寄り酔い - 和ぬか 

제트별 -  f(x)

I see... - 乃木坂46 




최수빈 최범규 




수빈은 생각한다. 무엇이 더 최악인지. 지독한 기후위기 속 체감 온도 36도까지 치고 오른 한여름 땡볕 아래 쿰쿰한 냄새 밴 인형탈 알바를 하고 있는 것이 최악일까. 그 인형탈 대가리가 날아가 미취학 아동들이 훤히 드러난 제 얼굴을 보고 단말마 비명을 깩 지른 것이 최악일까. 그것도 아니면 대가리 주워 수습도 못하고 최범규 앞에 무릎 꿇은 것이 최악일까. 아니면, 앞선 것들이 전부 아니라면 혹시 모든 광경을 목격한 지나가던 행인1이 최연준이라는 것이 최악일까. 짧은 시간 수많은 후회가 폭주한다. 그냥 와앙 울어버리고 싶다. 



1. 확실한 해열제가 필요해 

그날은 수빈이 고대하던 귀멸의 칼날 극장판이 개봉하던 날이었다. 평소 귀멸의 칼날을 꼬박꼬박 챙겨 보는 애청자는 아니었지만 극장판 제작을 유포터블사에서 한다는 정보를 봤을 때 가슴께가 저릿했다. 가까운 지인들이 귀멸의 칼날을 추천할 때만 하더라도 남들이 다 볼 때 보는 건 좀 호들갑 떠는 것 같다 생각하며 반려했다. 그러나 유포터블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생동하는 작화를 보는 것만 하더라도 큰 의미가 있었다. 찾아 보니 귀칼 TVA도 유포터블에서 전담했다. 수빈은 왓챠 검색창에 귀멸을 검색하고야 만다. 솔직히 이러면 봐야 하잖아. 만화책을 샀고 애니메이션을 정주행했다. 날밤을 새고 보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친한 동생 휴닝카이에게 카카오톡을 남겼다. 답장이 오던지 말던지 일단 말할 곳이 필요했다. 뜨거운 시간이었다. 좋고 싫음이 분명한 수빈은 한번 좋다 느끼면 극단을 달렸다. 자다 깬 휴닝카이는 별안간 쏟아진 카카오톡 테러를 바라보며 극장판 같이 보러 갈래요? 던져 봤다. 수빈은 0.5초만에 대답했다. ㅇㅇ. 그렇게 일사천리로 이뤄진 귀멸의 칼날 극장판 관람용 만남은 사적인 알맹이는 전혀 없었다. 영화 시작 20분 전, 각자 아이스 아메리카노 사들고 앉아 있는데 휴닝카이는 최근 리메이크 된 애니메이션 이야기에 한창이었고 수빈은 그 이야기를 대충 들으며 최범규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배너 알림으로 읽었다.


[형뭐해요]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형밤에뭐해요]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형]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밤에피방갈래요?]


피시방 같이 가자는 이야기를 존나 어렵게도 했다. 보냈다 지웠다 반복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할 말을 정하고 보내야 되는 거 아닌가? 어이없다니까. 그런데도 수빈은 최범규 속 훤히 보이는 수작질에 다 넘어갔다. 싫지 않았다. 주변을 맴도는 최범규는 귀여웠다. 성가시게 구는 일도 잦았지만 절대 미운 짓은 안 했다. 제대로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아 숙제처럼 미뤄 뒀지만 마음 한켠으로는 지독하게 신경 쓰고 있었다.


[라면니가사]


답장 날리자마자 바로 비행기 모드. 목적한 바 달성하고 방방 뛰고 있을 최범규 뒤통수가 떠올랐다. 


엔딩 크레디트를 바라보며 울던 수빈은 아무래도 VOD가 나오면 사야겠다 결심했다. 옆에 앉은 휴닝카이는 수빈보다 더했다. 누구 떠나 보낸 것처럼 엉엉 울다가 조용히 한마디 했다. 뜻이 있는 남자는 멋있는 것 같애용. 어, 완전 동감. 물에 불린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둘은 저마다의 모험을 한 것처럼 결의에 찬 눈빛이었다. 우리 저녁 먹을 거예용? 어, 나 배고파. 극장 나와 비행기 모드 풀고 최범규에게 와 있는 톡 확인했다. 깜찍하게 생긴 곰돌이 이모티콘. 실제로 말하는 걸 보면 우악스럽고 무뚝뚝한 구석이 있는데 애교가 많았다. 허, 이모티콘이랑 좀 닮았나.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옆에 서서 구경하던 휴닝카이가 한숨을 푹 뱉었다.


"횽. 아직도 범규 형이랑 그냥 그런 상태예요?"

"뭐가 그냥 그런데?"

"진전이 없냐고요."


정곡을 찌른다. 야, 니가 그걸 왜 궁금해하냐? 깜짝 놀라 초롱초롱 눈빛의 휴닝카이의 어깨를 밀쳤다. 힘 없이 밀려났다. 골치 아프네. 꼭 뭐가 되어야 하는 건가? 별로 그럴 마음 없는데. 의욕도 없고 자신도 없다. 매니저한테 깨지고 빌빌거리면서 우는 거 달래 줬다. 실수하면 커버 좀 쳤다. 최연준까지 셋이서 알바끼리 회식하다가 집 가는 길 데려다줬다. 그냥 친절하게 군 거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대했다. 특별하게 군 적 없었다. 맹세코 그랬다. 그런데,


"범규 형이 형 좋아하잖아용."


그러니까 그게 문제였다. 최범규가 최수빈을 좋아한다. 이미 잘 아는데도 제3자에게 육성으로 들으니 새롭다. 지구는 둥글다. 최범규가 최수빈을 좋아한다. 막막한 사실이다. 샤브샤브 육수 부글부글 끓는데 수빈은 고기 건질 생각 못했다. 범규형이형좋아하잖아용.범규형이형좋아하잖아용.범규형이형좋아하잖아용. 밥 먹기도 전에 위장에 최범규가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울렁거려. 양배추, 청경채, 소고기. 순서대로 템포 안 잃고 열심히 건져 먹는 순수한 얼굴의 휴닝카이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넌 지금 밥이 넘어가? 난 니가 한 말 때문에 입맛이 뚝... 야, 소고기 2점은 에바지. 선 넘네? 젓가락으로 휴닝카이의 밑장빼기를 저지했다. 다행이었다. 귀한 샤브샤브 앞에 두고 최범규 생각에 압도되어 식욕 잃는 일이 생기는 줄 알았다. 수빈은 최범규 때문에 굶고 싶지 않았다. 그건 꼭... 사랑에 빠진 사람 같으니까. 최범규에게 휘둘리는 것 같으니까. 정신 못 차리고. 

야무지게 볶음밥까지 추가한다. 누가 보면 영화에 나오던 혈귀는 둘이 잡아다 죽인 것 같았다. 최범규 이름 들을 때마다 화들짝 놀라는 수빈 앞의 쫄지도 않고 최범규 이야기를 계속 꺼내는 휴닝카이. 귀멸의 칼날 보고 온 사람들 입에서 나온 건 시시한 현실 이야기밖에 없다. 근데 있잖아여. 형 치고는 카톡을 너무 정성스럽게 하는 거 같은데용. 평소 템플 스테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연락이 뜸한 수빈 버릇에 익숙해진 사람의 지적이었다. 제 카톡은 맨날 씹잖아용. 수빈은 그제서야 채팅창 바닥에 처박힌 사람들의 메시지 알림들을 들여다봤다. 최연준의 사흘 전 메시지, 강태현의 일주일 전 메시지, 학교 동기의 보름 전 메시지 등등. 이미 늦었다는 걸 알기에 확인해 볼 용기도 안 났다. 영혼 없이 머리로 사과 때리는 동안 최범규 메시지가 왔다.


