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서 지민은 자신이 이렇게 상처받을지 몰랐다. 물론 자신이 얼마나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지만. 그런 지민의 표정을 본 사람은 애리뿐이었다. 응시하는 눈. 애리는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고 지민의 눈을 마주쳐왔다.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다는 눈빛. 작은 뒤통수에 얼굴이 다 가려져 겨우 눈만 보였고, 애리의 눈엔 작은 당황도 없었다. 마주하던 눈은 몇 초가 지나자 하던 일에 집중하려는 듯 감겼다. 당황은 오직 지민의 것이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두 여자. 애리와 민정이 키스하는 모습을 언제까지고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어째서? 지민은 눈을 질끈 감고 뒤돌아 자신의 방으로 도망쳤다. 그 와중에도 최대한 문 닫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어째서? 라는 물음표가 무엇을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민정인지, 어째서 애리는 당황조차 하지 않는지, 어째서 이렇게 비참한 기분인지, 어째서, 어째서.
지민은 애리를 좋아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았다. 첫눈에 반했다는 말만큼 진부한 게 없지만, 정말 그랬다. 금발에 가깝게 탈색한 머리카락, 속을 알 수 없는 표정, 약간 어눌한 발음과 목소리 그리고 예쁜 얼굴… 특히 곧은 콧날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 마주한 애리는 밝은 머리색이 아니더라도 눈에 띄는 외모였다. 얼굴만 보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얼마나 최악인지 알면서도 좋았다. 말 한마디 나눠 보지 않은 상대에게서 외모가 아닌 무엇으로 호감을 느낄 수 있겠는가. 그제야 지민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 제 앞에서 떨며 고백하던 게 이해됐다. 이런 마음이었으려나. 그렇다고 지민이 애리에게 한 고백이 고작 얼굴 때문이란 뜻은 아니었다. 함께 보낸 시간이 쌓이고, 애리를 알면 알수록 더 좋아졌다. 나름대로 호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같은 마음인진 몰라도, 결정적으로 그런 쪽으로 편견이 없다는 확신까지 들었을 때 한 고백이었다.
‘미안해요. 저는 언니 별로예요.’
왜? 내가 왜 싫은데? 지민은 되묻지 말아야 했다.
‘아니, 싫은 건 아니고… 언니는 좋아요. 근데 사귀는 건 모르겠어요.’
‘여자라서?’
‘……그냥 얼굴이 제 취향 아니에요.’
그런 대답이 돌아올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스스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지민은 자신이 예쁘다는 걸 알았다.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로 누가 봐도 예쁜 얼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늘 고백받는 입장이었고, 거절하는 게 지민의 역할이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외모만 보고 다가오는 사람이 많았다. 누군가 좋아한다며 고백해 올 때마다 속으로 비웃었다.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지민의 인생엔 고백과 거절이 지겹게 반복됐다. 아무리 좋은 말로 거절해도 돌아오는 건 멀어지는 인간관계와 들으라는 듯 흘리는 뒷담화 등 영 반갑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런 상황이 싫어서 나이를 먹을수록 일부러 꾸미지 않았고, 시력이 나쁘지 않음에도 얼굴을 다 가리는 커다란 안경을 쓰고 다녔다.
물론 지민이 외모만 믿고 애리에게 고백한 건 아니었다. 다만 외모 때문에 차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얼굴이 취향이 아니라니. 차라리 여자라서 싫다고 하면 납득했을 것이다. 어느 쪽이 더 나은지 모르겠지만.
콕 찍어 얼굴이 취향이 아니라는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애리는 다시 말없이 빤히 바라봤다. 고백을 받고도 태연한 표정.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주워담을 수도 없었다. 지민은 어떻게든 좋게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미안. 그래도 우리 어색해지지는 말자. 그냥 지금처럼 편하게… 알지? 횡설수설하는 지민을 바라보는 애리는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그 표정에 상처받았던가? 상처받을 겨를도 없었다는 쪽에 더 가까웠다. 지민은 다시 사과했고 애리는 괜찮다고 했다. 괜찮다는 말이 정말로 네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때부터 가슴이 답답했던 것 같다. 이 답답함은 무얼까. 분명 슬픔은 아니었다.
