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맞죠." “你是韩国人,对吧?”


곳곳에서 터지는 환호성과 커다란 전광판에 비치는 근육투성이 풋볼 선수들, 우뚝하게 솟아있는 두 개의 킥 골대, 푸릇푸릇한 잔디.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러운 풋볼 경기장에서 고개를 돌려 고국의 언어로 나를 부른 여자를 본다.
欢呼声从四面八方爆发出来,肌肉发达的足球运动员反映在大型电子显示屏上,两个高耸的球门和茂密的绿草上。我从喧闹的足球场转过头,看到一个女人用我的母语叫我。


"Not Korean?" “不是韩国人吗?”


대답 없는 나를 채근하는 여자는 머리가 길고 팔도 길고 다리도 길다. 요즘 인기많은 케이팝 유명인사처럼 배꼽이 보일랑 말랑한 크롭니트티에 통 큰 청바지를 제 살가죽처럼 찰떡으로 입었다. 캔맥주를 쥔 손에 작게 힘이 들어가 알루미늄에 주름이 진다.
那个不回答就接我的女人,长发、长臂、长腿。就像当今流行的韩国流行名人一样,她穿着一件柔软的短款针织 T 恤,露出肚脐,穿着贴合自己皮肤的大牛仔裤。对拿着啤酒罐的手施加少量的力,就会在铝上产生皱纹。


"한국인 맞아요. 한국인이에요?" “你是韩国人,对吗?”


곧 내가 한 질문이 얼마나 멍청한 거였는지 깨닫고 민망해진다. 그러나 짓궂은 웃음과 함께 돌아온 대답은 예상의 범주를 가뿐히 벗어난다.
很快我就意识到我问的问题是多么愚蠢,我感到很尴尬。然而,带着顽皮的笑容返回的答案却轻易地超出了预想。


"국적을 말하는 거라면 미국인이에요." “如果你谈论国籍,我是美国人。”

"...아." “...啊。”

"여기 혼자 왔어요?" “你是一个人来这里的吗?”


대답에 앞서 턱짓으로 저보다 두 줄 앞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는 무리를 가리켰다. 흑인, 백인, 히스패닉이 고루 섞인 다국적 클래스메이트들이다. 
还没回答,他就用下巴做了个手势,指着我前面两排的一群人,他们搂着肩膀,大声喊叫。他们是跨国同学,有黑人、白人和西班牙裔混血。


"같이 놀다가 기빨려서 힘들어서 뒤로 빠졌어요."
“我们一起玩,但我累了,玩得很辛苦,所以我就往后退了一步。”


처음 관전해본 풋볼은 공도 잘 안 보이고 룰도 복잡해 따라가기 어려웠다. 금세 흥미 잃은 내게 여자가 자연스레 옆으로 다가와 선다. 향수 냄새가 훅하고 끼쳤다. 풋볼경기장의 열기로 인해 혹여나 제게 땀냄새라도 배어있을까 순간 걱정이 된다. 다가온 여자가 자신이 들고 있던 캔맥주를 내민다. 짠하자는 거겠지, 두 개의 맥주가 공중에서 맞붙었다 떨어진다. 아직 만 21세가 안 되어 친구 찬스로 얻어낸 소중한 맥주다. 
我第一次看足球时,看不清球,而且规则又复杂又难懂。我很快就失去了兴趣,那个女人很自然地走到我身边,站在我旁边。香水味很浓。有那么一会儿,我担心足球场的热气会让我闻到汗味。一名妇女走过来,伸出她手里的一罐啤酒。假设没关系,两瓶啤酒碰撞并掉落在空中。这是在我还不到21岁的时候,通过朋友的机会得到的珍贵啤酒。


"그냥 멀리서 봤는데 한국인 같길래. 그리고 심심해보여서 와봤어요. 친구들이 있는 줄은 몰랐네."
“我只是远远地看到他,他看起来很无聊,所以我不知道他有朋友。”

"친구... 아니에요. 그냥 같이 수업 듣는 애들."
“朋友……不,只是和我一起上课的孩子。”

"같이 풋볼 보러 오는데 친구가 아니라고요? 까다롭네."
“我们一起来看球,但我们不是朋友,这很棘手吗?”


여자는 풋볼의 ㅍ를 f로 발음한다. 그게 훨씬 자연스럽다는 듯이.
女性将足球中的ㅍ发音为f。好像那更自然了。


"Freshman? 작년에 못 본 것 같은데. 여기 한국인은 웬만하면 다 아는데."
“新生?去年我好像没见过你。”

"아뇨, 트랜스퍼 했어요. 3학년." “不,我转学了。”


갑자기 환호성이 올라온다. 이쪽 팀의 러너가 공을 겨드랑이에 끼고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뒤로 달라붙는 수비들을 몇 인치도 안 되는 간격으로 겨우겨우 따돌린다.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제 귀에도 들리는 것만 같은 역동적인 플레이. 딱히 관심 없던 경기였음에도 저절로 어어, 소리가 터진다. 러너는 마지막 1야드를 남기고 수비에게 붙잡혀 나동그라진다. 아아 거의 다 왔는데!
顿时欢呼声四起。这是因为这支球队的跑动者腋下夹着球疯狂地奔跑。他几乎没能以不到几英寸的差距击败紧贴他的防守者。动态的演奏让您感觉可以听到风从耳边吹过。虽然是个不太感兴趣的游戏,但我还是忍不住笑了起来。跑者在还剩最后一码时被防守者抓住并被扔掉。啊,我们快到了!


"Oh my god."


여자가 버터 발린 발음으로 탄식을 뱉었다. 얇은 이마 위로 풋볼 경기장의 드센 백열 조명이 내려앉아있다. 비록 아쉽게 넘어지긴 했어도 고작 1 야드. 터치다운까지 고작 한 걸음이다. 홈팀인 본교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환호성을 지른다. 여자도 두 손으로 고동 모양을 만들어 크게 소리를 낸다. 그러기 위해 손끝으로 간신히 쥔 맥주캔이 위태로워 보인다.
女人用黄油般的发音叹了口气。足球场刺眼的白炽灯光落在我瘦弱的额头上。虽然我不幸摔倒了,但也只有1码。距离着陆仅一步之遥。主队我校的同学们,从四面八方欢呼雀跃。妇女还双手捏成海螺形状,发出响亮的声音。为此,他用指尖勉强握住的啤酒罐看起来岌岌可危。

재빨리 이어진 속공에 러너는 온몸을 던져 터치다운을 성공시키고 포효한다. 사람들이 미친 듯 박수친다. 스코어가 역전되었다. 여자가 인스타그뢤 해요? 물었다. 팔로우가 오고간다. 
快攻中,跑者全身投入,达阵成功,发出怒吼。人们疯狂地鼓掌。比分被逆转。这位女孩使用 Instagram 吗?问道。追随者来来去去。


"장원영이에요." “这是张元英。”

"아. 저는 안유진." “啊,我是安于瑾。”


경기 종료까지는 1분도 남지 않은 시점이다. 키커의 킥 신호가 떨어진 고요한 순간 나는 집중한다. 주위 사람들의 열기가 공기를 매개삼아 전해진다. 나의 표정을 보더니 원영도 입을 다문다.
距离比赛结束还有不到一分钟的时间。当踢球者的踢球信号响起时,我会集中注意力。周围人的热量通过空气传播。元英看到我的表情,也闭上了嘴。


"Awesome." 