[저20분뒤에도착해여]


손가락이 자동반사로 최범규 메시지를 눌러 확인했다. 쳐다보는 휴닝카이의 오바 떠는 목소리. 우왕, 차별한당. 


[ㅇㅇ나도곧갈거야]


눈 반쯤 뜨고 힐난하는 휴닝카이를 뒤로 하며 수빈이 윙크 했다. 

선선한 바람 부는 밤에도 전속력으로 뛰어 등에 땀이 났다. 냉방 설비 빵빵한 피시방 은총 누려 볼까 싶어 급하게 계단을 세 개씩 밟아 뛰어 올라와 문 열어제꼈다. 그런데 최범규는 롤 로그인도 안 하고 모니터 앞에 두고 꾸벅꾸벅 졸고 앉았다. 얘 좀 봐라? 수빈은 위아래로 아슬아슬 움직이는 정수리를 구경하며 옆자리에 앉았다. 이건 예상 못했는데. 대학가 근처 피시방이라 오후보다 더 시끄러웠다. 그런데도 뒤척이지도 않았다. 자는 걸 깨우자니 딱하고 자는 사람 옆에 그대로 두고 혼자 게임하자니 그건 처량해서 싫었다. 야, 최범규우. 니가 나 불렀잖아. 괜히 어깨를 툭툭 찍어 밀어봤다. 미는대로 살랑살랑 밀리는 무게 없는 몸. 


"범규야."

"최범규우우."


어깨 잡고 흔드니 그제서야 눈을 꿈뻑거렸다. 잠깐 졸았는데 최범규 코가 통통 부었다. 이런 거 절대 안 놓치는 수빈이 잽싸게 휴대전화 꺼내 줌 당겨 사진을 여러 장 찍어댔다. 아, 뭐해요. 잠 투정 섞인 낮은 목소리. 느리게 움직이며  수빈의 손에 있는 폰 뺏으려 들었다. 때 맞춰 수빈이 훌쩍 피했다. 


"야, 최범규. 너 2시간이나 잤어."

"어? 어?"


놀란 최범규가 순진하게 어떡하냐고 울상이 되는 동안 수빈은 웃었다. 있잖아, 범규야. 


"사실... 10분 지남."


퍽. 퍽. 퍽. 최범규가 수빈의 팔뚝을 가격했다. 아, 놀랬잖아여. 난 또 내가 엄청 오래 잔 줄 알았다고여. 먼저 시작하면 시간 애매해질까 봐 기다린 건데. 진짜... 아픈 팔뚝 부여잡고 있는 수빈을 두고 최범규는 억울하다며 찡찡댔다. 그러게 사람 불러 놓고 졸고 있으래? 로그인이나 해. 최범규 앞에 놓인 마우스를 툭툭 건드렸다. 눈 벅벅 비벼대며 최범규가 콜라와 참깨라면을 주문 메뉴에 담았다. 이거 말고 더 먹어여? 아니. 나 밥 먹어서. 우와, 난 일부러 안 먹었는데 개치사하네. 다시 참깨라면을 메뉴에서 쓱 빼더라. 그리고는 육개장으로 바꿨다. 너 그걸로 저녁 돼? 몰라여. 먹어 보고. 말이 툭툭 뱉어졌다. 성질난 최범규 지 기분 티낼 때 자주 저랬다. 보고도 수빈은 대수롭지 않게 굴었다. 보고 있자면 귀엽기는 한데 짜증도 났다. 최범규는 그걸 두 개 다 했다. 가성비 지리는 최범규.


"아... 우리 정글 뭐함?"

"범규야. 정글 탓은 좀."


게임 시작하고 40분. 슬슬 잠 기운 가셨는지 모니터 보며 들들 볶아댄다. 익숙해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게. 얌전히 핑 찍는대로 오지. 알아서 한다고 들어갈 때부터 알아봤다. 일 쳐놓고 정글 탓을 한다. 


"수비니 형. 오늘 쫌 하네여."

"어. 지금 형이 범규 똥 싼 거 다 처리 중."

"아, 쪼옴..."


게임 집중하면 말이 없어지는 수빈과 달리 최범규는 싸이퍼라도 하는 것처럼 말 많았다. 이거 디스코드 했으면 귀에서 피 났겠다 싶어 오싹해질 정도. 왼쪽 청력을 잃어가며 게임을 전반적으로 캐리 중이던 수빈은 이제 정신력이 후달렸다. 야, 최범규. 오늘 왜 이렇게 안 하던 실수를 자꾸 해. 너 잘하잖아. 왜 자꾸 킬 따이러 들어가냐고. 에어컨 정상적으로 돌아가는데 열이 받아 더워질 지경이었다. 걍 넷마블 사천왕이나 하자고 해? 메이플이나 하자고 해?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애 좀 달랠 요량으로 슬쩍 쳐다보니 불만스러운 부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까치처럼 떽떽거리더니 일시정지 상태였다. 


"범규야."

"형."


서로 동시에 불렀다.


"어...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너 먼저 해."


침 꼴깍.  


"저 형 좋아해요."


순간 5초 정지. 되묻기도 민망해 수빈이 눈짓으로 뭔 소리냐는 신호를 보내니 땡그랗고 진한 눈을 크게 뜨고 위협했다. 고백한 사람이 저를 되레 협박하려 들자 수빈의 숨이 막혔다. 와, 좀 얼탱이 없는데? 눈 찌르는 앞머리를 손으로 털어냈다. 롤 조져 놓고 지금 고백 공격으로 무마하는 거야? 어그로 분산하는 거냐고. 그보다 왜 하필 지금인지 알고 싶었다. 어차피 휴닝카이가 알 정도면 말 다 했다. 매일 쏟아지는 메시지들과 틈만 나면 같이 저녁 먹자, 게임하자 약속 잡아대던 적극성. 놀라지는 않았지만 타이밍이 뜬금없어 기운 빠졌다. 급발진도 정도가 있는 거 아닌가. 찬물 끼얹은 듯 잠잠해진 수빈을 두고 최범규가 안절부절 다리 떨었다. 정신 사나웠다. 수빈은 손으로 최범규 무릎을 꽉 잡았다. 


"알아."

"헐."


안다는 대답에 최범규가 화들짝 놀랐다. 김 빠진 콜라를 벌컥벌컥 마셨다. 언제부터 알았어요? 아, 알면 미리 말 좀 해 주지. 그걸 왜 말해? 아니, 어떻게 말해? 말해 줄 수도 있죠. 왜 말 못해요? 너 나 좋아하지? 언제부터야? 이런 식으로 물어보면 되잖아여. 야, 잠깐만. 아이씨... 내가 좋아하는 거 알면서 그런 거였어. 하... 근데 막 잘 자라고 답장해 주고. 밥 먹었냐고 물어보고... 하트도 막 붙여 주고. 최범규의 공백 없이 이어지는 넋두리에 수빈은 뭐라 대꾸할 틈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 실시간으로 죄인 되어가고 있었다.


"후웅. 그래서 그렇게 다정했구낭."

"말투가 왜 그래."

"헤헤헤."

"말투가 왜 그러냐고."

"이제 다 알겠오."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그리고 하트 붙여 준 적 없는 것 같은데. 하트 이모티콘 쓴 적 없는데. 오해 살 일 하기 싫은 수빈은 그런 이모티콘 사용에 철저했다. 철두철미했다. 최범규가 착각해도 단단히 착각한 것 같았다. 수빈은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다. 슬슬 둘 주변을 꾸미는 분홍빛 하트 프레임을 피하고 싶었다. 도망갈래. 이거 아닌 것 같아. 


