 드릴 말씀이 많은데요. 일단 라이브 보고 와서 말해요. 알겠죠? 읽음 표시조차 안 뜨는 걸 보니 P는 이미 달려간 모양이었다. 팝업 창을 누르자 어제와는 다른 착장을 한 승현이 마구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저의 첫 번째 라이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아."



뮤비 착장 중 하나를 입었구나. 우영과 산의 옷은 무엇이었는지 A씨의 머리가 바삐 굴러가기 시작했다.



"지금 제 앞에서 엄청 까불고 있는 애가 있는데요. 잠시만요..."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빙글빙글 돌더니, 앵글 밖에서 혀를 내밀고 있던 찬영에게로 초점이 맞춰진다.



"저거 좀 보세요. 못됐죠. 맨날 저한테는 저런 식이라니까요."

"음? 방금 무슨 일이 있었나요?"

"네 본색이 다 드러난 거야. 팬 분들 다 보셨다고."



흐음. 막내 라인 밀겠다는 건가. A씨가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괸다. 다른 씨피엔 관심이 없어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조합이 꽤 괜찮았다. 그림체 정반대인 것도 흥미로웠고, 까불거리는 건 똑같은데 묘하게 찬영이 더 막내 티가 나는 것도.



"우리 이러지 말고 방송국 구경시켜 드리자."

"너 되게 프로같다?"

"크하하. 사실 저도 처음 와보는 곳이긴 해요. 그러니까 더 재밌지 않을까요? 찬영이와 함께 하는 음악방송 비하인드!"

"나는 왜 빼? 야, 어디 가!"



어머. 얘네 지금 손 잡은 거야? 앵글 가장자리로 스쳐간 장면이었으나 프로 알페서가 그걸 놓칠 리 없었다. 복도로 나선 승현과 찬영은 소화전부터 화장실 입구, 매점 표지판에 이르기까지 잡다한 모든 것을 리뷰하기 시작했다. 참 에너지도 넘치지. 애들이 밝아서 좋다니까. 절로 흐뭇해진 A씨는 문득 자신의 감상이 학부모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살 차이여도 스무 살과 열아홉은 이렇게나 다른 거였다. 그래. 미성년자 좋지. 미자만의 맛이 있지. 근데 얘네 씨피명이 뭐더라. 온갖 생각을 하는 사이, 승현과 찬영이 3층 로비에 당도했다.



"자, 여기부터는 쉿! 잠깐 조용히 해야 해요."

"쩌이기 보이시죠? 저희 멤버들 발견했거든요."

"이럴 땐 뭐다?"

"급습이다."

"그죠. 저희가 책임 지고! 오늘 한 번 특종을 건져보도록 하겠습니다."



너네만 조용히 하면 돼. 너네만. 어차피 우리 소린 들리지도 않는다고. 그런 A씨의 말이 당연히 들리지 않는 승현은 카메라를 품에 안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니 뭘 보여줘야 특종인지 아닌지 알 거 아냐.

얘들아 여기가 어디야... 


화면 가득 승현의 가슴팍만 잡히다, 이내 그것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채팅창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너네만 보지 말고 우리도 보여줘야지

อินโดนีเซียรักชานยองครับ!

We love you SEUNGHYUN♥ 

왤케 조용해? 뭐함?

L'Ocean Nine si aspetta di venire in Italia?

오늘 제 생일이에요 오빠


그때 화면이 다시 밝아졌다. 짜잔- 하는 소리와 함께 밝게 웃는 찬영과, 그 뒤로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정우영 최산이 한 앵글에 잡힌다.



"자, 여러부운. 오래 기다리셨죠? ASMR의 A자도 몰랐던 우영이 형이 아는 척을 하는 광경입니다!"



와아아. 호응하느라 흔들리는 화면 속 벙 찐 표정의 우영이 상황 파악을 하려는 게 보였다. 이런 미친. 둘이 왜 나와 있어? 왜 둘만 나와 있어? 흥분한 A씨는 폰을 들어올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화면만 바라보았다.



"방금 뭐라고 하고 있었죠? ASMR 뭔지 아냐구?"

"진짜 웃기다. 자기도 어제까진 아예 몰랐으면서."

"아아, 그게..."

"이 형 대박이에요. 어제 뭐랬는지 아세요? ASAP? AOMG? 설명해줄랬더니 자기 몸 쓰는 건 다 잘 한다고 막..."

"그걸 또 들어주고 있는 산이 형이 너무 착하네요."

"저희가 같은 방 써서 또 잘 알잖아요. 산이 형 ASMR 중독자인 거."

"이런 걸 뭐라 그러죠?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다?"

