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 하이라이트 클립>

그럼 이제… 다음 주부터는 다시 걔네랑 다닐 거야?


우영의 미숙한 세계를 관통하는 투명한 마음. 누군가에게는 찰나였을 순간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영원으로 기억되는 경험. 투박한 성정의 우영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간질거리는 대사. 앵글은 당황으로 물든 우영의 표정을 클로즈업 한다. 이거 분명 흔해 빠진 캠퍼스 웹드라마 아니었나. 예상처럼 흘러가지 않는 스토리 전개로 우영은 패닉에 빠진다. 스쳐 지나가는 감초 조연에게 닥친 시련이라기에는 너무 가혹한 것 같습니다만 감독님……?


마음의 연못에 날아온 작은 돌멩이 하나가 걷잡을 수 없는 해일이 될 때, 미처 준비하지 못한 재난에 휩쓸리는 사람은 단연 우영이다. 그치만 한낱 조연인 우영에게 구명조끼라는 치트키는 허락되지 않았고 우영은 이 시나리오의 옥에티가 되고 마는데요.



여기서 뒤늦게 조명되는 감초 조연 정우영 군. 인물 소개는 새롭게 작성된다.


정우영(20) / 우산대 학생


“왜 꼭 한 명이랑 제일 친해야 돼? 다 같이 친하게 지내면 더 재밌고 좋지 않아? 오늘은 얘랑 놀다가 내일은 쟤랑 놀고 모레에는 또 새로운 친구 사귀면 얼마나 즐거워.”


우산대 최고 인싸. 날 때부터 주변에 사람이 넘쳤으나 정작 절친이니 베스트프렌드니 하는 것을 가져본 경험이 없다. 우영은 유치원생 때부터 ‘친구는 무조건 많으면 좋다’라는 신조로 초중고 내내 전교생이랑 친구 먹으며 지냈고 이는 대학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우영에게 너랑 제일 친한 사람 나 맞지? 너한테 이러는 사람 나밖에 없지? 니가 이렇게 구는 사람도 나뿐이지? 라고 묻고 싶은 친구가 생겨버렸다?!





섹텐네버라이 B

정우영 최산





4.


우영과 산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우영은 원래도 친구를 쉽게 사귀는 편이었지만 이토록 단기간에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경험은 최초였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처음’이 특별하게 느껴지도록 프로그래밍된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최산에게 이럴 리가 없잖아. 얘한테 특별한 무언가가 되고 싶은 이 마음을 설명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어릴 때 ‘앞으로 너랑 나랑 베프고 제일 친한 사람 물어보면 나라고 해야 돼!’ 하던 친구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우영은 제 자취방 부엌에서 한강물 라면을 제조하고 있는 산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본다.


“산아.”

“어? 라면 거의 다 끓였어.”

“아니 그거 아니고… 우리 성격이 비슷한 편인가?”

“엄청 다르지… 난 너 같은 애 태어나서 첨 본다니까 영아.”


아뜨뜨. 그 와중에 사고친 산으로 인해 우영은 다급하게 부엌으로 향했다. 손 데였어? 봐봐. 우영이 산의 손을 다정히 감싼다. 그니까 라면 내가 끓인다고 했지. 타박하면서도 연고 바르고 밴드 붙여주고… 다 큰 남자애 손 데인 게 뭐라고 마음이 속상했다. 너 앞으로 우리 집 부엌 출입 금지야. 뜨거운 냄비를 맨손으로 잡으면 어떡하냐며 우다다 잔소리를 쏘아대는 우영을 끊어낸 것은 산의 핸드폰이었다. 됐다 됐어. 얼른 전화나 받어. 으으으응.


“여보세요.”


응? 어... 나 그냥 우영이 집에 있지. 내일? 아니… 안 되는 건 아닌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걸 보니 답이 나온다. 또 누가 귀찮게 구는 모양이지. 