킥은 깔끔하게 두 기둥 사이를 통과해 들어간다. 승리가 거의 확정되는 순간이다. 남은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가고 어디선가 휘슬이 불었다. 원영이 웃으며 손바닥을 앞으로 해서 내밀었다. 나는 손바닥을 짝 소리 나게 갖다대었다. 조명과 함성과 열기가 뒤섞인 첫만남이었다.
踢球干净利落地穿过两根柱子之间。这是胜利几乎确定的时刻。剩下的时间很快就过去了,不知什么地方响起了一声哨子。元阳微笑着伸出手掌放在他面前。我双手合十,发出声音。这是第一次会议,充满了灯光、欢呼声和兴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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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유진 장원영 安宥珍和张元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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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거. 잇따라 올라오는 노티에 눈을 크게 뜨고 봤다. 얼마 있지도 않은 포스트에 좋아요 박아대는 포에버영이 어이없다. 
这是什么。我睁大了眼睛,看到一条又一条的通知出现。 Forever Young 喜欢一个甚至不那么老的帖子,这真是可笑。


"Do you know Vicky? Vicky Jang. I saw her with you at the football game."

"너 비키 알아? 비키 장. 풋볼 때 같이 있는거 봤어."
“你认识张维琪吗?我在踢球的时候看到他们在一起。”


도서관에서 같이 과제하던 중이었다. 두유 노 싸이, 두유 노 비티에스, 그리고 두유 노 비키. 정황상 원영을 말하는 듯 해서 네가 걜 어떻게 아냐며 물었다. 제이가 웰, 하더니 어깨를 씰룩대며 말했다.
我们在图书馆一起做作业。 《斗鱼的 Psy》、《斗鱼的 BTS》和《斗鱼的 Biki》。从当时的情况来看,他似乎指的是元英,所以我问你是怎么知道他的。杰伊说:“好吧,”然后抽动了一下肩膀。


"She's living here for a long time. She's so famous."

"걔 여기서 쭉 살았어. 유명해."
“他一直住在这里,他很有名。”

"Really? I met her for the first time then."

"그래? 난 그 때 처음 본 건데."
“真的吗?我还是第一次见到。”

"How did you guys meet?"

"어쩌다?" “如何?”

"She came up to me first and asked if I was Korean. I said yes, and we followed each other on Instagram."

"걔가 먼저 와서 한국인이냐고 물어보던데. 그래서 맞다고 했더니 인스타그램 팔로했어, 서로."
“她先来找我,问我是不是韩国人,我告诉她我是,然后我们在 Instagram 上互相关注。”


제이가 아이패드에 노트를 베껴적으며 신기한 듯 말했다.
杰伊一边用iPad抄笔记,一边好奇地说道。


"How did she know you were Korean? She could have thought you were another Asian."

"한국인인 줄 어떻게 알았지? 다른 아시안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你怎么知道你是韩国人?你可能以为我是其他亚洲人。”

"We, I mean Koreans, all know each other. It's easier than telling apart British and French people."

"우리끼리는 다 알아. 그건 영국인과 프랑스인을 구분하는 것보다 쉬워."
“我们之间的一切都了解,这比区分英国人和法国人更容易。”

"What?! That's crazy."

"뭐?! 말도 안돼." “什么?!这太荒谬了。”


어릴 적 잉글랜드에서 살았다던 제이가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이며 연신 노 키딩 노키딩 거렸다. 그렇게나 쉽단 말이야? 노 키딩 노 키딩. 나는 적당히 맞장구치며 다시 과제로 시선을 돌렸다.
年轻时生活在英国的杰伊夸张地提高了声音,反复喊道:“别开玩笑了,别开玩笑了。”有那么容易吗?不开玩笑,不开玩笑。我理所当然地同意了,然后把注意力转回任务上。


이 곳은 미시건. 미주 내 북동쪽에 위치해 있어 겨울이 매우 춥다. 지금은 봄학기가 끝나가는 자락이라 얇은 아우터 한 겹이면 하루를 누리기 적합하다.
这个地方就是密歇根州。它位于美洲东北部,因此冬天非常寒冷。春季学期即将结束,一件薄薄的外套就足以让你度过这一天。


기지개 한 번 쫙 피고 제로콜라를 쭉 빨았다. 좀 전에 햄버거 먹고 남은 콜라라 얼음이 녹아 좀 맹맹하다. 제이가 이것 좀 알려달라며 날 톡톡 건드렸다. 여기서 자꾸 신택스 에러가 나.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문득 머리 위로 그림자가 기울어지는 걸 느낀다.
我伸了个懒腰,喝了一口零号可乐。之前吃的汉堡剩下的冰已经融化了,有点干。杰伊拍拍我是为了告诉我这件事。我在这里不断收到语法错误。我不知道为什么。突然,我感觉有一个影子斜照在我的头顶上。


"Hey."


포에버영이 인스타그램에서 튀어나와 눈 앞에 있다. 학교 이름이 새겨진 맨투맨을 입고 아래로는 짧은 러닝쇼츠를 입었다. 그 덕에 긴 다리가 하늘 끝까지 닿을 정도로 길어보인다. 안 춥나. 친구인 듯한 한국인이 음료수를 쪽쪽 빨며 한걸음 뒤에 서 있다.
Forever Young 从 Instagram 中跳出来,就在你眼前。他穿着一件印有学校名称的运动衫,里面穿着短跑短裤。也正因为如此,一双大长腿看起来特别长,一直延伸到天空。不冷吗?一位似乎是朋友的韩国人站在后面一步,喝了一口饮料。


"어, 안녕." “呃,嗨。”

"뭐해?" “你在干什么?”