나가서 담배라도 피워야겠다는 생각에 주머니를 뒤졌다. 라이터와 담배를 꺼내 들었을 때, 애리가 말했다. 담배 피우는 것도 별로예요, 라고.
***
셰어하우스엔 지민과 애리, 민정 셋이 살았다. 거실과 주방, 욕실은 공유공간이었고 셋은 각자 방을 하나씩 썼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지민이 30살로 가장 나이가 많았고, 이곳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 집주인의 딸이자 백수인 민정은 지민보다 세 살 어린 27살이었다. 마지막으로 대학생인 애리가 가장 어리고 가장 늦게 셰어하우스로 들어왔다. 사실 지민은 서른이 되기 전 셰어하우스를 나가려고 했는데 애리의 등장으로 홀린 듯 재계약을 해버렸다. 그리고 올해로 정말 30대가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생일이 지나지 않아 만으론 28살이지만, 이 나라에선 다들 서른이라고 하니 만 나이가 무슨 소용인가 싶다. 나이 같은 거 신경 쓰지 않고 살았는데 저보다 7살이나 어린 여자애를 좋아하게 되니 만으로 나이를 좀 줄여보려고 애쓰게 되는 것이었다.
추하다, 유지민.
지민은 노트북을 앞에 두고 중얼거렸다. 입맛이 썼다. 차이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냈는데, 애리와 민정의 키스를 목격한 일은 쉽게 회복이 되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키스하는 걸 보다니. 그 뒤로 의식해서 그런가 애리와 민정이 손을 잡고 있거나 어깨에 기대고 있는, 그러니까 연애라도 하나 싶은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떠올려 보면 예전부터 둘은 꽤 가까웠다. 여자애들은 원래 스킨쉽이 쉬우니까 그러려니 했었는데, 그런 단순한 이유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지민은 생각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화면이 꺼진 노트북을 한참 노려보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애리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민정도 없이 마주치면 껄끄러우니 슬슬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 하던 찰나에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집으로 들어온 애리가 어? 하더니 일해요? 하고 묻는다.
“어… 응. 이제 저녁이나 먹을까 하고.”
“그럼 같이 먹어요.”
“어?”
“냉장고에 고기 사둔 거 빨리 먹어야 하니까. 제가 할게요.”
“어어, 그래.”
도대체 ‘어’를 몇 번이나 말하는 건지. 지민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애리는 외투를 벗고 손을 씻더니 빠르게 요리할 준비를 한다.
“돼지고기 김치찌개 괜찮죠?”
뭐든 좋다고 했더니 싫어도 할 수 없어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완성된 음식은 평범하게 맛있었다. 식사 내내 어색함을 풀려고 노력하는 지민과 달리 애리는 특별히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 건지, 신경을 안 쓰는 건지 별말이 없었다. 혼자 떠드느라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 모를 식사가 끝날 무렵 민정이 생각났다. 정확하게는 그 장면이, 둘의 키스가.
“민정이 언제 온다고 했지?”
사실 지민은 민정이 언제 오는지 알고 있으면서 그렇게 물었다. 특별히 뭘 떠보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애리를 보고 있으니 민정이 생각났을 뿐이다.
“몰라요.”
“몰라?”
“네.”
“왜 몰라?”
“왜, 알아야 해요?”
애리의 표정은 속을 알기 어렵다.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지민은 말을 얼버무리다가 가슴에 걸려있었던 물음을 툭 하고 뱉었다.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둘이 사귀는 거 아냐? 하고 묻자 애리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볼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차인 주제에 이런식으로 나오는 자신이 참 구질구질해 보여 금방 후회가 몰려왔다. 지민은 잠자코 애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니에요.”
“응?”
“그런 거 아니에요. 민정 언니는…….”