산은 친구가 늘었다. 우영과 친해지게 되면서 우영의 주변 사람들과도 자연스럽게 안면을 트고 간간이 술자리에도 얼굴을 비추다 보니 점차 대학 내 인간 관계가 넓어졌다. 친해지고 싶었는데 무서워 보여서 말을 못 걸었다는 뻔한 레퍼토리. 쉬는 시간마다 산을 찾아오는 동기들을 보며 우영은 코웃음 쳤다. 야 이 바보들아 최산은 무섭게 생겼다는 말 완전 싫어해. 철옹성 같던 최산의 철벽을 뚫어낸 게 누구인데 왜 다들 이제 와서 아는 척 친한 척이냐고. 우영은 괜스레 짜증이 치밀었다.


우영이 전화를 끊은 산에게 묻는다. 누구야?


“A가 내일 시간 되냐고 영화 보쟤.”

“아 그래?”

“어.”

“뭐 보는데?”

“스파이더맨. 너 이거 아직 안 봤지?”

“무슨 소리야. 엊그제 봤다니까.”

“진짜? 안 되는데… 그럼 다른 영화 보자고 해야겠다.”


어…?


“야 설마 나도 같이 보는 거였어?”


무슨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산이 눈을 꿈뻑거린다. 그리고 잊고 있던…… 자신이 산과 친해진 이유이자 목적. <A와 최산 이어주기 러브러브 프로젝트>. 우영은 본인이 빠져야 하는 타이밍이라는 걸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음에도 저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산에게 ‘뭐래 너네 둘이 봐야지ㅋㅋㅋ’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5.


그렇게 다음날 오후 다섯 시 롯데시네마 2 상영관. A와 산 그리고 우영은 한 공간에서 공포영화를 관람하게 된다.


떨떠름한 표정의 A를 애써 못 본척한 우영은 일말의 양심으로 팝콘과 콜라를 계산했다. 상영관에 들어선 셋은 자연스럽게 A와 산 그리고 우영 순으로 자리에 앉게 되었고 우영은 둘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모두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

최산은 귀신을 무서워한다. 어두운 것도 무서워한다.


시시각각으로 들썩이는 어깨. 귀신이 등장하는 장면마다 산은 반사적으로 우영을 바라봤다. 긴장감을 유발하는 장면에서는 우영의 손목을 쥐었고 잔인한 광경이 나올 때는 우영의 뒤로 숨었다. 옆에 앉은 A가 차갑게 식어가는 동안 우영은 다른 의미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손목을 꽉 쥐는 걔를 떼어내고 싶지는 않아서 우영은 이 상황을 가만히 방관하고 만다. 감히 조연 주제에.


영화가 끝난 뒤 A는 굴하지 않고 술자리를 제안했다. 이렇게 집에 가기는 역시 아쉬웠던 모양이지. 우영은 이제 정말 빠져 줘야 하는 타이밍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나는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볼 테니까… 그때 A가 맹렬한 눈빛으로 고개를 젓는다. 그러고는 입모양으로 ‘여기서 빠지면 뒤진다’. 우영은 찰나의 살기를 느끼고는 다급히 말을 바꿨다. 아니다취소취소나갑자기배고픔.


평소에 자주 가던 술집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아는 얼굴이 여럿 앉아 있었다. 아… 이것까지도 계획된 거였구나? 자연스러운 합석으로 술자리는 어느새 일곱 명이 가득 채워졌다. 우영이 담배를 챙겨 일어서자 A가 같이 나가자며 뒤따라 일어났다.


“야 정우영.”

“엉.”

“니가 보기에도 가능성 없어 보여?”

“음… 아무래도?”


A가 깊은 한숨을 내뱉는다.


“매일 카톡 하긴 하는데 딱히 진전도 없고… 난 그냥 최산 속을 모르겠다.”


매일 카톡 하는 줄은 몰랐는데. 왜 하필 이게 귀에 꽂히는지 우영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좋게 말하자면 독특한 건데 까놓고 말하면 답답해. 연애 생각 아예 없는 애 같기도 하고. 너 혹시 산이한테 씨씨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본 적 있어?”

“없지.”

“그럼 이따 좀 자연스럽게 물어봐 줘. 씨씨에 거부감 있다고 하면 걍 접게.”

“알겠다.”


대화를 끝마친 A가 먼저 들어가고 홀로 자리에 남은 우영은 담배 두 대를 연달아 태웠다. 이러면 답답한 속이 좀 괜찮아질까 해서. 기대와 달리 더 탁해지기만 했지만.