도서관에서 공부하지 뭘 해. 대충 그런 눈짓으로 말을 삼키고 웃어보였다. 분명히 첫만남 때는 존댓말을 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그런 한국식 예절이 모두 미국화 되어있었다.
为什么不在图书馆学习呢?他把话咽了下去,用那样的眼神微笑着。我认为我们第一次见面时肯定使用了尊重的语言,但今天所有这些韩国礼仪都已美国化。


"여기 자주 와?" “你常来这里吗?”


학교의 세 도서관 중에서 가장 넓은 곳, 그리고 4층은 그 중에서도 Print center가 있어 학생들의 접근성이 높은 곳이었다. 그 점이 사실 조용한 공부를 선호하는 내겐 그닥이라 자주 오지는 않았다. 오늘은 제이가 이 곳을 제안해서 따라왔을 뿐이다.
它是学校三个图书馆中最大的一个,四楼有一个打印中心,方便学生使用。其实这对我来说不是重点,因为我比较喜欢安静的学习,所以我不常来这里。今天,我只是按照杰伊的建议来了这个地方。


"가끔?" “有时?”

"그래? 그럼 보통 어디서 하는데?"
“真的吗?那通常发生在哪里?”

"...글쎄. 그 때 그 때 다른데. 보통은 18th?"
“……嗯,有时会有所不同,通常是18号?”

"What?"


원영이 살짝 미간께를 찡그리며 되물었다. 내 발음이 미국인인 원영의 청해에 부족한 듯 싶었다. 민망함을 느끼며 혀를 길게 늘려 다시 대답했다.
元阳微微皱眉反问道。我觉得我的发音对于美国人元英来说还不够好,听不懂。我不好意思地伸出舌头,再次回答。


"Eighteen-th."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원영에게, 옆에 서 있던 친구가 슬쩍 말했다. 우리 늦었어, 가야 돼. 원영이 엄지와 검지로 O를 만들어보이곤 가는 채비를 했다. 홱 소리가 날 정도로 등을 돌리더니 뒷모습이 멀어진다. 옆에서 제이가 와우, 하는 소리를 내서 옆을 봤다.
这时,站在元英身边的朋友才小声对元英说了些什么,元英点点头。我们迟到了,我们得走了。元英用拇指和食指做了一个O形,准备出发。他转过身去,听到突然的声音,然后他的背影移开了。旁边的杰伊“哇”了一声,我就看向一边。


"She's so... cute."


원영을 보고 cute라고 하지 않을 만한 남자는 게이밖에 없지 않을까. 아니 설령 게이라고 한들 원영이 cute and charming하다는 사실에는 동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긴 다리로 여유롭게 걸어가는 원영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제이는 이제 신택스 에러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我想唯一不会说元英可爱的人就是同性恋者。不,即使他是同性恋,他也不得不承认元英可爱又迷人。我看了一眼元英迈着大长腿悠闲行走的背影,然后转过头。现在杰伊似乎已经忘记了语法错误。





-


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수업 6개 듣는 사람으로선 약간 죽을 맛이었다. 첫 시험이 다음 주 월요일, 마지막 시험이 목요일이었고 오늘은 그 전 주 토요일이었으니 한창 미친듯이 공부해야 되는 날에 애석하게도 감기기운이 있어 마스크를 낀 채 도서관에 가는 중.
决赛即将来临。作为一个上了6节课的人来说,这有点像死亡经历。第一场考试是下周一,最后一场考试是周四,而今天是之前的周六,所以在本该疯狂学习的一天,不幸的是,我感觉自己感冒了,所以我准备去戴着口罩的图书馆。


아직 이른 시간이라 자리는 많았다. 햇볕이 잘 드는 자리에 가방을 휙 던져놓고 손을 씻으려고 화장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안쪽에서 원영이 나왔다. 마스크를 썼는데도 눈만으로 날 알아봤는지, 원영은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时间还早,所以还有很多座位。我把包扔到阳光充足的地方,然后去卫生间洗手。正当我准备开门进去的时候,元英从里面走了出来。尽管我戴着口罩,元英似乎只用眼睛就认出了我,并热情地跟我打招呼。


"언제 왔어 언니?" “姐姐你什么时候来的?”

"어, 안녕. 나 방금. 너는?" “呃,我刚才呢?”


원영이 나를 따라 도로 화장실로 들어온다.
元英跟着我进了浴室。


"나도 방금 왔어. 같이 공부할래?"
“我也刚来,你想一起学习吗?”


비누칠까지 다 하고 손을 거두니 콸콸콸 쏟아지던 물줄기가 뚝 하고 멈췄다. 덕분에 소란하던 주위가 조용해진다. 
当我涂完肥皂,收回手时,涌出的水突然停了。如此一来,喧闹的环境就变得安静了。


"나 감기기운 있는데." “我感冒了。”


심한 건 아니었지만 간헐적으로 기침이 올라오는 정도는 되었다. 사람들 많은 곳에 쥐죽은듯이 구석에 앉아 공부할 수는 있어도 누군가와 붙어앉아 이러니 저러니 담소를 나누기엔 시간도 부족했고 뭣보다 혹시나 감기가 옮을까봐 걱정할 정도는 되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친하지 않은(엄연히 말하면 고작 오늘이 3번째 만남인) 원영과 함께 공부를 하는 건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사정이 녹록치 않았다. 내 말을 들은 원영이 호들갑을 떨었다.
虽然不严重,但足以让我间歇性咳嗽。虽然我可以在人多的地方坐在角落里学习,但我没有足够的时间坐在别人身边聊这聊那,最重要的是我担心自己会感冒。所以和我不太亲近的元英一起学习(说实话,今天只是我们第三次见面),无论我怎么看都不容易。元英听到我的话,大惊小怪。


"감기? 공부해도 괜찮은거야?" “冷吗,学习好不好?”

"해야지. 내일 모레 시험이라." “我后天还要考试。”

"언니 약은 먹었어?" “你吃药了吗?”

"아니. 집에 약이 없더라구. 근데 괜찮아. 그렇게 안 심각해."
“没有,家里没有药。”

"그럼 다행인데.... 그래서 자리 어디야?"
“嗯,那就好……那么座位在哪里?”

"응...?" “嗯……?”