"지훈이 형 앞에서 얼굴 뽐낸다 그런 거죠. 찬영이 앞에서 귀척한다 뭐 이런 거."

"마지막 말은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여튼 우영이 형은 진짜 노래랑 춤밖에 몰라. 은근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공부 안 할 거면 원준이 형이 대신 나갈 거라 그랬어요."

"아. 그 말은..."



그 말은 하면 안 되지.


속삭이는 승현의 표정이 다급했다. 뭐지? 원준이 대신 나갈 거라 그랬다니. 무슨 뜻이지? 선뜻 이해되지 않는 말을 해석하려 눈을 가늘게 뜨던 찰나, 티격태격하는 찬영과 승현의 사이로 우영이 얼굴을 내민다.



"근데 이거 라이브예요?"



미쳤다. 남자는 미쳤다. 앳된 향 진동하던 화면 속에 남자가 비처럼 내리는 듯했다. 아니 매일 봐도 새롭네. 퍼컬이 걍 음방이네. 이럴 줄 알았으면 녹화했어야 했는데. 클립을 딸 타이밍은 이미 놓친 듯했다. 트친들 믿고 감상에 전념하기로 한 A씨가 의자를 당겨 앉는다.



"에이. 알면서 왜 이러실까. 저희는 백프로 라이브인데요."

"올 어바웃 오션나인! 모든 걸 알려드리기로 약속했잖아요. 형들이 저희 특종이고."

"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요."

"됐어요. 됐어요. 그나저나 두 분 지금 뭐하고 있었는지 설명해주셔야죠. 지금 팬분들 채팅 엄청 빨라졌거든요? 찬영이 이 자식 또 실수하기 전에..."

"음. 그건 비밀인데요."



우영이 산을 슥 끌어당겼다. 비밀? 비미일? 과연 까와 빠를 동시에 미치게 하는 개천재 밀당의 아이콘 정우영다웠다. 그냥 알려주던가 함구하던가 둘 중 하나만 할 것이지. 입으로는 비밀이라며 손으로는 최산을 끌어당기니 보는 여자들만 안달나는 거였다.



"에에? 그런 게 어딨어요."

"팬분들한테 비밀이 있음 안 되죠. 이럼 곤란하죠."



아우성인 멤버들 아랑곳 않고 우영이 산을 좀 더 끌어당기며 웃었다. 



"이따 직접 확인해주세요. 아마 깜짝 놀라실 걸요?"

"......"

"그치? 우리 이거 비밀이잖아."



진짜 돌았나. 너 지금 그런 식으로 한다 이거야? A씨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만 그런 상태인 게 아닌지 휴대폰 진동이 알람 수준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속보. 정우영이랑 최산이랑 챌린지 찍는다 함
근데 그게 레비아탄 꺼라는데?

  ㄴ 이런 씨발... 그거 안무 개처야하던데요???
      미칫나... 이래도 되나

[ 아니 썅 얘들아 ]
[ 정우영 저러는 거 챌린지 때문 아니래 ]


그럼 뭔데. 쏟아지는 알림을 참다 못한 A씨가 단톡방에 접속한다. 


[ 내 이럴 줄 알았다 ]
[ 고작 챌린지 하나로 ]

[ 저 난리 떨 우영군이 아니잖슴 ]


[ 아니 그럼 뭔데요 제발 ]


[ 다른 판 친구가 건너건너 들었는데 ]
[ 둘이 ASMR 인터뷰 나간다는데? ]


시공간이 멈춘 듯 정지한 A씨의 폰에, 흡사 오류에 가까운 속도로 메시지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 씨발... ]

[ 그게 뭐예요? ]
[ 나만 트렌드 못 따라가나 ]

[ 아니 그거 개변태 콘텐츠잖아요 ]
[ youtube.com/watch?v=Q98okl9nt9s ]
[ 이거 보심 이해되실 듯 ]

[ 걍 ASMR인 척 하면서 ]
[ 롤플레잉 하는 거예요 씨바아아아아아알]


롤플레잉? 내가 아는 그거? 아니 씨발 대한민국이 언제부터 이 정도로 불건전해졌냐고. 노발대발한 B에게 신경 쓸 여력 따위 없었다.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마냥 산에게 찰싹 달라붙은 우영이 뿌듯하다는 듯 웃고 있었으니까.


저 저 얼굴 좀 봐. 왤케 얄밉지 오늘따라? 방금까지 세상에서 제일 가는 미남으로 보였던 남자가 갑자기 웬수로만 느껴졌다. 좋아? 좋은 거야? 최산이랑 롤플레잉 할 예정인 게 비밀이라 행복하냐고.



"스포 하나만 해드릴까요?"