처음으로 애리가 뜸을 들인다. 시선을 아래로 떨구자 긴 속눈썹이 눈을 다 가렸다. 시선이 사라진 틈을 타 지민은 애리의 얼굴 구석구석을 살폈다. 분명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민정 언니는 여자 안 좋아한대요.”
***
그럼, 그 키스는 뭐였는데? 지민은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지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방에 들어와 일을 마저 하려고 했으나,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애리는 아직 거실에 있는지 인기척이 느껴졌다. 지민은 손을 몇 번 쥐었다 피고는 가볍게 책상을 내리쳤다. 책상 위 물건들이 짧게 진동했다.
아, 답답해.
애리와 민정의 키스를 본 이후로 아니, 고백하고 차인 이후로 명치가 뭐가 걸린 것처럼 답답했다. 체한 건 아닌데 답답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민정은 키가 작고 동안이어서 애리와 또래로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애리보다 민정을 더 어리게 볼 수도 있을 만큼. 내 얼굴이 취향이 아니라면 민정의 얼굴은 취향이라는 건가? 의외로 귀여운 얼굴을 좋아하나. 생각이 꼬리를 문다. 귀여운 얼굴이 취향이라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납득이 갔다. 애리와 민정, 둘의 얼굴을 나란히 놓고 보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 뭘 하나, 김민정은 여자 안 좋아한다는데. 지민은 알 수록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럼 키스는 왜 했는데? 지민은 답답한 마음에 자신의 뺨을 짝 소리 나게 때렸다. 그러자 마치 소리에 반응하듯 눈 앞의 휴대폰 화면이 밝아졌다.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애리였다.
[나랑 술 마셔요]
다시 한번 뺨을 때렸다. 짝! 갑자기 술? 애리에 관해선 예측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 점이 매력이었지만, 지민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뭐라고 답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이번엔 노크 소리와 함께 애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지민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한집에 사는 이상 불편하다고 계속 피할 순 없었다. 애리와 단둘이 술을 마신 적 있었던가. 가끔 좋은 술이 생기면 집에서 같이 마시긴 했어도 대부분 민정도 함께였다. 애리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이 상황을 불편하게 생각해야 하는 건지, 좋아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지민은 생각했다.
“잠시만, 나갈게.”
될 대로 되라지, 뭐. 지민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뺨을 소리 나게 때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
식탁 위에 놓인 맥주 두 캔과 과자봉지 하나. 지민은 맥주캔 하나를 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나는 소주.”
맥주를 넣고 소주를 꺼냈다. 애리가 그럼 자기도 소주를 마시겠다며 남은 맥주캔 하나도 냉장고에 넣는다. 둘 사이에 소주 한 병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밥을 먹을 때보다 더 어색했다. 이럴 땐 빨리 마시는 게 낫다. 짠과 함께 첫 잔을 동시에 원샷했다. 오늘따라 술이 쓰다. 애리는 뭐가 급한지 아예 소주병을 자신의 앞에 두고 잔이 비는 족족 채워 넣었다. 과자보다 빠르게 술이 줄어든다. 좀 빠르지 않나 싶었지만, 지민도 애리가 따라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한 병을 다 비웠을 때 애리가 물었다.
“언니는 왜 내가 좋아요?”
왜 애리가 좋을까. 지민도 자신이 애리를 좋아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사실 지민은 30년 가까이 살면서 제대로 된 연애를 한 적도 없다. 몇 명의 남자와 사귀었지만, 제대로된 연애라곤 할 수 없었다.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하는 만큼 되돌려주지 않으니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연애는 의무감에 만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달까. 그러다 보니 스킨쉽을 피하는 경우도 많았다. 키스나 섹스 같은 거 좀 추잡하지 않냐고 친구에게 물었을 때, 혹시 무성애자 아니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했었다. 지민은 지금까지 자신이 누군가를 이렇게나 좋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다시 애리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우치나가 애리는 지금까지 만났던 남자들과 뭐가 다를까. 여자라는 거? 아니면 쟤랑은 키스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거? 할 수만 있다면 그 이상도 하고 싶다는 거? 그렇지만 당사자 앞에서 이런 대답을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너는 김민정 어디가 좋냐.”