원영은 붙임성이 좋은건지, 혼자가 싫은건지, 그냥 사람이 좋은건지, 그도 아니면 눈치가 없는건지 전혀 여의치 않은 듯했다. 웃는 얼굴로 제안하는 원영을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결과적으로 원영은 내 옆에 가방을 들고 붙어앉았다. 도서관에는 하나 둘 학생들이 모여 앉기 시작했다.
元英似乎不知道自己是否友善,是否讨厌独处,是否只是喜欢别人,或者是否只是没有任何理智。我无法拒绝微笑着提出请求的元英,结果元英拿着包坐在我旁边。学生们开始一一聚集到图书馆里坐下。


"언니, 점심 어떻게 해?" “姐姐,中午吃什么好呢?”


원영이 책을 쾅 덮으며 물었다. 공부에 기가 조금 빨렸는지 미간에 작은 주름이 패여있다. 아침에 나올 때 싸온 샌드위치를 가방 지퍼 열어 보여주었다. 탄단지 균형 맞춰 싼 닭가슴살 샌드위치다. 원영이 짧게 감탄하고서는 물었다.
元英一边问道,一边合上书本。眉间有细细的皱纹,似乎对学习有些灰心。早上离开时,我打开包的拉链,给它看了我装的三明治。这是一种便宜的鸡胸肉三明治,燃烧均匀。元英短暂的欣赏了一下,然后问道。


"그거 오늘 안에 꼭 먹어야 돼?"
“我今天必须吃那个吗?”


나는 멍청하게 마스크 위 눈을 껌벅였다. 
我愚蠢地在面具上眨了眨眼睛。


"오늘 안에 안 먹으면 죽어?"
“今天不吃的话,我会死吗?”

"아니..." “不...”

"그럼 나랑 나가서 먹자. 사줄게. 포케 좋아해?"
“那我们一起出去吃吧,我给你买点吃的吧?”


그러면서 벌떡 일어나는 원영을 말릴 방도가 없었다. 정신차려보니 차키를 만지작대며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원영을 따라가고 있었다.
根本无法阻止突然起身的元英。当我回过神来的时候,我发现自己正跟着元英,他摆弄着车钥匙,大步走开。

하기사 샌드위치는 저녁에 먹어도 되고, 아직 날이 쌀쌀해서 상할 염려는... 거의 없었다. 결코 꽁밥이 간절해서가 아니었다.
晚餐可以吃萩三明治,而且由于天气还冷,所以几乎不用担心会变质。这从来不是因为我急需米饭。


원영과 잘 어울리는 노란색 컨트리맨이 주차장에 반듯이 주차되어 있었다. 차 예쁘다. 나의 칭찬에 고맙다고 화답하며 원영은 친절히 조수석 문도 열어주었다. 차 안에는 과일향이 퐁퐁 풍겼다.
一辆与元英很相配的黄色Countryman停在停车场。车子很漂亮。元英感谢我的夸奖,并亲切地打开了乘客舱门。车内弥漫着一股果香。


"네 차야?"  “是你的车吗?”

"남의 차 몰까봐?"  “你害怕开别人的车吗?”


원영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元阳坏笑了一声。


"아니 내 말은, 부모님 차라던가."
“不,我是说,我父母的车什么的。”

"내 차 맞아." “这是我的车。”


대학 들어올 때 부모님이 선물해주었다고 했다. 나는 부러운 눈으로, 능숙하게 운전하는 원영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식당은 차로 고작 10분만 가면 되는 가까운 곳이었는데 원영은 이 곳의 단골인지 주차장 입구를 찾는 것이나 주차권을 끊는 것이나 주차자리를 찾는 모든 것이 능숙해서 어른 같았다. 
他说,当他进入大学时,他的父母把它作为礼物送给了他。我用羡慕的眼神看了一会儿元英熟练驾驶的侧影。餐厅很近,只有10分钟的车程,元英可能是这里的常客,但他看起来像个成年人,因为他什么都擅长,包括找到停车场的入口,拿到停车票,并寻找停车位。


원영은 입이 짧았다. 포케를 절반 정도를 남겼다. 입맛에 안맞냐고 두 번 물었는데 두 번 다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미국생활이 더 잘맞느냐, 한국생활이 더 잘맞느냐 등의 식상한 대화를 했다. 원영은 일 년에 한 번은 한국에 가고, 갈 때마다 신나게 놀지만 미국이 더 편하고 익숙하다고 했다. 그렇게 재미있는 대화는 아니었는데 원영은 잘도 웃었다. 웃은 직후에는 목소리가 한 톤은 더 올라갔다. 원영의 목소리는 어딘가 살짝 동글동글 뭉쳐있는 느낌이었다.


사람 성정이 원래 그런건지 아니면 나와의 대화가 유달리 재미있는건지 원영은 연신 웃었다. 내가 A라는 질문에 대해 B라고 답하면 B에 관련된 C를 물었다. 대화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따금 나는 원영의 말이 깜찍하거나 또는 재치 있어서 웃었고, 그럼 원영은 따라 웃었다. 나는 1000에 가깝던 원영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와 게시물마다 이백 개는 찍혀있던 하트를 생각했다. 원영이 내게 친근한 손길을 표하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뿌듯하기도 했다.





-


간식 이벤트 - 한인학생회가 쏜다! 

한인학생(학부, 대학원 불문) 위해 통크게 마련한 간식 선물!

Chick-Fil-A Sandwich (or Wrap) with Fries, Soda!

When? Mon, May 1, 6:00 pm

Where? 18th library lobby

(준비한 물량 소진 시 종료)




[나 감기 걸린거 같애]

[책임져 언니]

[계속 기침 나오고 열도 나. 머리아파. 😇]


같이 공부한 게 그저께였다. 나의 감기기운은 말끔히 사라졌으며 조금 전에 시험 하나를 해치웠다. 잘 본 줄은 모르겠고 정말 말 그대로 해치웠을 뿐이다. 해치웠나? 라고 의문 따위는 갖지 않는다. 아무튼 그러고나서 칙필레를 얻어먹기 위해 3시간 밖에 못자서 뻐근한 눈꺼풀을 억지로 뜨고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있은지 꼭 두시간 쯤 되었다.


약은 먹었어?

[응 근데 계속 아파. 어떡할거야 언니.]


사실 내 탓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았지만(우리가 김치찌개를 같이 퍼먹은 건 아니니까) 생각해보니 그날 밥을 얻어먹었는데도 커피 한 잔 보답을 못했다 싶은 것이다. 밥 한 번 사겠다고 선심을 쓰니 원영은 편한 일시를 다섯 개나 정리해서 보냈다. 근데 죄다 이번주 이내라서 살짝 벽을 쳐야겠다 싶었다.