"아... 좋아요. 어떤 게 좋을까요?"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산이 우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쏙 올라온 광대와 폭 패인 보조개에 또 한 번 분노가 휘몰아쳤다. 존나... 존나 행복한 표정. 그래. 이제 기억이 난다. 서바이벌 참가 신청서에 써 있었던 게 기억이 나.


  • 취미 : 잠들기 전 ASMR 듣기


기분이 막 몽글몽글해져요. 잠도 잘 오구 포근해져요오. 추천하며 살풋이 웃던 산의 얼굴도.



"방금 나한테 가르쳐준 거 있잖아. 이따 하자고 했던 거."

"인삿말?"

"응. 인삿말 그거 보여드리까?"



고개를 까딱 옆으로 넘기며 묻는 우영의 얼굴이 초면이었다. 아니 쟤가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나? 유치원 선생님 강림한 듯 세상 따스한 눈빛에 말문이 막혔다. 멍해진 건 산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잠시 굳어 있던 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이랑 방금 맞춘 게 있거든요. 사실 안무 연습하다 나온 아이디어긴 한데, 저희가 다른 것도 준비하고 있어서요."

"인사법을 만들었어요. 제가 먼저 시작하는 건데..."



산이 왼손을 펼쳐 입으로 가져다 댄다. 잘 들어주셔야 해요. 소리가 중요하거든요? 주변이 고요해졌다. 온 세계가 최산에게 집중하는 듯했다.



"산이와-"

"우영이의-"



A S M   R ―



마이크 없이도 들릴 정도로 선명한 속삭임이었다. A씨는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귀엽다. 장하다. ASMR 뭔지도 몰랐다더니 금세 배웠네. 어쩌면 그런 담백한 소감으로 마무리 되었지도 모른다. 마지막 R을 발음할 때, 우영이 산에게로 몸을 틀지만 않았더라면.



"제 실력은 좀 어때요, 산 씨?"



산의 귀에 대고 숨소리를 발사한 우영이 묻는다. 너무 놀라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선 산이 제 귀를, 아니 볼을 감싸고 우영을 보았다. 삽시간에 붉어진 얼굴이 당황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갑자기... 갑자기 속삭이면 어떡해요. 왜? 난 배운 대로 써먹은 건데. 씨익 웃는 얼굴 참 뻔뻔하기 그지 없었다.



"느껴져요 그거?"



뭐?



"느껴지냐고요."



미친 거야? 진짜 해보자는 거야? 



"그거 뭐더라. 탱글?"

"팅글... 이요."

"아, 팅글... 그거요. 느껴졌어요?"



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A씨는 갑자기 모든 걸 그만두고픈 충동에 휩싸인다. 네가 '그걸' 해서 감기를 옮겨도, 사귀는 거 연막 치느라 룸메를 바꿔도 우리는 다 용서했어. 우리 눈앞에서 키스한 거 아니니까 다 용서했다고. 근데 이거는 씨발...


얘들아 씨발 나 이딴 거 안 할란다...
너무 더럽다... 진짜 개처더럽다고

  ㄴ 이딴 게이 첨 봄 아 진심 충격적

    ㄴ 애들이 카메라 앞에서
        유사X스를 하잖냐...

      ㄴ 이걸 가만히 둔다고? ..... ...
          X감대를 자극하고 쌩난리를 치시는데?


너무 기가 막히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뭐? 느껴지냐고? 미친 거지 이거는. 끝까지 가보자는 거지. 분개한 A씨의 화면에 목언저리까지 시뻘게진 산의 모습이 잡힌다.



"느껴... 지는 것 같긴 한데."

"팅글이?"

"......팅글이."



이런 썅.


이딴 게 동료? 감옥에 들어가고 말지 내가. 분노의 댓글을 싸지르기도 전에, 헐레벌떡 달려온 매니저로 인해 라이브는 종료되고 말았다. 검게 변한 화면 앞에 멍 때리는 시청자가 비단 A씨 하나는 아닐 것이었다.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얘네 뭔가 이상하다. 진짜 이상하다.


그러니까 좀... 위험한 것 같다고.














¹ 아삼륙  알페서 P의 대표작. 양아치 캐해가 난무하던 날왼판에 순애의 새 방향을 제시한 작품으로, 발랄한 캠게인 듯 시작해 점차 피폐해지는 구성이 화제였다. 좆고딩들 연애치고 수위 높은 것도 좋았지만, 배신과 후회를 최산 쪽이 하는 게 특히 신선했다는 반응. 이후 비슷한 캐해의 작품이 쏟아졌으나 인생 좆되는 몰입도로는 여전히 압도적인 언급량을 자랑하는 레전드 포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