자리로 돌아온 우영은 제 옆자리에 최산이 아닌 다른 이가 앉아있는 것에 짜증을 느낀다. 잠깐 사이에 옆 테이블에서 산을 데려간 모양이다. 모두에게 둘러싸여 어색한 웃음만 짓고 있는 산을 보며 우영은 외면하고 있던 마음을 점차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명백한 질투였다. 색깔이 분명해진 감정을 목도하고도 모르는 색이라 치부할지언정 빛이 바래는 건 아니니까. 외면하는 사이에 점점 채도만 짙어지는걸. 그치만 질투의 방향은 아직 가늠이 안 됐다. 이게 말로만 듣던 친구 소유욕인가 싶기도 하고. 다들 최산한테 자꾸 아는 척하고 친한 척하는 게 왜 기분 나쁜 건지.


자리가 떨어진 뒤로 줄곧 최산만을 응시하던 우영은 산이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걸 목격하곤 반사적으로 함께 일어났다. 야 최산 어디 가? 화장실. 나랑 같이 가. 우리가 여자애들도 아니고 뭘 같이 가아. 푸스스 웃으면서도 우영을 말리지는 않는다.


화장실에서 나온 뒤, 산을 다시 자리로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우영은 산을 데리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눈도 못 뜨고 걷는 딸기 하나를 부축하려니 땀이 줄줄 샜다. 야 최산 똑바로 걸어. 성 붙여서 부르지 마.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게 누가 들어도 취중 대화였다. 편의점 의자에 산을 앉혀 두고 혼자 계산을 마친 우영이 산의 입에 메로나를 물려 준다. 이 시려… 먹고 얼른 깨기나 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산이 우영에게 묻는다. 우영아 너는 왜 멀쩡해?


“나?”

“응. 너 항상 술 마셔도 멀쩡하잖아. 취한 거 본 적 없는 것 같아서.”

“취할 것 같으면 몰래 술 버리니까.”

“와… 비겁하다.”

“니처럼 취하는 것보다는 나은 듯.”


이후로 대화 없이 얌전히 메로나만 베어먹던 산이 주변을 힐끔거린다.


“왜.”

“또 누구 편의점 올까 봐.”

“누구 오면 안 돼?”

“그럼 다시 들어가야 되잖아.”

“다시 들어가도 내가 너 취했다고 술 먹이지 말라고 할게.”

“아니… 술 마시기 싫은 거 아니고 그럼 너랑 또 자리 떨어지잖아.”


얘는 진짜 뭘까. 우영은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는 기분에 산의 메로나를 뺏어든다. 크게 한입 베어 물어도 어지러운 머리는 도통 나아지질 않았다. 그런 혼란한 세계 속으로 날아드는 아까의 대사. 너 혹시 산이한테 씨씨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본 적 있어? 우영은 더 이상 NG 내고 싶지 않았다. 민폐 조연으로 욕먹기 싫었다. 조연은 조연답게. 우영이 준비된 대사를 입 밖으로 내뱉는다.


“산아.”

“응.”

“너 씨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눈에 띌 정도로 어깨를 떤 산이 우영을 휙 돌아본다. 뭐라고?


“씨씨 어떻게 생각하냐고. 할 생각 있어?”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왜 물어보는데?”


예상과 다른 예민한 반응에 우영은 당황하고 만다.


“아니 그냥 궁금하니까 물어볼 수도 있지.”

“너 씨씨 하고 싶어?”

“야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입술을 푸우우 내민 산은 한참 동안 대답을 망설였다. 이게 뭐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라고?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우물대던 입술이 내뱉는 대답.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와 다르게 산의 눈동자는 우영을 또렷히 응시한다.


“하면 하지 나는……”

“…… 그래?”

“응.”

“그렇구나.”


둘 사이에 감도는 정적. 산은 무언갈 기대하는 표정으로 우영을 바라본다. 지금이 타이밍이니까 얼른 말하라는 듯. 그러나 A에게 이 사실을 전해 줄 생각으로 속이 복잡해진 우영은 이 중요한 장면을 놓치고 마는데요. 아아… 이 드라마 어째 점점 산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6.