"안 돼."


한창 환상에 빠져 있는 최범규의 얼굴. 다른 사람이라면 개소리 말라며 질렀을 텐데 최범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차마 그런 말이 안 나왔다. 떼쓰면 못 이기겠다. 도대체 왜. 일단 안된다는 서두 열어 놓고 두 눈 꼭 감았다. 하... 무슨 말이라도 해야 돼. 롤을 이따위로 하는 애랑은 못 사귀겠다고 하던가, 스파이더맨이 거미한테 물린 거면 닥터 스트레인지는 뭐에 물린 거냐고 묻는 애랑은 못 사귀겠다고 하던가, 뭐든 변명거리를 찾아야 해... 번들거리는 최범규 시선 피해 눈 감아 시야 차단한 수빈의 속은 엉망진창이었다. 꼭 누가 들어와서 어지럽혀 둔 것처럼. 아무튼 안 돼. 절대 안 돼. 무조건 말려야 했다. 그렇게 다짐했는데,


"아, 왜애애애애애!!!!!!"


최범규가 벌떡 일어나 소리 질렀다. 성량 좋아 듣는 귀가 얼얼했다. 최범규 만나러 피시방 들어온 순간부터 계속 예상 밖의 상황에 뒤통수 얻어 터지고만 있었다. 왜 이렇게 돌발 행동만 하는 거지? 범규야. 앉아 봐. 사람들 쳐다보잖아. 졸지에 미어캣 된 피시방 고객들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좀 조용히... 여기가 1호선도 아니고 네가 이러면 안되는 거야. 수빈이 덩달아 일어나 최범규 어깨 붙잡고 간곡히 요청했다. 범규야... 제바아알... 


"힝..."


고함 지르는 걸 앉혀 놓으니 눈물을 뚝뚝 흘렸다. 


"형은 나 안 좋아해요?"

"좋아하지."

"그럼 됐네."

"그거랑 그거랑 다르지..."

"아, 장난 치지 말고요."


장난 아닌데. 송은이 성대모사 아닌데. 눈물 콧물 짜는 최범규 얼굴은 축축했다. 둘 꼬라지를 보면 저만 나쁜 개새끼인 것만 같다. 엉엉 우는 최범규를 보면 마음이 안 좋다. 불편하다. 어르고 달래고 싶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아. 그렇지만 모든 일을 마음 가는대로 할 수는 없는 거다. 크게 심호흡. 


"일단 너 그만 좀 울어."


카운터 티슈 여러 장 얻어와 최범규 얼굴에 묻은 물기를 슥슥 닦아냈다. 뭐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고 뭐하러 온 건지는 더 모르겠다. 손 움직이는대로 최범규는 알아서 고개를 틀었다. 얼씨구. 이런 거 익숙하다는 듯이 구는데 귀엽고 기가 차는 부분. 


"범규야."

"웅."

"형한테 시간을 좀 주면 안될까."

"왜여."

"그냥 좀."

"왜여."

"야."

"왜여."

"하... 그래 이런 거... 시간 좀 주라."


새침한 표정으로 최범규가 수빈을 빤히 쳐다봤다. 이해가 안된다고 몇 마디 쏘아붙였다.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왜 말 못해요? 들들 볶아댔다. 수빈은 웃기만 했다. 그냥 네가 좀 이해해 주라. 내가 단계가 있어서 그래. 내가 걱정이 많아서 그래. 그냥 원래 그래. 내가. 변명도 안되는 말이 둘 사이를 이었다.


"알았어여."


그제서야 수긍하는 최범규. 표정은 여전히 풀지 않은 채.


"대신..."


뜸을 들이며 사이를 좁혀왔다. 허리를 쭉 당겨 수빈의 귓가에 입을 갖다대는 최범규. 귓속말로 속삭였다. 


"이따 집에 갈 때 손잡아 주기."


아, 어이없어. 진짜. 왜 이렇게 뻔뻔한 거냐구. 


"너 내 말 듣기는 한 거야?"



2. 첨삭의 고통 

스물다섯 연준은 올해로 매장에서 일한 지 딱 2년이 됐다. 주말 오픈만 도맡아 일한 것을 시작으로 적성에 맞아 평일 타임까지 근무 일정을 더 받다 보니 유사 직원이 됐다. 1층 채우고 2층도 반절을 가지고 가는 여성복 매장의 넓은 면적에 비해 남성복 매장은 조촐했다. 실제 근무 강도도 달랐다. 남성복 직원들은 본래 업무 보는 것보다 여성복 매장의 흡사 전쟁터 같은 풍경을 쳐다보고 있다가 용병으로 차출 당하는 일이 더 많았다. 처음 3개월은 혀 꽉 깨물고 매장 바닥에 쓰러지고 싶었다. 나 죽겠어요. 큰 매장의 얼마 없는 남자 직원 그것도 막내였기 때문에 이리 불리고 저리 불렸다. 불리기만 하면 다행인데 별것도 아닌 걸로 존나 닦였다. 대답을 작게 했다, 늦게 했다, 수량 체크를 이상하게 했다 등등.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매번 고개 숙이고 죄삼다 죄삼다 죄삼다 다음부터 제대로 처리하겠습니다 무한 반복. 그때 연준을 구워 삶았던 직원은 몇 개월 뒤 나갔다. 드디어 팔자가 펴려나 보다 할 때 최범규가 들어왔다. 새로운 막내가 된 최범규는 바로 직전 막내였던 연준의 소관이 됐다. 너 최 씨야? 나도 최 씨야. 야, 이것도 인연인데 잘해 보자. 최범규는 생글생글 잘 웃었다. 

최범규는 양날의 검이었다. 무슨 뜻이냐면 지가 조지고 지가 수습했다. 크게 조지고 크게 수습했다. 옷발 좋아서 매장 옷 몇 벌 입은 걸로도 매출 올리는 연준과는 달리 최범규는 세일즈맨에 가까웠다. 문제는 그것 외에는 큰 장점이 없다는 거였다. 최범규는 옷 수량 확인하고 탈의실 앞에 멋대로 던져진 옷들을 정리하고 매장 안에 인테리어용으로 비치된 화분들을 관리했다. 다른 업무는 함께 분담했지만 화분은 달랐다. 화분은 최범규만의 업무였다. 

예쁜 풀떼기들을 더 예쁘게 만들어 주는 돌멩이들. 아기 손님들이 왔다 하면 없어지는 물건 1위였다. 아기들은 돌멩이에 환장했다. 주머니 두둑하게 몰래 챙겨 돌아갔다. 돌멩이 하나씩 빼앗긴 화분은 초라해졌다. 사막 같았다. 그래서 최범규는 눈 부릅뜨고 돌멩이 찾았다. 용의자 애기 붙잡고 물어봤다. 친구 이거 어디 갔어여. 몰라여. 왜 몰라여. 주머니 안에 있는 거 같은데? 이거 가지고 가면 안돼여. 나무 아파여. 최대한 친절하게 말했다. 그런데 애기들 생각에 돌멩이는 지천에 널렸고 건물 안에 있다고 돈 붙은 것도 아닌데 억울한 거다. 빼애앵. 울음이 터진다. 그러면 부모가 옷 보다가 당황하고 최범규는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 혼나고 그랬다. 