시험 끝나면 볼까? 

나는 다음주 월요일부터 괜찮아


시간은 조금 남아있었지만 일찍 자리를 뜨기로 했다. 친구들에게 당당히 한인학생 연합에서 간식을 준비했다고 으스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것이 한국인의 Jeong이라는 것이다. 


도서관 로비에 도착하니 저 곳에 이미 가판대가 펼쳐져 있고, 오며가며 마주친 적 있던 한인학생회 인물들이 자리를 세팅하고 있었다. 뻘쭘하게 주위를 서성이는데 시야 구석에 무언가 익숙한, 마르고 길쭉한 사람의 형태가 잡힌다 해서 눈 비비고 다시 보니, 원영이 거기 있었다. 지난번 다른 도서관에서 함께 있었던 그 친구랑 같이 로비 벤치에 앉아있다. 원영이 먼저 날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감기기운 있다더니, 괜찮아?"

"응? 너 감기기운 있어?"


원영의 친구가 원영을 향해 물었다.


"아, 그냥 조금...."


그러고나서 원영은 혀를 빼꼼 내밀며 웃었다. 콜록케헥. 기침 소리가 이어진다. 


"...언니도 이거 먹으러 왔어?"

"응."

"칙필레 좋아해?"

"칙필레를 어떻게 안좋아할 수 있어?"


원영이 깜찍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하긴, 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다급하게 다음주 월요일 저녁에 자기도 시간이 된다고 했다. 그말인 즉슨 내가 보낸 메시지를 미리보기든 뭐든 보았다는 말이었다. 뒤에서 학생회 사람들의 안냇말이 들려서 고개를 돌렸다. 줄을 서려다 문득 뒤돌아 원영을 보았다. 그새 꺼내든 휴대폰에는 빨간뱃지가 가득하다. 수없이 쌓여있는 알림들. 눈이 마주치고.


"콜록, 콜록."


원영이 또 한 번 어색하게 기침을 한다.




-


시험이 끝나고 16시간을 잤다. 2주 묵은 불면을 한 턴에 털어버리고 나니 그제야 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언니 여름에는 뭐해?"

"나 여름인턴."

"아, CS는 인턴 자리 많지. 어디서?"

"그냥 학교에서 하는 여름인턴."


운 좋게 학교에서 인턴할 자리를 구한 찰나였다. 원영이 접시에 스리라차 소스를 쭉 짰다. 


"너는?"

"나는 다음주에 한국 가."

"얼마나? 왜?"

"사촌언니가 결혼한대서 겸사 겸사. 3주 정도?"

"겸사겸사라는 말도 알어?"

"왜 이래. 나 잘해."

"사촌언니랑 친해?"

"아니, 어릴 때 보고 요즘엔 거의 안봤어. 언니는 한국 안가?"

"응, 나는 겨울에 다녀와서."

"여행은 안가?"

"아직 계획 없어. 가면 좋구."

"지금 사는 데는 어디야?"

"빌트모어 아파트라고... 웨스트에 있어."

"인턴 교수님은 누구야? 한국인?"


마치 취조라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기분이 나빴던 것은 아닌데 장난치고 싶어서 나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너 나한테 궁금한 게 되게 많나보다."


콜록콜록. 원영이 칙필레 먹던 날처럼 갑자기 기침을 뱉었다. 그 때문에 얼굴에 금세 붉은기가 올라와 접시에 짜여진 소스와 비슷한 색깔이 되었다. 나는 허겁지겁 물잔을 원영에게 내밀었고, 원영은 가슴을 쿵쿵 치면서 물잔을 받아 냉큼 들이켰다. 잘못 삼켰어? 나의 물음에 원영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먹어. 이어진 당부에는 그것보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영은 진정하느라, 나는 갑자기 온 Slack 노티를 읽느라 잠시 우리 사이는 정적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응."

"...응?"


여름인턴과 관련한 노티에 아까 우리가 했던 대화를 잠시 잊어, 나는 원영이 갑자기 뭐에 대한 응답을 했나 했다.


"궁금하다고. 언니. 그래서 말 걸었던 거야. 풋볼 경기장에서."

"...하긴 여기는 한국인이 얼마 없으니까."

"아니 내 말은.... 아니야. 근데 나 언니 꺼 한 번만 먹어봐도 돼?"


원영이 내 치킨 쌀국수를 향해 젓가락을 들었다. 언니는 치킨을 좋아하는구나. 그 말이 꼭 이제 막 문장구조를 배운 어린애가 구사하는 것 같아서 나는 웃었다. 쌀국수를 먹어본 원영이 흠, 소리를 길게 냈다. 낫 배드하네. 한껏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한다. 그게 귀여워서 또 웃음이 났다.


"몸은 좀 어때? 감기는."

"어... 완전 괜찮아졌어. 근데 언니. 한국 친구들이랑은 잘 안 다녀?"

"응. 나 한국 친구 별로 없어."

"왜?"

"그냥, 한국 애들이랑 한 번 놀면 걔네랑만 놀게 되더라구."


미국생활을 시작한지 2년 째인데 영어가 크게 늘지 않은 이유는, 지난 학교에서 워낙 한국 친구들이랑 붙어다닌 까닭이 컸다. 원영은 어느새 젓가락을 내려놓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나랑은? 놀아도 돼?"

"넌 미국인이잖아."

"아니, 내 말은."

"장난이고. 피해다니는 건 아니야. 너는? 한국 친구들 많지? 저번에 보니까 그런 것 같던데."

"응. 그냥 뭐 나는 여기 오래 살았으니까. 얼마 없는 애들이랑은 다 친해. 아, 맞다. 파티 있는데. 언니도 올래?"


파티? 고개를 갸웃하는 내게 원영은 친절히 설명했다. 친한 한국인들 몇 명이서 종강파티를 계획했다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안마신지도 좀 오래됐고, 원영과 웃으며 대화하다보니 한국어로 의사소통 가능한 자리를 내가 꽤 그리워했구나 싶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원영과의 자리라면, 가고 싶었다. 






-


"안녕하세요. 안유진이라고 합니다. 전공은 Computer Science에요. 3학년. 편입했어요. 한국 나이로 스물 둘이요."


추가질문이 들어올까봐 한번에 최대한 많은 걸 소개했다.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원영은 짝짝짝 박수를 쳤다. 유진 언니 진짜 이쁘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뜨고 다정했다.