“내가 먼저 물어봤어요.”
“…….”
“…….”
“그냥, 네 얼굴이 취향이라.”
지민은 그렇게 말하고 나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신의 얼굴이 취향이 아니라는 애리의 말에 응수한 것이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고백까지 한 마당에 못 할 말이 무엇이겠는가 싶다가도 사실이나 진심을 말해버리면 후회와 함께 어김없이 창피해졌다. 얼굴에서 시작된 화끈거림이 귀까지 번져간다. 아무것도 숨길 수 없게 만들겠다는 듯이 귀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애리가 손을 뻗어 지민의 귀를 스치듯 만졌다. 지금 귀 엄청나게 빨개진 거 알아요? 라고 말하곤 아예 귀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애리의 손이 차가운 건지 지민의 귀가 뜨거운 건지 모르겠지만, 순간 시원해지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애리의 긴 팔이 양옆의 시야를 가려 얼굴 말곤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여전히 식탁을 가운데 두고 있지만, 아까보다 얼굴이 훨씬 가까워졌다. 피하지 않고 마주쳐 오는 눈에 지민은 어쩌지 못하고 바라본다.
“민정 언니는 강아지 같아요.”
“…….”
“근데 언니는 뱀 같아. 볼살도 하나도 없이 갸름하고, 하나도 안 귀여워요.”
“…….”
“그래도 이렇게 귀까지 빨개지는 건 좀 귀여운 것 같아요.”
역시 귀여운 얼굴이 취향이었나. 애리가 귀를 감싸 쥔 바람에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지민은 민정의 강아지 같은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키스하던 둘의 모습도. 지민은 물어봐야 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으니까.
키스는, 하고 지민이 낮게 말했다. 분명 작게 말했는데 귓가에 웅웅거리며 크게 울린다. 다시 한번 그 키스는, 하고 물음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톤으로 속삭였다. 애리도 지민을 따라 그 키스는, 하고 발음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가만히 애리를 응시하던 지민이 여전히 자신의 귀를 쥐고 있는 애리의 손을 끌어내려 자신의 볼을 감싸 쥐게 만들었다. 이렇게 해야 애리의 목소리가 잘 들릴 테니까. 애리의 손은 여전히 시원했다.
“그 키스는… 실험이었어요. 실패했지만.”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하며 애리는 손을 풀었다. 긴 팔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여전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지민은 생각했다. 대답을 들어도 뜻을 알 수 없으니 소득이 없다. 감싸 쥔 손이 사라지니 양 볼이 다시 화끈거린다. 지민은 실패한 실험에 대해 다시 묻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명확한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지 않아서 더는 묻지 않았다.
한참 동안 말없이 술을 따라 마시고, 피상적인 말만 늘어놓으며 서로의 얼굴을 보길 반복했다. 이제 슬슬 한계였다. 지민도 애리도 술을 잘 마시는 편이 아니었다. 빈 소주병의 개수가 술자리를 끝내야 한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알콜로 가득 차버린 뇌는 정상적인 사고를 거부하는 법이다. 그렇다고 술김에 키스한다거나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 정도로 진부하거나 몰상식한 사람은 아니었다. 지민은 식탁에 머리를 박고 내가 지금 어린애랑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짧게 탄식했다. 식탁에 닿은 이마가 시원했다. 애초에 고백하지 말아야 했다. 적어도 차였다는 사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애리가 누구와 키스해도 신경 쓰지 말아야 했다. 그냥 어른스럽게 넘겼어야만 했다. 다만 그럴 수 없었던 이유는 이렇게 먼저 많이 좋아한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마음을 가져본 것 말이다.
“취했어요?”
“아마도?”
“…….”
“…….”
“저도요.”