연준은 시무룩한 최범규를 위로했다. 너 그래도 매출은 잘 올리잖아. 어? 사람이 못하는 게 있으면 잘하는 것도 있고 그런 거야. 너무 신경 쓰지 마. 형은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매출이 오르잖아여어. 나는 막 존나 말해야 되는뎅... 하... 걍 이마트 알바 할걸. 화분 다 그냥 갖다 버리고 싶어요. 그래그래.. 퇴사하는 날 갖다 버리자. 퇴사 안 할 건데요. 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우이씨... 최범규를 위로하다가 연준이 더 답답해지는 날도 많았지만 아무튼 그것도 다 추억이라 생각했다. 연준은 최범규를 친동생처럼 생각했다. 가족보다 더 자주 보는 최범규. 사람 만들었다 생각했다. 덜렁대는 거 다 뒤치다꺼리하고 칭찬해 줬다. 나 좀 멋진 어른인 듯. 연준은 뿌듯했다. 그래도 최범규 있어서 덜 외롭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2년이 훌쩍 지나고 연준도 최범규도 매장 안에서 능숙한 일꾼이 됐을 때, 최수빈이 들어왔다. 

최수빈은 낯가렸다. 너도 최 씨네? 얘도 최 씨고 나도 최 씨야. 우리 최최최다. 하! 하! 하! 연준이 웃으며 손 내밀었을 때 최수빈은 웃으며 와, 그러네요. 대답하기만 했다. 뻘쭘해진 연준의 손을 최범규가 대신 잡아 줬다. 낯가리는 최수빈은 목소리도 작았고 크게 말하다가도 금방 볼륨이 작아졌다. 그래서 수선 배정 받았다. 근무 시간 내내 수선실에 처박혀 옷 자르고 박음질하는 일인데 최수빈은 기뻐 보였다. 와, 정말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남성복 매장 처음 와서 인사하던 때보다 생기가 돌았다. 우려했던 것보다 최수빈은 잘 적응했다. 정확히는 최수빈이 적응했다기보다 다른 사람들이 최수빈에게 금방 적응했다. 연준도 그랬고 최범규도 그랬다. 아니, 최범규는 심각했다.

연준이 본 최범규는 최수빈한테 그냥 푹 빠져 있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면서 수선실 앞을 서성거렸다. 바쁘다고 잡아오면 일 끝내고 또 쪼르르 가서 서 있었다. 원래라면 매니저한테 개털리고 연준을 찾아왔는데 최수빈부터 찾았다. 연준은 버려진 지 오래. 

궁금해서 최수빈에게 물어봤더니 저도 잘 모른다고 했다. 연준 휴무일에 개털린 최범규를 최수빈이 어쩌다 달래 줬는데 그때부터인 거 같다고만 했다. 그러더니 묻더라. 범규는 원래 그렇게 막 와아아아악 웃다가 확 우울해져요? 헛웃음이 나왔다. 그 한마디가 그냥 최범규 자체여서. 연준은 그렇다고 했다. 그게 최범규의 본질이라고 했다. 둘은 팔다리 길다는 이유로 쓰레기 담당이었는데, 쓰레기 버리러 나가서 별 이야기를 다 했다. 주어는 주로 최범규. 섭섭해서 그랬다. 아, 내가 다 키웠는데 존나 소용없어. 이제 수빈이밖에 안 찾네. 투덜대니 최수빈이 웃었다. 연준도 웃었다. 어이없어서 서로 계속 웃기만 했다. 

수빈이 니가 다정하잖아. 그래서 너 좋아하나 보다. 최범규가 대구에서 왔잖아. 거기 사는 애들은 다 좀 뭐라 해야 하냐?. 무뚝뚝할 거 아니야. 넌 안 그렇고. 그래서 좋아하는 거 같은데? 연준은 살살 떠 봤다. 그냥 궁금했다. 여자친구랑 3년 찍으니 이런 게 재미있었다. 자극적이야. 남의 연애사. 남의 삽질. 남의 썸 타기. 이런 것들. 최수빈은 허연 얼굴로 이리저리 심각한 표정을 했다. 그런가... 저 그렇게 잘해 준 적 없는 것 같아요. 아마도. 범규가 더 잘해 준 거 같은데요? 저한테. 뭘? 어떻게? 걔가? 연준은 놀라서 계속 물었다. 걔가 너한테 잘해 줬다고? 어떤 식으로? 걔가 누구한테 잘해 주기는 해? 우다다다 들어오는 질문에 최수빈 입이 벌어졌다. 어어... 있잖아요. 몇 주 전인데요...

자초지종 다 듣고 연준이 할 수 있는 말은 딱 한 줄이었다.


"니네 그래서 도대체 언제 사귀냐?"


네? 최수빈은 식겁한 얼굴이었다.



3. B-SIDE

새벽이면 전화가 걸려 왔다. 편의점 가는데 심심하다나. 수빈은 스피커폰으로 돌려 놓고 하던 게임마저 했다. 벨 울리고 최범규 이름 뜨면 (멋대로 가지고 가서 ♥밤♥ 으로 저장했다.) 늘 벌벌 떨었다. 가챠 10연 돌리는 기분. 가챠와는 달리 최범규 전화는 망하는 게 없었지만. 

떨리는 목소리 애써 감추고 담담한 척 받았다. 뭐해요. 나? 게임 중. 오늘은 만화 안 봐여? 다 봤어. 드라마 안 봐여? 다 봤어. 개빨리 본당. 어어. 내가 한번에 몰아서 봐. 모니터로 눈 고정해 두고 손도 알아서 척척 움직이는데 신경은 전부 통화로 쏠려 있었다. 새벽 두 시 다 되어가는 시간. 뭐하다가 이제 편의점을 가. 오늘 오프라서 늦게 일어났는데여. 점심에 친구 보고... 집에 와서 자다 보니까 이렇게 됨. 이래서 오프가 더 우울해. 목소리가 슬슬 기어들어갔다. 편의점 간다더니 뭘 사는 소리도 안 나고 들어갔다가 나오는 소리도 안 났다. 너 편의점 가는 거 아니야? 캐물으니 그냥 빙글빙글 돌고 있단다. 꼭 물어봐야 정답 말했다. 이런 식이지, 늘. 그제서야 수빈은 팀원에게 욕을 처먹거나 말거나 게임 끄고 제대로 통화에 집중했다. 범규야. 지금 우울해? 똑바로 물어봤다. 네엥... 수빈은 나갈 채비를 했다. 너 지금 어디야?

최범규가 지금 있는 곳은 지에스도 아니고 씨유도 아니고 다름 아닌 24시간 빙빙 돌아가는 카공족들 쉼터 할리스. 퇴근해도 이 동네를 벗어날 방법이 없구나 생각하며 수빈은 신발을 끌어 걸었다. 다른 건물 다 불 꺼지고 할리스 하나만 영업 중이어서 그런가 훤히 다 보였다. 남들 다 노트북이며 책이며 뚫어져라 쳐다보거나 엎어져 있는데 최범규 혼자 이어폰도 안 끼고 휴대폰도 안 본다. 작전 공모하는 테러범처럼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나마 그 앞에 있는 게 아포가토라서 살벌함을 덜어 줬다. 수빈은 들어가자마자 에이드 하나 주문하고 최범규 앞에 앉았다. 아포가토 퍽퍽 찌르고 있던 최범규가 놀라 허리를 바로 세웠다. 뭐, 뭐야. 언제 왔어요? 너가 오라매. 오라고 해 놓고 놀라는 게 어디 있냐? 섭섭하게. 진짜 올 줄 몰랐다며 최범규가 횡설수설했다. 제법 소심한 구석이 있었다. 질러 놓고 눈치를 보는 부분은 특히 심했다. 이런 식으로 기분 안 좋은 티 다 내놓고 몰랐다고 놀라는 일도 다반사였다. 

"우리 범규는 누구 꼬실 때 늘 이런 식으로 부르나 보다." 

수빈이 웃으며 농담했다. 

"아, 아니에요!!!!"

또 성량 좋게 매장 안 손님들 잠을 확 깨우는 최범규 목청. 수빈은 이제 익숙했다. 