미드타운에 위치한 아파트의 루프탑 라운지. 여기 있는 학생들 중 여럿이 사는 아파트라고 했다. 모인 사람들은 총 열 셋. 오며가며 몇 번 얼굴이 익은 사람도 있고, 정말 초면인 사람도 있다. 거의 모든 사람과 친한지 원영은 아까부터 웃음과 대화가 끊이질 않는다. 술 한 잔 했는지 얼굴빛이 붉다.


나는 빨간색 플라스틱 컵에 담긴 맥주를 들이켰다. 각자 포트락으로 싸온 음식이 테이블 위에 올려있고 사람들의 손은 바쁘게 오간다. 원영은 나로부터 꽤 거리가 떨어진 곳에 앉아있다. 이따금 튀어나오는 영어 발음이 부드럽다. 나는 내 오른쪽 사람과 맞은편 남학생과 계속해서 이야기를 섞었다. 대화는 대충 이런 것들이었다.


"저 오며가며 본 적 있어요. 18th 많이 가시죠?"

"네. 거기가 제일 잘되더라구요, 저는."

"항상 외국인 친구분들이랑 계셔서 말 못 걸었었거든요."

"제가 한국인 친구가 없어서...."

"이제 자주 놀아요."


친분 다지기보다는 어색함을 타파하기 위한 게 주목적인 대화. 나는 연거푸 맥주를 들이켰다. 술 잘 드시나 봐요, 하고 내 앞 남자가, 이름이 승훈이었던가, 오 소리를 내며 쓸데없이 관심을 모았다.


"...잘 먹지는 않고..."

"잘 드시는 것 같은데. 혹시 더 센거 필요하시면 잭다니엘 드릴까요?"


하드리쿼 취향은 아니어서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다 문득 시야의 구석에, 다른 친구를 정답게 끌어안는 원영이 담겼다. 붉은 얼굴로 헤헤 웃으며 시종일관 무언가를 얘기하며. 문득 정체모를 불쾌함이 올라온다.


"네. 주세요."


그래서 나는 잭다니엘을 얼음도 넣지 않고 한 샷 들이켰다. 또 한번 사람들이 오오 소리를 냈다. 저 멀리 있는 원영도 나를 본다. 샷잔을 쥐고있는 나를 향해 눈을 똥그랗게 치켜보인다. 다른 한 손은 여전히 다른 친구의 어깨 위에 올라가있다. 


"혼자 먹지 말고 같이 먹어요."


승훈이 제 잔을 내밀자 나는 원영으로부터 완전히 고개를 돌려 잭다니엘을 따라주었다.


쟤는 유독 나한테만 다정하고 나를 꼭 초대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모두에게 그런 애였다는 생각이 들고나니 조금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언니 괜찮아?"


제법 취한 이후에 화장실을 다녀와야겠다싶어 라운지 문을 열고 나갔다. 휘청휘청 걸어가는데 그 때처럼, 원영이 화장실에서 나오는 바람에 마주쳤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아까 보니까 잭다니엘을 무슨 맥주처럼 먹던데."

"아니야... 괜찮아."

"진짜로?"

"응. 얼른 가서 놀아. 너 기다리는 애들 많잖아. 잘 놀던데."


유치하기 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조금 삐진 얼굴이었는지도 모른다. 


"언니도 잘 놀던데? 거기 사람들이랑 친해졌나봐."

".... 그건."

"그건?"


그렇게 나랑 놀자고 하고, 밥먹자고 하고, 파티에도 초대하고, 유진 언니 진짜 예쁘지 않냐고 했으면서.


"아니야."


나는 그대로 원영을 스쳐 지났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바로 우버를 불렀다. 가려는 시늉의 내게 승훈이 번호를 물었다. 우버가 정말 곧 도착한다고 나왔기 때문에 서둘러 번호를 찍어주고 작별했다. 부랴부랴 짐을 챙겨나가느라 원영과는 인사를 하지도 못한 채로. 





-


스토리는 세 개. 

처음. 어깨가 훤히 드러난 오프숄더 원피스를 입고 친구들과 함께 웃고 있다. 

두 번째. 타코와 치킨윙과 피자와 라자냐가 올라간 식탁. 

세 번째. 원영은 뽀뽀를 당하고 있다. 양쪽에서. 한 명은 여자, 한 명은 남자. 여자는 아시안이고, 남자는 금발의 양인이었다. 가운데에서 뽀뽀를 받고있는 원영은 한 쪽 눈만 감은 채로, 그러니까 윙크를 하며 활짝 웃고 있다. 이런 애정표현이 아무렇지 않구나. 한국에서 내리 스무 살까지 있던 나로서는 하기 힘든 일이었다. 여자면 모르겠는데 오른쪽은 남자잖아. 근데,


"얘는 또 파티?"


지치지도 않나. 안 놀면 혀에 가시가 돋나? 아니 얘는 이런 표현도 모르겠지? 미국인이라 그런가? 파티를 안하면 좀이 쑤시나? 이 표현도 모르겠지? 


"아야."


문득 내가 휴대폰을 너무 세게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역시 장원영은 원래 이런 애였던 거다. 나랑 더 친해지고 싶고 밥을 사주고 싶고 감기기운 핑계로 한 번 더 보고 파티에 함께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노는 거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돈 잘 쓰는, 잘 사는 집 인싸 딸내미. 나는 또 한 번 부끄러운 감정이 들어 인스타그램을 껐다.

그러고보니 슬슬 출국 준비가 한창이겠다 싶었다. 한국에 가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인스타를 업로드할까. 


연구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부쩍 거세진 햇살 때문이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고였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시원하게 뽑아먹어야겠다 싶어서 학교 내 스타벅스로 직진했다.


"어? 유진이 언니."


원영이 그곳에 있었다. 긴 다리를 짝다리 짚은 채로,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한다. 나는 내가 했던 착각들이 생각나 조금 머쓱한 기분으로(원영은 전혀 모르겠지만) 손을 마주 흔들었다.


"인턴 출근 중?"


오늘도 원영은 혼자가 아니었다. 여자애 하나, 남자애 둘과 함께 있다. 이번엔 한국인이 아니다. 그들이 나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원영이 뒤늦게 나와 그들을 인사시켰다. 헤이, 디스 이스 유진. 쉬 이즈 얼소 프롬 코리아. 나이스 투 밋츄. 단순한 인사말이 오고간 다음에야 나는 원영에게 대답할 수 있었다.


"응."

"커피 뭐 마셔?"

"나 아메리카노."

"Vicky!"