애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지민의 옆자리에 앉았다. 취했으니까 하는 말인데 키스해도 돼요? 애리의 말에 지민이 뭣?! 하고 짧게 소리 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이미 애리의 얼굴이 코 앞에 있다는 걸 자각한 순간 물컹한 입술 닿더니 가볍게 이가 부딪혔다. 아, 이런 걸 바란 게 아닌데. 숨결에 알콜향이 섞여 벌어진 입속으로 스며들었다. 놀란 지민이 입을 다물고 애리의 어깨를 밀쳐내려고 하자, 아예 얼굴을 붙잡고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애리다. 혀가 입술 사이를 파고들자 지민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애리는 꼼꼼하게 지민의 입술을 빨다가 아랫입술과 턱, 정확하게는 점이 있는 자리에 소리 나게 입 맞췄다.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자 코끝이 가볍게 스친다. 이번엔 지민이 애리를 향해 다가갔다. 거부할 수 없는 키스였다. 지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애리의 턱을 잡고 들어 키스를 이어갔다. 지민의 혀가 애리의 입속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애리는 쏟아지는 듯한 키스에 숨이 막혔다. 지민의 어깨와 허리를 쓸어내리며 도드라진 뼈의 감촉을 느꼈다. 손이 허리에 얹혔을 때 지민이 고개를 틀어 자세를 바꿔 다시 입 맞춰왔다. 숨이 차서 떨어질 수밖에 없을 때까지 둘의 키스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어졌다.
***
“미안한데 나 여자랑은 처음이라.”
침대에 걸터앉은 지민이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애리가 티셔츠를 벗다가 말고 멈췄다.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여자에게 고백할 정도면 사귀어본 경험도 있을 거라고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문제 될 일은 아니다. 애리는 마주 앉아 있는 지민의 몸을 밀어 눕히고 허벅지에 올라타 티셔츠를 마저 벗었다. 하나하나 몸을 가린 옷이 사라지고 완전한 나체가 되자 애리는 손을 뻗어 지민의 티셔츠를 말아 올렸다. 지민은 순순히 몸을 맡기고 자신의 바지와 속옷까지 벗겨버리도록 몸을 들었다. 살이 없어 가느다란 몸이 완전히 드러났다.
“나도 잘은 못해요.”
다시 맞닿은 입에선 알콜향이 옅어져 있었다. 키스하며 몸을 훑어내리는 손의 감촉에 지민은 자꾸만 숨을 참았다. 혀가 뒤엉키고, 마음이 급한지 자꾸만 이가 부딪혔다. 애리는 목덜미와 어깨, 가슴과 허리까지 입 맞추다가 지민과 눈을 맞추며 자기 손가락을 입에 넣어 빨았다. 기대감과 불안함이 뒤섞여 공기가 더욱 뜨거워진다. 준비할 새도 없이 애리의 손가락이 지민의 안쪽을 파고들었다. 긴 손가락이 들어오자, 지민은 작게 소리를 냈다. 애리는 괜찮아요? 라고 묻고 지민의 표정을 살폈다. 쉽게 들어가는 걸 보면 아프진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빠르게 움직이자 지민의 손이 애리의 팔을 붙잡는다. 멈추라는 신호는 아니었다. 잡을 게 필요했는지 뻗은 팔이 가슴을 스쳐 지나가다가 머리카락을 아프지 않게 움켜쥐었다. 애리는 얼굴을 지민의 목덜미에 파묻고 움직임을 이어갔다. 못 참겠는지 지민이 그만, 하고 귓가에 겨우 속삭인다. 애리는 멈추지 않았다. 지민이 다시 그만, 이라고 말하고도 한참을 더, 오히려 깊게 움직였다. 천천히, 천천히.