대학 붙자마자 독립하고 싶어서 짐 다 싸들고 튀어나온 수빈과는 상반되게 최범규는 KTX 타고 서울 오는 일에는 들떴지만 사랑하는 부모님과 덜 사랑하는 형이랑 헤어질 때 힘들었다고 했다. 우리 집은요, 주말에는 같이 산을 갔고요... 김밥이랑 유부초밥이랑 그리고 방울 토마토랑... 내가 토마토 못 먹으니까 나는 바나나... 묻지도 않은 도시락 메뉴를 줄줄 늘어 놓았다. 토마토 못 먹는다는 말에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오전 근무 끝나고 점심시간 1시간 동안 근처 맥도날드와 버거킹으로 사라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삭 토스트만 줄창 먹어대던 최범규 볼따구가. 이삭 토스트에 한 맺힌 줄 알았는데 토마토 때문에 그랬나. 못 먹는 거 많아? 엄청 많은데요. 새우도 못 먹고. 새우도 못 먹어? 나 범규 따라다녀야겠다. 네 거 다 먹게. 놀리려고 한 말에 얼굴이 붉어지는 최범규. 수빈은 또 사고 쳤구나 싶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 말하지 말걸. 

"가족 보고 싶어서 우울한 거야?"

"아뇨..."

갤러리 속 사진을 최범규가 보여 줬다. 이게 있잖아여. 제가 엄청 사고 싶었던 LP거든요. 나름 제일 상태 좋은 걸로 찜해 뒀는데여. 팔렸어요. 어저께. 말하면서 다시 점점 표정이 우울해졌다. 타이타닉 한정판 LP. 수빈은 가만히 들여다봤다. 어디서 본 것처럼 낯이 익었다. 휴닝카이네 집에 있었던 것도 같고... 수빈이 기억을 뒤지는 동안 최범규는 이 LP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말했다. 우리 아빠가 말이에여. 옛날에 이 영화를 DVD로 빌려서 보여 줬단 말이에요. 그때는 별로 재미있는지도 모르겠구 별로였거든요? 근데 며칠 전에 집에서 이걸 보는데 너무너무너무 좋고 슬픈 거예요. 근데 제가 또 LP 모으는 취미가 있으니까... 우리 집에도 턴테이블 있거든요. 최범규는 묻지 않은 것까지 술술 불었다. 형은 타이타닉 안 봤죠? 뭔가 안 봤을 것 같음. 주술회전, 귀멸의 칼날, 도쿄구울 등등. 수빈이 뭐 본다고 할 때마다 찾아 본 최범규 머리에도 정리가 된 거다. 최수빈은 타이타닉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수빈은 끄덕거렸다. 본 적 없어. 슬픈 거 아니야? 최범규가 머리가 떨어질 것처럼 위아래로 흔들었다. 너무 슬퍼요... 아무튼 LP를 못 사서 더 슬픔... 근데 늦게 일어나서 하루 종일 별거 안 한 건 더 슬프고요. 괜찮아. 나도 오프 때 아무것도 안 해. 

돈 많이 벌면 음악 좋은 거 많이 틀어 놓는 바 사장 하고 싶다는 최범규를 질질 끌고 할리스를 나왔다. 수빈은 최범규를 회유했다. 이제 집에 가자. 손도 잡아 줄게. 최범규는 거절 않고 수빈의 손을 꽉 잡았다. 형도 나 안 싫죠? 응. 안 싫어. 근데 왜 고백 안 받아 줌? 글쎄... 그런 건 준비가 안됐어. 수빈은 정직하게 대답했다. 정말로 준비가 안됐다. 솔직히 오늘도 그랬다. 데리러 나온 것도 그렇고 손 먼저 잡아 준다고 한 것도 그렇고 수빈 역시 이젠 코앞까지 다가온 마음에 대해 정의를 내려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쉽지 않았다. 지금도 재미있는데, 지금도 충분히 좋은데... 어떻게 더 좋을 수가 있지? 어떻게 더 좋은 사이가 된다는 거야? 의문만 늘었다. 손 붙잡고 있는 최범규는 수빈의 팔뚝에 붙었다가 기댔다가 이리저리 몸을 가만히 두질 않았다. 

"범규야. 나는 좀 어두운 걸 좋아해. 답도 없는 해피 엔딩 말구."

"알아요. 나도 나무위키 읽어 봄."

"그런 거 말구...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럼 뭔데요..."

"시작하면 꼭 끝이 있다 생각해. 늘 그래. 그래서 생각하는 거야. 차라리 시작하지 않으면 슬플 일도 없는 거 아닌가? 뭐하러 그렇게 고생하나, 그런 생각 있잖아."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 좀..."

"좀?"

"재미없잖아요. 인생이."

"아무튼 그래서 내가 늘 선택을 못해. 느려. 걱정도 좀 많고. 그냥 천성이야."

술 취한 것도 아닌데 분위기에 휩쓸려 본심이 샜다. 최범규가 말 없이 우뚝 멈췄다. 덩달아 수빈도 자리에 섰다. 왜 이러나 싶어서 뒤를 돌아보니 넓은 보폭으로 걸어와서 수빈의 가슴팍에 머리통을 콱 박았다. 뭐지.. 아프지도 않고. 

"짜증 나."

영문을 모르는 수빈은 머쓱하게 가슴께만 쓰다듬었다. 

"왜 좋지? 짜증 나게."

그 순간, 최범규가 수빈에게 성질을 부리던 그때, 와르르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손 쓸 틈도 없이 수빈의 틈으로 어찌 제어할 수 없는 애틋함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눈치챌 수도 없게, 서서히. 



4. 선택하세요 당신의 타입을 

피시방 사건 이후, 수빈은 출근할 때마다 최범규에게 손이 잡혀 카드 찍었다. 남들이 쳐다보면 기운 다 빠진 얼굴로 그런 거 아니에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제창했다. 그런 사이 아니라고 하면 최범규가 서운해할 걸 알았지만 아닌 건 아니었다. 아닌 걸 맞다고 할 수는 없었다. 매니저가 무전으로 지를 살벌하게 찾는 소리에도 최범규는 수빈을 수선실 앞까지 꼭 데려다줬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돼. 매니저님이 찾으시잖아. 타이르면 몸을 꼬며 오늘도 다치지 말고 열심히 하라는 말만 하고 쌩 하니 사라졌다. 최범규 사라진 그 너머로 최연준이 토하는 시늉을 하며 멀리 서 있다. 가볍게 목례를 했다. 이따 쓰레기 버리러 갈 때 또 엄청 놀리겠구만... 벌써 괴로웠다. 

수선실에서 폐관수련 하는 듯이 처박혀 들어온 바지들을 정리했다. 한국 사람들은 바지 없이 팬티만 입고 사나 봐.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매일매일 새 바지를 수선할 수 없는데. 바지를 이렇게 많이 살 필요가 있나? 진짜 바지가 없나? 괘씸한 생각을 하며 미싱을 돌렸다. 달달달달 돌아가는 소리에 마음이 진정됐다. 수선실 바깥은 전쟁터다. 누구 어디 갔냐, 뭐 어디 뒀냐, 수량 체크 제대로 했냐, 포스기 확인 좀 해라 등등. 매일매일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반면에 수빈은 바지와 자신 단 둘만이 그 공간 속에 존재했다. 그 사실에 감사했다. 