아마도 이 곳 학생일 앳된 얼굴의 점원이 이름을 호명하자 원영은 헤 웃었다. 다리가 워낙 길어 세 걸음이면 가판대에 닿았다. 그란데 사이즈의 핑크드링크를 휘어잡는 손의 뼈대가 도드라진다. 곧 내 차례가 되어 커피를 주문하고 돌아섰다.


"왜 그 날 그렇게 빨리 갔어?"


친구들을 들러리처럼 세우고 여즉 자리에 서있던 원영이, 빨대로 음료를 한 번 쭉 들이킨 다음 내게 물었다.


"아, 너무 취해가지고."

"언니랑 놀려고 보니까 없더라구."

"...그래? 나랑?"

"응. 아, 그리고 승훈이 기억나?"

"응, 알지."

"걔가 언니가 자기 연락 안받는다던데."

"응? 연락 안왔는데?"

"그래? 문자했다는데."

"아니야, 연락 받은거 없어."

"Yujin!"


여전히 당황한 얼굴로 나는 걸어가서 커피를 받아왔다. 취해서 번호를 잘못 찍었나. 나의 추측에 원영이 그럴 수 있겠다, 했다. 그러더니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차승훈이 엄청 우울해하던데. 걔가 언니 마음에 들었나봐."

"응? 아니야, 그런 거."

"그런 거 맞을 걸. 아무튼 그래서 내가, 언니는 너 마음에 안드나보지, 그랬어. 어때. 맞아?"


원영이 한모금 더 들이킨다. 친구들은 이제 저들끼리 떠들고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한국어에는 금세 흥미가 떨어진듯 보인다. 나는 한 쪽의 눈매가 더 올라가 비스듬히 뜨여진 원영의 두 눈을 바라보다 마찬가지로 커피를 한 입 들이키곤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는데. 전혀."

"모르겠는 건 뭐야?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야?"

"아니, 그 날 처음 봤는데 관심이 있는지 어떻게 알아?"

"원래 첫만남에 감 오지 않나."

"너는 그래?"

"응."

"신기하네."

"한국에서 혹시 필요한 거 있어?"

"갑자기?"

"있으면 디엠 해. 사다줄게."


원영다운 호의였다. 나는 당장 생각나는 것은 없다고 했다. 천하의 원영도 슬슬 친구들 눈치가 보였는지 그들에게로 돌아섰다. 씨유, 언니. 나는 내일 출국. 그러더니 미소 한 번 남겨주고 자리를 떠난다.





-


원영은 한국으로 갔다. 인천공항 사진, 공항에서 먹은 순두부찌개 사진, 가족사진 등등이 인스타에 박음질되어 올라왔고 문득 고국에 대한 향수가 생긴 나는 (결코 원영의 사진을 구경하고 싶어서가 아니고) 그걸 다 읽었다. 아마 지금쯤 여기저기서 디엠 세례를 받고 있겠지. 


오랜만에 학교 짐에서 트레드밀을 뛰고 있었다. 비어있던 옆자리에 누군가 올라서서 천천히 걷는 기척이 느껴졌다. 잠시 후 속도를 낮추고 걷기 시작하는 내게 옆사람이 말을 걸었다. 저기요, 하고. 나는 놀라 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누나."

"어, 안녕."


승훈이었다. 위아래 아디다스 세트를 갖춰입고 나를 향해 웃는다.


"잘 지내셨어요?"

"어, 뭐..."

"문자 보내도 답이 없으셔서..."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와중에 해명했다. 번호를 잘못 준 것 같다고 말이다. 근데 그 말을 듣자 눈이 너무 커지면서 좋아하길래 괜히 해명했다 싶었다. 승훈이 학교 근처에서 밥 한 번 먹자고 했다.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으므로 승낙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만났을 때, 승훈에게서 너무 진한 향수향이 나서 당황했다. 향수를 들이부었나. 원영이는 딱 기분 좋을 정도로 뿌리던데. 맘속에서 나도 모르게 원영을 떠올리고 있었다.


"원영이랑은 친해요?"


치킨앤와플은 썩 퍽퍽해서 저절로 칼질이 사나워졌다. 


"별로."

"아, 원영이가 데려와서 엄청 친한 줄 알았어요."

"안 친해. 그냥 어쩌다가 알게 됐어."

"근데 원영이는 누나랑 친하다고 그러던데. 재밌다."

"걔가? 그래?"


나는 생글생글 웃는 승훈의 낯짝이 조금, 마음에 안들었다. 떠본건가 싶어서. 그나저나 원영이 했다는 대답도 좀 흥미로웠다. 걔는 나랑 친하다고 생각했다는 거지. 장원영 한국 가서 사진 진짜 너무 올려대지 않아요, 네? 어우. 부러워 죽겠어요. 승훈이 투덜대다가 내가 또 한 번 치킨이랑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치킨 질겨요?"

"엉. 엄청."


승훈이 어디 한 번 줘봐요, 하면서 내게서 나이프를 바로잡았다. 남자애가 해도 별반 차이는 없었다. 한 번 먹어봐도 돼요, 하더니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작은 조각을 입으로 가져간다. 맛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맛 아니었는데. 너무 짜요."


승훈은 서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곧 다가온 그에게 능숙한 영어로 음식이 너무 짜고 맛이 없다고 컴플레인을 걸었다. 고등학교 때 미국에 왔다더니 영어를 꼭 네이티브처럼 했다. 결국 매니저까지 왔고, 상황설명을 듣고 치킨을 맛본 매니저가 정말 미안하다며 우리에게 사과한 다음에야 일이 마무리되었다. 게다가 돈도 받지 않겠다고 해서, 솔직히, 개이득이었다. 승훈이 뿌듯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대단하다며 따봉을 치켜들어 주었다. 그 때 갑자기 휴대폰 알림이 울려서 미리보기를 보았다. 


[또 치킨? ㅋㅋ]


원영이었다. 오고싶었던 곳이라 찍어올린 스토리에 대한 답장.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 2시가 넘었을 텐데 꽤 늦게 자는 모양이다. 답장은 좀 이따 해야지, 했는데 또 메시지가 온다.


[여기 누구랑 갔어?]


원영에게 답장한 건 결국 밥을 다 먹고 나와서 커피를 마시다가 승훈이 화장실에 갔을 때였다. 승훈이랑 갔는데, 치킨이 너무 퍽퍽해서 별로였어. 매니저가 최근에 셰프가 바뀌었다더라구. 결국 돈 안받음 ㅎㅎ 구구절절 답장을 보내는 와중에 곧바로 Sent에서 Seen으로 마크가 바뀐다. 이제는 3시가 넘었는데, 시차적응이 아직 안되는 모양이었다. 