움직임이 멈추고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을 때, 지민은 모든 게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렸다고 생각했다. 고백을 한 날부터 지금까지 분명 멈춰있었는데 정신을 차리니 갑자기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둘은 잠시 포개어 있다가 애리가 몸을 일으켰다. 지민은 땀을 많이 흘렸는지 앞머리가 다 젖어서 이마에 붙어있었다. 애리는 지민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고 옆에 누웠다. 닿은 팔이 끈적거렸다. 애리가 눕자 지민이 일어나 애리의 몸 위로 올라와 포개어 붙었다. 지민의 체취와 땀 냄새가 뒤섞여 끼쳤다. 애리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주한 가슴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서툴러도 이해해 줘.”
몸을 세운 지민이 애리에게 입을 맞췄다. 뜨거운 숨결이 훅, 하고 넘어왔다. 그리곤 아까 애리가 했던 것보다 훨씬 섬세하고 정성스럽게 입을 맞추며 몸을 만진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가슴에서 오래 머물렀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한 애리는 가슴 위에 얹힌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대로 어정쩡하게 손을 대고서 지민이 고개를 들었다.
“그냥 이렇게 해버리면 후회할 거 같아.”
그 말에 오히려 죄책감을 느낀 건 애리였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지민의 눈빛이 흔들렸다. 멈추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은 누구도 멈출 생각이 없다는 것도. 애리는 지민의 한쪽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크고 빛나는 눈동자가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다. 취향과 상관없이 참 예쁜 얼굴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늦었어요.”
애리가 지민의 얼굴을 당겨 키스하자 잠시 멈췄던 시간이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다.
***
후회할 것 같다는 말과 다르게 지민은 몇 번이고 집요하게 애리를 파고들었다. 끝내 둘은 녹초가 되어 잠들었다. 일어났을 땐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지민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는 애리를 확인했다. 몰려오는 숙취에 머리가 울리고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대충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여러 번 속을 게워 내니 조금 살 것 같았다. 그사이 일어난 애리도 숙취가 심한지 식탁에 엎드려 앓는 소리를 냈다. 공복이 꽤 길었음에도 전혀 음식 생각이 나지 않았다.
둘은 한참을 앓다가 겨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애리는 친구를 만난다며 나갔고 지민은 집에 남아 어제 못다 한 일을 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을 하려고 노력했다. 전날의 일을 생각하면 노트북 화면 속 글자가 흐려지거나 흩어져 집중되지 않았다. 어제의 일도 실험이었을까. 애리는 무엇을 실험하는 걸까. 그 실험이 자신이 마음에 없는 남자들과 했던 연애와 비슷한 것이라면 좀 슬플 것 같았다.
***
민정이 본가에서 돌아온 날, 외출 후 집으로 돌아온 애리는 머리카락을 분홍색으로 염색한 모습이었다. 안 그래도 튀는 외모인데 더욱 눈에 띄는 모습이 되었다. 애리를 본 민정이 너무 예쁘다며 연신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넌 분홍색도 잘 어울린다. 나도 염색해 볼까?”
민정이 묻자, 언니는 뭘 해도 다 어울릴 거예요, 하고 답하는 애리다. 어울리지 않게 수줍어하는 표정이었다. 애리는 고개를 돌려 지민에게 언니는 어때요? 하고 물으며 자기 머리카락을 흔들어 보였다.
“예쁘네.”
사실이었다. 지민은 애리가 묻기 전부터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민정이 돌아오니 집에 활기가 생겼다. 매사에 긍정적이랄까, 해맑은 민정은 백수여도 고민이 없어 보였다. 타고난 성격은 내향적인 것 같은데 친해지면 이렇게 살가운 애가 또 없었다. 민정은 신기하게 비교적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애리와는 친구처럼 지냈고, 지민은 한없이 언니로 대하며 따랐다. 오히려 애리는 나이도 어리면서 민정을 귀여워하고 동생처럼 대했다.
지민은 어쩐지 애리와 민정 둘 사이에 있는 게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티를 내거나 자리를 피할 수도 없었다. 다만 애리도 이 상황이 불편할지 궁금했다. 민정은 한참을 종알거리다가 엄마가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다며 울상을 지었다. 계속 셰어하우스에 살 거면 월세를 내라고 했다며. 우는 시늉을 하는 민정을 보니 강아지 같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어머니, 그렇게 말하셔도 결국 너 못 이길 거야.”