청바지 자르고 박음질하는데 불현듯 어제 폴가이즈 하느라 방에 와 있던 휴닝카이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따지고 보면 휴닝카이도 수빈에게는 매장 선배였다. 달랑 사흘 일했지만 사실이 그랬다. 남의 땜빵 사흘 해 줬던 휴닝카이는 매장 맞은 편에 위치한 만화 카페 알바생이었다. 수빈 역시 휴닝카이 소개로 만화 카페에 지원했지만 장렬하게 떨어지고 울며 겨자 먹기로 지원한 곳이 지금의 의류 매장이었다. 가뜩이나 유동 인구 많은 중심지에 위치한 의류 매장에서 일하는 수빈을 걱정한 휴닝카이는 안부를 자주 물으러 왔다. 어제도 그랬다. 폴가이즈 하러 와서 말이 많았다. 아, 횽. 여기 틈이 있잖아용. 멀리 뛰어야 한다니까영. 어어. 알았어~ 카이는 잘해서 좋겠네~ 

약이 올라 대충 대답하는 저를 두고 휴닝카이의 모터 달린 입은 멈추질 않았다. 근데 있잖아용. 범규 형이랑 진전이 있는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건데용. 제가 생각해 봤거든용. 어어... 별로 생각 안 해 줘도 되는데. 범규 형은 쫌... 히로인 같지 않아용? 어? 그게 무슨 말이야? 수빈은 깜짝 놀라 혀 깨물 뻔했다. 손에 잘 쥐고 있던 듀얼쇼크 갖다 던지고 몸을 틀었다. 너 무슨 말이야... 그게... 게임을 가만히 날리는 수빈을 잠깐 쳐다보던 휴닝카이는 듀얼쇼크를 도로 가지고 와 건넸다. 그러니까... 만화에 나오는 히로인 같다고요... 일단 밝고요, 사고를 많이 치고요, 형을 엄청 좋아하고용. 타입으로 분류해 보자면... 우움... 수빈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휴닝카이의 입에서 나오는 다음 말을 들으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말하려는 휴닝카이의 입을 손으로 막고 애원했다. 그만... 그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으니까 그만 말해... 엉엉엉엉. 수빈의 폴가이즈 캐릭터는 제자리에 선 채 결승선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고 그 라운드를 탈락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다고요? 형... 그럼 생각은 해 본 적 있는 거네요? 갑자기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휴닝카이의 눈빛. 수빈은 마른 세수를 했다. 아, 그런 거 아니야... 그렇게 타입 분류 같은 거 안 했어. 아, 진짜... 그리고 범규는 히로인보다는 좀 주인공 같지 않나?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수빈은 한참 열변을 토했다. 조금 질린 표정으로 그 열변을 듣고 있던 휴닝카이는 드러누웠다. 횽... 너무 징그러워요... 흑흑흑... 우리 형님이 이렇게 징그러웠다니... 카페 쿠폰 줄게요. 이제 1시간씩 놀다 가지 말고 둘이 3시간씩 놀다 가요.... 흑흑흑... 징그러워...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지. 내가 미쳤나 보다. 내가 진짜 돌았나 보다. 수빈은 어제의 미친 대화를 떠올리다가 소름이 돋았다. 삐걱거리며 미싱을 돌렸다. 

그러다가 사고를 치고야 만다.


"아니, 지금 장난해요? 바지 꼴이 이게 뭐예요?"

"죄송합니다..."

"이거 어떡할 거예요?"

"정말 죄송합니다..."


고객의 청바지를 두 벌, 슬랙스를 한 벌 진짜 조져 놨다. 양쪽 길이가 안 맞았다. 청바지는 어떻게 하면 수습 가능할 것 같았는데 슬랙스는 답이 없어 보였다. 그것도 이번 시즌 거면 모르겠는데 저번 시즌 거라 사이즈마다 한 벌씩밖에 남지 않은 제품이었다. 수빈은 쏟아지는 육두문자에 곤혹스러워 이마에 땀이 맺혔다. 땀을 벅벅 닦으며 두 손 모아 고개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서도 무릎 각을 쟀다. 이제 무릎 꿇을까? 이제는 진짜 꿇는 수밖에 없어...


"고객니이이이임!!!! ♡ ♡ ♡"


무릎 꿇기 1초 직전,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수빈의 앞으로 최범규가 호다닥 달려와 끼어들었다. 고객을 부르는 음성에는 온갖 애교가 점철되어 있었다. 매장 안은 어수선했다. 시착해 볼 옷을 들고 탈의실을 가지 않고 수선실 앞을 사람들이 서성거렸다. 구경 났다는 증거였다. 거기다 최범규가 큰 소리를 내며 끼어드니 더 난리가 났다. 최범규는 앞을 가로막아 서서 사람들 몰래 뒤로 손을 파닥거렸다. 수빈은 최범규 손짓 따라 살짝 뒤로 물러났다. 사람들 눈알이 일제히 모였다. 최범규는 고객 앞에서서 온갖 아양을 떨었다. 아앙, 우리 어머님. 속상하셨겠다. 그쳐? 근데 진짜 너무 신기한 일이 생겼어여. 이거 길이 안 맞으셔서 수선하신 거잖아여. 근데 다른 매장에 어머님한테 딱 맞는 사이즈로 재고 하나가 남았다는 거예여. 근데 색깔은 좀 다른 거. 그거는 그레이, 그레이. 회색인데. 괜찮으세여? 최범규는 사람 녹이는 말투로 화 제대로 난 고객을 흔들어 놨다. 수빈은 그 모습을 직관하며 속으로 감탄했다. 동시에 매니저와 연준이 말하던 범규의 수습 능력에 대한 걸 실감했다. 이런 걸 말하는 거였구나. 수빈도 제 나름의 수습 방식은 있었지만 이렇게 정면으로 부딪히는 식은 아니었다. 최범규는 일단 부지런했고 수습해야 할 일의 순위도 빨리 정하는 것 같았다. 최범규는 고객의 손을 꼭 잡았고 별실 가서 커피 한잔 드릴게여~ 하며 분위기를 일단락시키며 정리했다. 인파 사라지고 나서야 수빈은 가만히 서 있다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허... 나 진짜 뭐했지. 

매니저한테 개털리고 매장 뒷편으로 나와 숨 돌리는 수빈에게 최연준이 다가왔다. 야, 너 괜찮냐? 나쁠 것도 없어요. 제 잘못인데요, 뭐. 그렇게 안 생겨서 은근 털털하다니까? 최연준이 슬슬 웃었다. 범규는요? 아, 창고 정리할걸? 4시 퇴근이래. 그으래요. 대답이 왜 그래. 그냥요. 고맙다고 말해야 되는데 또 막상 얼굴 보자니 부끄럽고... 말을 못 잇는 수빈을 최연준이 벌레 보듯이 쳐다봤다. 

"이거 지금 트루먼쇼?"

"뭐가요?"

"둘이 아직도 안 사귀는 거야?"

"네? 네..."

"와...... 구라 아니고?"

"네, 구라 아닌데..."

수빈이 그렇게 안 봤는데 존나... 존나 심사숙고하네? 한마디 하고 최연준이 매장으로 다시 복귀했다. 그게 뭐 어때서. 최연준 사라진 거 확인하고 조용히 대꾸했다. 심사숙고해서 나쁠 거 없다. 수빈에게도 최범규에게도. 서로에게 그게 좋았다. 그런데... 자꾸만 아까 본 장면이 떠올랐다. 하트 뿅뿅 만들어내며 고객과 제 사이로 끼어들던 최범규. 깜빡이도 안 켜고 스르륵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움직임. 사랑이 넘쳐서 그런가 말투에 애교가 뚝뚝 떨어지던 모습. 곤경에 처한 저를 구해 주던 당당한 뒷모습. 아무리 생각해도 최범규는 주인공이다. 상황이 아무리 좆됐어도 반드시 웃고야 마는 그런 타입의 주인공. 아무도 안 웃으면 지가 먼저 웃는 주인공. 참 어이없다. 그런 캐릭터는 수빈이 제일 먼저 거르는 특성의 인물이었다. 캐릭터 빌딩부터 배경까지 전부 수빈에게는 이해가 안되는 것들 투성이었고 억지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최범규는 이해도 되는데 실존하기까지 했다. 