사람들이 우영에게 갖는 편견 하나. 타고난 활발함과 뛰어난 붙임성의 기반이 담백하고 쿨한 성정일 것이라는 예상. 그러나 우영은 본디 예민한 성정을 갖고 태어났다. 신경 쓰이는 문제가 생기면 그것만 죽어라 파고든다. 때로는 한없이 침울해져 혼자만의 시간에 스스로를 가둔다. 나약한 면을 잘 숨길뿐 우영도 남들과 똑같은 미숙한 스무살이라는 것이다.


A는 우영의 말을 듣고 뛸듯이 기뻐했다. 정말? 씨씨 하면 하는 거라고 했다고? 드디어 조연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데 왜 전혀 뿌듯하지가 않지.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감정들이 늘어가니 속내는 자꾸만 시끄러워지고 우영은 점차 예민해진다. 토요일에 산과 단둘이 한강에 가기로 했다는 A의 말에 차마 응원이 나오지 않는 것만 봐도 우영의 상태는 심각했다. 비나 실컷 내렸으면 좋겠다는 못된 마음이 들자 우영은 자괴감에 빠진다. 나… 나 왜 이렇게 꼬였지?



토요일. 우영의 바램을 비웃는 것처럼 서울의 하늘은 맑고도 파랬다. 살랑이는 봄바람은 덤. 이런 날 단둘이 한강? 아주 연애플레이리스트를 찍으세요. 오늘 한강 가면 앉을 자리도 없고 치킨 배달 두 시간 걸릴 듯. 나는 포근한 우리 집에서 배민으로 후참잘 시켜먹고 배그 때리다가 마블 페이즈 1부터 정주행 해야지. 이런 게 완벽한 주말 아니겠냐고. 그러나 혼자 시켜먹은 치킨은 양이 너무 많았고 혼자 하는 배그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으며 혼자 보는 마블은 함께 성대모사 하며 키득댈 누군가가 없어서 보다 꺼버렸다. 모든 의지를 상실하고 침대에 벌러덩 누운 우영은 줄곧 누르고 삼키던 속마음을 내뱉고야 만다.


보고 싶어. 너 없는 주말이 너무 지루해.


산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노려보던 우영은 고민에 빠진다. 나 빼고 한강 가니까 재밌냐고 물어볼까. 근데 너무 주제넘는 발언 아닌가. 데이트 중에 연락하는 것 자체가 방해긴 하지. 삼십 분을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우영은 결국 억지로 잠들기를 택했다. 핸드폰 전원까지 끄고 세상과의 단절을 꿈꾸며.


이번에는 우영의 바램이 먹힌 걸까. 우영은 밤 열두 시가 지나고 일요일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와…… 진짜 오래 잤네. 침대 밑으로 떨어진 핸드폰을 주워들고 전원을 켠다. 쏟아지는 알림들. 어디냐 나와라 술 먹자 어쩌고 저쩌고. 별 의미 없는 연락들 사이에서 우영은 기다리던 이름을 발견한다. 매너콜 5통과 함께. 마지막 부재중 시간이 불과 오 분 전이었다.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른다.


—여보세요.

“왜 전화했어.”

—그냐앙…… 너 뭐 하나 하고. 왜 전화 안 받았어?


괜한 자존심 때문일까? 너 없이 보내는 주말이 싫어서 일부러 잤다는 말은 해 주기 싫었다.


“어… 뭐 좀 하느라.”

—바빠서 못 받은 거지? 다른 이유 아니고?

“응.”

—그래.


왠지 산의 목소리가 시무룩해진 것만 같았다. 일개 조연의 착각일지라도 우영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지금 어디야?

“집이지.”

—그럼 있잖아… 나 오늘 너희 집에서 자도 돼?

“지금? 너 어딘데?”

—나 지금 너희 집 문 앞인데.


뭐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우영이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자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최산이 보인다. 왜 여기 있냐고 언제부터 있던 거냐고 묻고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때 둘 사이에는 낯선 어색함이 감돌았는데 백그라운드 뮤직 하나 없이 견디기에는 너무도 날카로운 정적이었다. 우영과 산은 순간적으로 같은 감정을 공유한다. 세상에서 제일 편한 친구였던 니가 지금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너도 그래? 나만 이러는 거야?