강아지 쓰다듬듯 민정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바로 감동했다는 표정을 지어온다. 지민 언니밖에 없어~! 하며 민정이 와락 지민의 목을 끌어안았다. 순간 애리와 눈이 마주쳐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짓자, 질투 나니까 떨어지라는 말이 돌아온다. 지민은 이 와중에도 누구를 향한 질투일지 가늠하는 저 자신이 싫었다.
“나 없을 때 둘은 뭐했어?”
“우리?”
뭘 했다고 해야 할까. 지민이 할 말을 찾는 사이, 애리가 술 한잔했다며 손을 까딱거린다.
“뭐야, 나도 같이 마실래!”
“언니 알쓰잖아요. 그리고 우리 둘 다 소주 마시고 숙취 때문에 죽을 뻔했다고요.”
“싫어! 나도 끼워줘! 오늘 당장 마셔!”
***
민정의 고집에 시작된 술자리는 민정이 소주 3잔에 나가떨어지는 바람에 금방 끝나버렸다. 주사가 잠자기인 민정은 식탁에 머리를 박고 잠들었다. 어쩔 수 없이 애리와 지민이 겨우 부축해서 침대에 눕혔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간다니까, 애리는 그렇게 말하곤 소주 한 병을 꺼내왔다. 더 마실 거죠? 하는 물음에 지민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고생하고도 다 잊는 게 인간이다. 인간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했던가. 어쩌면 술의 힘을 빌려서 또 실수하길 바라는 음흉한 존재일지도 모르고.
“아무렇지도 않나 봐. 너랑 민정이는 그대로네.”
키스했으면서, 라는 말이 생략됐지만, 못 알아들을 애리가 아니었다. 우리도 그대로잖아요. 남들이 볼 때는, 하고 대꾸하더니 빈 잔을 채운다. 맞는 말이었다. 지민은 멋쩍게 웃었다. 금방 잔을 비우고 다시 채우려는 애리의 손을 잡았다. 천천히 마셔, 이번엔 애리가 멋쩍게 웃는다. 잡은 손이 조금 끈적거렸다.
***
결국 술기운을 핑계로 둘은 다시 지민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잠그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췄다. 취한 건 아니었다. 애리가 지민의 손을 자신의 부드러운 가슴 위로 올렸다. 얘는 뭐가 이렇게 자연스러운 걸까. 나이도 어린 게. 지민은 애리의 가슴을 약하게 움켜쥐고 키스를 이어 나갔다. 입을 맞추며 뒷걸음치는 애리를 따라 침대로 향했다. 지민은 침대에 앉은 애리를 내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머리카락의 분홍색이 선명하게 보였다.
“언니는 내가 좋아요?”
“……응.”
“내가 민정 언니 좋아해도?”
“……그런가 봐.”
“나는 언니 별론데.”
“알아.”
애리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작게 웃더니 지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예쁘면서.”
“알아.”
“알면 뭐 해요. 얼굴값도 못하고.”
지민도 애리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애리의 머리에선 염색약 냄새와 함께 낯선 샴푸 향이 났다. 둘은 잠시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다.
“싫진 않아요. 언니가 나 좋아하는 거.”
“응.”
“근데 언니가 다른 사람 좋아하면 싫을 거 같아.”