어떻게... 귀엽게 생겼는데 왈가닥에 금방 우울해지고 금방 기분 좋아지고 부모님께 사랑받고 집에는 사랑스러운 초록색 앵무새까지 있을 수 있지? 빨간색도 아니고 파란색도 아니고 초록색일 수 있냐고. 초록색은 치유계라고. 문장으로 정리해 놓으니 심각했다. 그런데 그런 최범규가 최수빈을 좋아했다. 으악. 수빈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이게 내 현실일 리 없어. 

하... 설정 과다야. 존나 억지라고. 여기까지 오니 이제 수빈은 괴롭지도 않았다. 나도 중증인가 보다. 수빈은 벽에 가만히 기대서 휴닝카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살면서 처음이었다. 먼저 휴닝카이에게 전화 거는 일이. 

"있잖아. 카이야.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5. 사빠곰 (사랑에 빠진 곰돌이)

휴닝카이는 남는 거 없이 장사 안 했다. 과연 번개장터에서 몇 년을 굴러 먹은 잔뼈 굵은 장사꾼다웠다. 타이타닉 한정판 LP. 단어 하나 건네자마자 휴닝카이는 와하학 웃었다. 형, 혹시 그걸 갖고 싶으시다는 거예용? 우리 본가에 있는 거? 수빈은 물러설 수 없었다. 징그럽게 들리겠지만 범규한테 그걸 선물로 주고 싶어. 공짜로는 못 드리고용. 제 부탁 한번 들어 주시면 바로 넘겨 드릴게용. 우리가 안 세월이 있지 그걸 돈 받고 파는 건 좀 양심에 찔리네용. 말은 번지르르 잘했다. 그렇게 세월에 기대고 싶으면 그냥 공짜로 주면 덧나냐 따지고 싶었다. 

온세상에 존재하는 동물이 곰돌이밖에 없는 것 같았다. 최범규가 닮은 동물은 곰돌이, 최범규가 주로 쓰는 이모티콘도 곰돌이, 그리고 자신이 들어앉은 탈도 곰돌이. 수빈은 땡볕에 곰돌이 탈을 쓰고 만화 카페 홍보용 전단지를 나눠 주고 있었다. 간악한 휴닝카이 녀석의 제안이었다. 형 일요일 오프죠? 그날 하루만 곰돌이 탈 좀 써 줘용. 한정판 타이타닉 LP만 얻을 수 있다면 아무렴 좋았다. 바로 약속하고 출근했는데 미친 곰돌이 옷이 존나 더웠다. 안쪽에 쿨팩 넣을 틈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고문 기계가 따로 없었다. 언제적 건지 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 알면 병 걸려 죽을 것 같았다. 

곰돌이 탈의 얼굴은 기묘하고 우울했다. 도저히 이 인형 탈로는 홍보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지나다니는 미취학 아동들은 곰돌이가 시야 안에 들어왔다 싶으면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얘들아... 전단지 좀 받아가. 이거 안 받아가면 삼촌 오늘 퇴근 못해. 탈 속의 인간 마음을 알 리 없는 꼬마 손님들은 차갑게 스쳐 지나갔다. 가장 괴로운 건, 만화 카페가 평소 근무하는 매장의 맞은 편에 있다는 거였다. 수빈이 오프인 것만 알고 코앞에서 곰돌이가 되어 일하고 있는 건 모르는 매장의 직원들과 마주칠 일 없기만을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었다. 하... 곰돌이들이 너무 불쌍해. 탈부착도 아니고 매일매일 털을 달고 사는 거잖아? 수빈은 이제 이성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몇 살이에여?"

넋 놓고 땀 뻘뻘 흘리는 수빈 앞으로 꼬마 손님 한 명 등장. 수빈은 목소리 내지 않고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렸다. 두 살이라는 뜻이었다. 만화 카페가 2년 됐으니까 나름의 센스를 발휘한 셈이다. 그런데 요즘 꼬마들은 여간 맹랑한 것이 아니다. 구씹이라는 단어를 내뱉었다. 와, 초등학생 손님 멋지시다. 구씹이라는 말을 아시다니. 수빈은 하마터면 목소리 낼 뻔한 걸 혀를 씹어 겨우 참아냈다. 꼬마 손님은 집요했다. 수빈의 발을 밟는가 하면, 등을 툭툭 치기도 했다. 하... 이 손님 미치겠네. 전단지 건네도 받아 주질 않았다. 아이를 따끔하게 혼내 본 적 없는 수빈은 꼬마 손님을 피했고 꼬마 손님은 끈질기게 수빈의 뒤로 붙었다. 둘이 뱅글뱅글 돌았다. 피리 부는 사나이도 아니고 10분 정도 그러고 있으니 다른 꼬마들이 붙었다. 하, 오늘 초딩들 학교 안 가? 수빈은 기가 찼다. 얘들아. 그만 따라붙고 전단지 받아서 좀 사라져 줄래... 울컥울컥 화가 치밀었다. 

"야~ 얘들아~ 전단지 받아서 카페 가면 아이스크림 준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최연준이었다. 그 옆에 붙은 최범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관객이었고. 수빈은 확 그 자리에서 증발하고 싶었다. 투명인간이고 싶었다. 모른 척 지나가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최연준, 최범규 둘은 그럴 위인이 안됐다. 오지랖 넓은 최범규가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애들을 달랬다. 곰돌이가 힘들어하잖아~ 얼른 이거 쿠폰 받아서 엄마랑 같이 놀러 가자~ 어머니 어디 계셔? 이런 황당한 상황에서도 수빈은 감동 받았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우리 범규... 찌이이잉... 코가 아파지는데 별안간 꼬마 하나의 공격으로 수빈의 몸이 중심을 잃었다.

철퍼덕. 앞으로 무게가 쏠린 채 넘어졌다. 아픈 건 둘째 치고 대가리 쪽이 휑한 게 등골이 시렸다. 이거... 이 상쾌한 공기 혹시... 대가리가 날아갔나? 나간 멘탈 수습하기도 전에 고개 들고 무릎 꿇어 앉아 대가리 찾으려고 주위를 둘러 보는데 어린이들이 비명을 깩 질렀다. 세상의 종말을 목격하기라도 한 것처럼, 공포 영화의 도입 부분처럼 하이톤 비명이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빈은 슬펐다. 비명은 제가 지르고 싶었다. 아니, 오열하고 싶었다. 얼굴이 허옇게 질린 미취학 아동들 뒤로 입을 쩍 벌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들고 덜덜 떨고 있는 최연준과 휘핑크림 잔뜩 올라간 탐욕스러운 음료를 들고 정지한 최범규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나 걍 죽을래.

그 와중에 최범규가 슬슬 발을 움직여 동그란 곰돌이 탈을 발로 차 수빈에게로 굴려 준다. 야, 존나 친절해... 감동적이야... 으아아아악. 그리고 최연준은 이제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연사를 갈겨댔다. 수빈아, 너 이런 은밀한 이중 생활 중이었냐? 산업 스파이? 이렇게 두 얼굴의 사나이였어? 수빈은 기운이 다 빠졌다. 도저히 대답할 수 없었다. 곰돌이 손으로 대답했다. 중지를 올렸다. 미취학 아동들이 다시금 비명을 리필했다. 수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동심을 파괴해서 미안합니다. 


곰돌이는 가라.

최수빈 알맹이만 남고.

곰돌이는 가라.