그냥 자고 가라고 해도 열한 시 반만 되면 칼같이 짐 챙겨 나서는 누구 덕에 동침은 처음이었다. 샤워 후 우영의 옷을 빌려 입은 산이 뻔뻔하게 침대로 올라간다. 내려오라는 우영의 말에도 무대뽀로 목까지 이불을 덮는다. 나 바닥에서 못 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우영이 불을 끄고는 산의 옆에 누웠다.


“기숙사 통금 지날 때까지 뭐 했냐.”

“몰라도 돼.”

“사실 나도 별로 안 궁금했어.”

“우영아, 너 진짜 짜증나는 거 알아?”

“시끄럽고 얼른 주무시기나 하세요.”


우영은 어서 잠에 들고 싶었다. 옆자리로 온 신경이 가닿는 지금 상태가 위험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러나 낮잠의 여파로 정신은 점점 또렷해져 왔고 우영은 소리 없이 혀를 깨물기에 이른다. 저를 바라보고 누운 산의 숨결이 자꾸만 볼을 스쳤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제발 그냥 얌전히 자라 산아…… 속으로 간절하게 기도하던 우영은 결국 산을 등지고 돌아눕기를 택했다.


“야아.”

“……”

“자? 영아 진짜 자?”

“……”

“나 아직 잠 안 온단 말이야. 자지 마. 응?”


등을 쿡쿡 찔러대는 손가락. 이렇게 된 이상 저도 장난으로 응수하는 수밖에. 산을 간지럽힐 생각으로 돌아누운 우영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리는 산의 눈동자를 마주한다. 숨이 멎는듯한 기분. 자석처럼 따라붙은 시선은 걔의 눈동자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그래.

이날부터였어.


관계의 변곡점이 찾아온 최초의 순간. 너와 키스하고 싶다는 미친 생각을 했던 첫 시작은 이때였구나, 우영은 깨닫는 것이다. 정우영의 인생에 최산이라는 인물이 등장한 첫 시점부터 여섯 개의 에피소드를 지나고서야 과거 회상은 종료된다.





그리하여 현재. 모든 사건을 필름처럼 주르륵 상영한 뒤 내린 결론.


아무래도 나 최산 좋아하는 것 같지.

이거 친구 아닌 것 같지.

어떤 미친새끼가 친구 상대로 이래.

나 너랑 그렇고 그런 짓 전부 하고 싶어졌는데 우리 앞으로 어떡하냐 산아.


알콜 기운에 용기 빌려 한다는 말이 고작 ‘나 너무 속상해’인 바보. 몸에서 말랑한 곳이라고는 볼밖에 없는 주제에 걔를 이루고 있는 성분들은 전부 간질거리고 말랑한 것들뿐이다. 현관에서 기절한 산을 침대로 옮긴 우영이 산의 볼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린다. 당장이라도 깨워서 좋아한다고 말해 줄까. 서운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너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고. 내 마음을 나도 잘 몰라서 그랬다고. 너만 괜찮다면 우리 이제 친구 말고 다른 거 하자고.


스무살 정우영에게 있어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것들은 꼭 남의 드라마 같았다. 저와는 거리가 먼 장르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로맨스물을 꿈꾸며 온갖 미팅에 참석할 때, 우영은 동아리 형들과 소년만화의 절정이라는 스포츠물이나 찍어댔으니까. 그렇기에 더 환상이 컸던 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순간은 반드시 영화의 한 장면 같으리라 생각했거든. 사랑에 빠지는 장면에서는 반드시 둘만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 재생될 줄 알았거든. 이렇게 자각도 없이 번져가듯 시작되는 게 사랑인 줄 몰랐어. 바보는 아무래도 나였나 봐 산아.


우영의 마음이 빨간색으로 깜빡거린다. 테이프는 교체되었고 우영은 비로소 주연이 된다. 온에어였다.





다음 시간부터는 신작 드라마가 방영됩니다.


<잘못된 만남>

감독: 정우영

주연: 정우영, 최산

줄거리: 친구의 짝사랑 상대인 산을 좋아하게 된 우영.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이미 좋아진 마음은 돌이킬 방법이 없다. 유턴을 모르는 남자 우영은 산에게 멋지게 고백하기로 결심! 그러나 산은 갑작스레 우영을 피하기 시작하는데… 과연 우영의 첫사랑은 성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