애리가 지민의 허리를 힘주어 당겨 균형을 무너뜨렸다. 지민은 힘없이 애리의 몸 위로 넘어지면서도 애리를 깔아뭉개진 않으려 노력했다.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웠다. 너무 가까워 초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지민의 머리카락이 흐릿한 애리의 얼굴 위로 물처럼 흘러내렸다. 애리는 손을 뻗어 지민의 머리카락 안으로 손을 넣었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지민은 잠자코 다음에 이어질 일을 기다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다시 이런 식으로, 의미나 애정이 부재한 섹스로 이어지는 것. 그 이상 나아가지 않는 것. 그럼에도 자신은 더욱 애리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 아무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계속 끌려가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
좋아해, 라고 지민이 말하는 동시에 애리의 입술이 닿아왔다. 너무 작게 말한 탓에 지민은 그 말을 애리가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
그 뒤로도 민정이 집을 비운 날이면 애리는 지민의 방을 찾았다. 술 한 방울 마시지 않고 몸을 섞은 날도 있었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지민은 여전히 애리의 몸을 마주할 때면 심장이 끝없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기도 했다. 귀가 빨개지는 것도 여전했다. 사랑까진 모르겠으나 좋아하는 마음은 여전했다. 좋아하기 때문에 다가오는 애리를 거부할 수 없었다. 애초에 거부할 마음이 없었을 수도 있고.
그날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애리는 뜬금없이 같이 씻고 싶다고 했다.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지만, 애리가 그러고 싶다고 하니 지민도 거절하지 않았다. 욕조에 물을 채우고 지민이 먼저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들어갈게요, 하곤 애리도 맞은편에 양팔로 무릎을 끌어안은 자세로 자리를 잡았다. 욕조가 크지 않아 비좁게 느껴졌다. 늘 불 꺼진 방에서 보았는데, 욕실은 너무 밝았다. 지민은 차마 애리의 몸을 제대로 볼 수 없어 물에 반쯤 잠긴 분홍색 머리카락만 바라보았다. 이렇게 있으니 새삼 어색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애리는 물을 튀기고 지민의 무릎을 만지며 장난쳤다. 이럴 때 보면 어린 게 맞구나 싶다.
“우리 다음에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갈까?”
지민이 묻자, 애리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말뜻을 이해 못 했다기보단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데이트 신청이에요?”
“어, 뭐, 그런가? 그렇지.”
언니 귀… 또 엄청 빨개졌어요, 하며 애리가 지민의 허벅지 위로 올라와 앉았다. 다리로 지민의 몸을 감싸며 최대한 가깝게 밀착시키더니 귀를 잘근거리며 씹는다. 귀에 닿는 생경한 느낌과 숨결에 지민은 자신의 얼굴이 더욱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여기서 할 거야?”
“싫어요?”
“아니… 좀 창피해서.”
머리 위에서 애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민은 애리가 이렇게 웃을 때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들자 곧바로 입술이 닿아왔다. 욕조에 담긴 물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그리고,
“왜 욕실 불이 켜져 있…….”
민정이 욕실 문을 열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민이 무언가 말하려 하자,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곧바로 소리쳤다.
“뭐, 뭐 하는 거야… 우리 집에서!”
그 소리에 애리가 지민의 품에서 떨어졌다. 첨벙이는 물소리와 함께 애리가 일어났다. 하얗고 깨끗한 애리의 몸이 눈 앞을 가렸다. 민정이 더럽다고 말하고 뛰쳐나가자, 애리도 망설임 없이 민정을 따라 욕실을 빠져나간다. 지민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열린 문으로 둘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어떻게 너랑 지민 언니가… 너는 나 좋다고 할 땐 언제고.”
“좋아해요, 지금도 좋아해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거 아니에요.
“…….”
“나랑 지민 언니, 그런 사이 아니에요.”
“…….”
“민정 언니 좋아해요. 네? 언니, 언니… 좋아해요.”
이어지는 애리의 고백에 지민은 공기가 부족한 것처럼 숨이 막혔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물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다. 귀까지 물에 잠기자, 모든 소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울림으로 바뀌었다. 그대로 숨을 참았다.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가 올려져 있는 것처럼 무겁고 답답했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이었다. 더는 참을 수 없게 됐을 때, 들이마셨던 숨을 모조리 내쉬었다. 눈물과 함께 가슴을 짓누르던 답답한 것들이 함께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제야 지민은 자신이 애리에게 고백한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