최누구누구 퇴근 기다리며 매장 앞에 쪼그려 앉은 수빈을 보며 최연준이 놀렸다. 아, 형까지 진짜 왜 그래요. 역정을 내니 큰 소리로 웃었다. 야, 오늘 좀 귀엽더라. 범규 곧 나올 거야. 나중에 보자. 멀어지는 최연준 등짝으로 수빈은 다시 중지를 올렸다. 어우, 재수없어. 그래도 수익은 있었다. 곰돌군의 고군분투가 휴닝카이에게 그대로 잘 전달됐는지 탈의실 갔을 때 LP를 바로 받을 수 있었다. 틱톡에 올라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름 재미있었다는 평까지 제대로 들었다. 너 그거 너무 mz야... 형도 mz예용. 참 얻을 거 없는 대화였다. 

존나 긴 다리 애써 수납해 쪼그려 앉은 수빈 위로 그림자가 드러웠다. 최범규였다.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었다. 질문 듣고 있으면 영영 이 자리에서 못 일어날 것 같아서 수빈은 바로 등 뒤에 숨겨 뒀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둘의 얼굴은 꼭 짠 것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게 뭐예요? 그냥... 선물. 최범규가 거절 않고 쇼핑백을 받더니 내용물을 확인했다. 확인하자마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헐. 헐. 헐. 글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외마디의 소리가 이어졌다. 우와, 형... 우와... 그제서야 수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계속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 이거 어디서 난 거예요?"

"친구네 집에 있던 거. 얻었어."

"친구 누구..."

"넌 지금 내 친구가 궁금해?"

"아니요오오오..."

이젠 말도 안 하고 최범규 손을 잡았다. 어제까지는 눈도 잘 마주쳤고 하루 종일 얼굴 봐도 이만큼은 아니었는데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혹시라도 인형 냄새 뱄을까 싶어 향수도 잘 챙겨 뿌렸다. 늘 나란히 가까이에서 걸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심한 거냐고... 입에는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말이 안 나왔다. 이거 왜 이러는 거냐고. 긴장한 수빈을 두고 연신 고맙다는 말만 반복하는 최범규. 한 음절씩 들릴 때마다 수빈의 귀가 벌겋게 익었다. 이것도 다 노을 탓이야. 노을 때문이야. 열올라 뜨거운 귀를 만지작거렸다. 

"있잖아..."

"형."

똑같은 상황. 그때는 양보했지만 이번에는 발언권 넘길 생각 없었다.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었으니까. 다른 건 다 차치하더라도, 미루더라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으니까. 잠깐 눈 돌리면 어떤 짓을 할지 모르는 최범규에게 선수 뺏길 수 없었다. 방점은 이곳에서 자신이 찍고 싶었다. 

"나도 너 좋아해."

우와...... 존나 멋없다. 스스로 말해 놓고 스스로 질렸다. 초등학생 같애. 아니, 그것보다 심하다. 

"알아요."

이것도 꼭 데자부 같고. 

범규야. 내가 과감하지 않은 게 아니야. 나는 준비되지 않은 슬픔이 싫은 거야. 그걸 못 이겨낼 나를 알아서 싫은 거야. 감당 못하는 게 싫은 거야. 나는 싫은 것도 많고 미운 것도 많아. 되게 유치하고 진짜 집요하거든. 난 거짓말은 싫어. 솔직한 게 좋아. 다 보이는 게 좋아. 나는 또... 그래도 웃을 줄 아는 게 좋아. 울고 나서 웃을 줄 아는 사람이 좋아. 귀여운 게 좋아. 무서운 건 싫어. 해 보고 싶은 거 많은데 결정할 때까지 오래 걸려. 충동적이긴 한데 자주 후회해. 그래서 지금도...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난 너랑 사귀는 것도 아닌데 벌써 헤어지는 상상을 해. 나는 그런 사람이야. 

그런데요. 그래서요. 어쩌라구요. 울퉁불퉁한 최범규 음성. 

"그래도 너랑 사귀고 싶어."

심호흡 한번에 주르륵 내뱉어 본다.

"사랑에... 빠진 것 같아." 

한번 트인 입은 다물어지지 않는다. 

"너랑 놀러 가고 싶어. 너네 집 앵무새도 보고 싶고... 매운 떡볶이도 먹어 보고 싶고... 타이타닉도 보고 싶고."

"그리고요?"

"너랑 뽀뽀하고 싶고 너 안고 싶고 너 괴롭히고 싶어."

"그리고요?"

"너랑 아이언맨1부터 쭉 보고 싶어..."

걷다 보니 어느새 최범규네 집앞이다. 쪽팔린 줄도 모르고 길을 걸으며 고백을 늘어 놓았다. 

"다 할래요. 다 할게. 다 할 거임."

와락 안기는 최범규를 수빈이 두 팔로 가득 안았다. 나 곰돌이 냄새 날걸... 킁킁거렸다. 아무 냄새도 안 나요. 걍 이상한 남자 향수 냄새만 나. 그게 무슨 말이야.. 향수 냄새는 나는 거잖아. 수빈은 울상이었다.

"있잖아여, 형."

"응."

"나 믿어 봐요.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웅... 숨소리가 훨씬 많이 섞인 대답. 수빈은 동그란 최범규 머리통에 얼굴을 묻었다. 범규 머리 돌머리. 개딱딱해. 그래도 좋다. 그래도 좋아. 계속 이러고 싶었어. 나 있잖아. 계속 너 안아 주고 싶었어. 이렇게 꽈악 안아 보고 싶었어. 

진짜 바보 같애. 최범규. 너무 좋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열혈 주인공 같애. 진짜 싫어. 진짜 싫어.

진짜 짜증 나.

근데 좋아. 



6. 못 다한 이야기


걔가 너한테 잘해 줬다고? 어떤 식으로? 걔가 누구한테 잘해 주기는 해? 

어어... 있잖아요. 몇 주 전인데요... 퇴근하는데 사이비 만났거든요. 제가 근데 얼굴이 좀 만만하게 물렁물렁하게 생겼잖아요. 그래서 그런가 완전 단골이거든요? 저 무슨 노래도 같이 부른 적 있어요. 개호구예요. 어쩔 줄 모르고 막 웃고만 있는데 범규가 와서 미친놈처럼... 뭔 찬송가를 부르면서 저를 데리고 가는 거예요. 솔직히 그때 쫄았는데 범규가 막 괜찮냐고 쟤네 여기서 완전 유명하다고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자기 꼭 데리고 가라는 거예요. 듬직하지도 않고 그냥 바보 같은데 또 고마운 거 있죠. 귀엽기도 하고. 똑똑하게 생겨서 왜 이렇게 순진하냐고 잔소리도 막 하고. 아무튼요... 범규가 저한테 엄청 잘해 줘요. 매일 막 커피도 사다 주고. 


아, 진짜... 그리고 범규는 히로인보다는 좀 주인공 같지 않나?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범규는 일단 바보야. 바보인 히로인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히로인들은 결국... 두 번째가 되잖아. 범규는 그런 히로인과는 거리가 멀어. 일단 용감하고... (횽...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여?) 겁이 없고... (횽 정신 좀 차려 봐여) 일단 너무 귀여워. 예쁘게 생겼어. 근데 잘생겼어. 그리고 속성으로 따지면 불이나 얼음이잖아. (수비니 형!!!!!) 불의를 보면 꼭 끼어들어서 해결해 주고. 완전 열혈이지. 난 근데 열혈은 유치하다 생각해. 내 스타일은 아닌데. (형 미친 거 같애용...) 암튼 그렇다 생각해.

횽... 너무 징그러워요... 흑흑흑... 우리 형님이 이렇게 징그러웠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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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고 및 수정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