[차승훈? 대박]

[다행이다 그래도]


뭐가 대박이라는 건지. 나는 조금 고민했다. 왜 아직 안 자냐고 물어볼까 말까. 원영의 화면에도 이제 Sent가 아니라 Seen으로 바뀌어있을텐데. 그러던 중에 승훈이 돌아와 앉았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봐요, 질문에 나는 내가 심각한 얼굴이냐고 물었다. 승훈이 파하 웃는다.


"조금? 남친이랑 싸우기라도 해요?"

"나 남친 없는데."

"헐, 진짜요?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럼 누군데요?"

"원영이."

"장원영이요?"


나는 승훈에게 DM 화면을 보여주었다. 승훈이 한 번 더 웃는다. 뭐가 대박이래, 얘는. 하면서. 나는 결국 답장하길 포기하고 승훈에게, 원영과 어떻게 친해졌는지 물었다. 승훈이 커피를 마시며 대답했다.


"고등학교 때, 무슨 여기 영사관에서 한인들 대상으로 한글날 행사를 했거든요. 그 때 학교에서 몇 명 뽑아서 보내줬는데 거기서 만났어요. 장원영 유명했어요. 프롬 퀸도 하고. 그 때 주위에서 소개시켜달라고 한 애들도 진짜 많았는데."

"너는 관심 없었어, 원영이한테?"


승훈이 이제까지 중에 제일 크게 웃었다. 그게 그렇게 웃긴 질문이었나 스스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장원영 같은 핵인싸는 좀 제 스타일 아니에요. 인스타도 많이 하고."


나는 승훈과 대화하면서도, 프롬 퀸을 했다던 원영의 그 날 모습을 나도 모르게 상상하고 있었다. 분홍색 좋아하는 것 같던데 분홍색 드레스를 입었을까. 




-


사촌언니 결혼식 날, 예상대로 원영의 인스타그램은 무척이나 바쁘게 업로드됐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언니, 하트 오만 개, 이렇게 예쁠 일이야, 눈물 좔좔, 눈물 이모티콘 오만 개... 안 친하다며. 얘는 진짜 친한 척하는 데엔 도사구나. 하긴 그러니까 그렇게 친구도 많고 인기도 많고, 그런 거겠지. 바운더리 안에 있는 사람들만 챙기는 나로서는 신기할 따름이다. 그 와중에 단정한 원피스를 입고 있는 원영의 모습이 예뻐서 잠깐 보았다. 


"Yujin. Are you busy now?"

"Not really. What's wrong?"


우연찮게 제이도 같은 랩에 학부인턴 자리를 구했고, 옆자리를 배정받았다. 제이가 바쁘지 않으면 새 프로젝트 얘기를 하자고 해서 노트북을 챙겨 털레털레 회의실로 걸어갔다. 가볍게 시작한 회의였지만 생각보다 길어져 1시간이 지난 후 회의실을 나왔을 때, 나는 원영에게서 메시지가 와있는 걸 보았다. 비비큐인 듯한 치킨 사진과 함께,


[나 다음주에 돌아가는데 언니 안바쁘면 치킨 먹으러 가자]

[플리머스에 비비큐 있는데]

[가봤어?]


이런 또 다정한 말들이었다.



원영이 돌아왔다. 인스타에 Finally came back 이라는 대문짝만한 멘션과 디트로이트 공항 사진과 함께. 


"잘 지냈어?"


원영의 흰 피부가 조금 발그레했다. 한국 햇살에 조금 탄 것 같았다. 나를 친히 픽업하러 와준 원영의 차에 타 안전벨트를 맸다. 


"잘 지냈지. 너는? 한국 어땠어?"

"한국 너무 좋았지. 결혼식은 재미없었고."

"재미없었다고? 진짜?" 

"응. 지루하고 따분하고... 그래도 음식은 맛있더라."


사진으로는 엄청 즐거워보였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퇴근 시간대라 차가 많이 막혔다. 특히 하이웨이로 진입하는 부분이 헬이었다. 원영은 한 번 클락션까지 눌렀는데, 여차하면 옆차랑 시원하게 접촉사고가 날 뻔 했다.


"What the f... 아, 미안."


찌푸리며 읊조리다가 내게 사과한다. 나는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저렇게 욕도 할 줄 아는구나. 뭔가 신기하기도 하고. 산전수전 끝에 하이웨이를 달려 도착한 비비큐는, 슬프게도 손님이 많아서 대기가 1시간이라고 했다. 


"괜찮으면 혹시 포장해서 우리 집 가서 먹을래?"


혹시 분위기에 마가 뜰까봐 걱정되는 것 말고는 거리낄 게 없었다. 투고 음식은 20분 만에 나왔다. 우리는 치킨을 챙겨 다시 원영의 차에 올랐다. 가는 동안 나는 원영이 한국에서 어떤 음식들을 먹고왔는지 들었다. 잔뜩 흥분해 말하는 모양이 귀엽기도 했다.


"그래서, 언니는 차승훈이랑 어때?"

"뭘 어때. 암 것도 아니야."


원영은 학교 2인실 기숙사에 살았고, 거실을 두고 룸메이트와 개인 방을 쓰는 구조였다. 마침 룸메이트가 여름을 맞아 여행을 가서 우리는 편하게 거실을 점령할 수 있었다. 10평 남짓한 공간에서는 원영의 차에서와 마찬가지로 과일향이 났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차에서 나는 향은 달달했고, 집에서 나는 향은 상큼하다는 점이었다. 공통점은, 죄다 원영과 어울리는 향들이라는 점.

원영이 냉장고에서 제로콜라 두 개를 꺼내왔다. 콜라 먹지? 끄덕끄덕. 시원하게 콜라를 따 얼음 위로 콸콸 부었다. 원영은 아무 말 없이 내가 첫 치킨 조각을 들고 먹을 때까지 나를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내가 한 입 먹고나자 기대에 부푼 얼굴로 어때, 맛있어, 하고 묻는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비큐가 어떻게 맛이 없겠느냐고. 여기 비비큐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차가 없어서 시도하지 못했던지라 감동 그 자체였다. 원영이 내 말에 활짝 웃으며 그제야 제 조각을 그릇에 가져갔다. 배가 고파서 허겁지겁 한 조각을 다 먹은 다음에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원영이 살고 있는 공간을 눈으로 훑었다. 


"저거 다 네꺼야?"

"뭐, 가구?"

"응. 그리고 포스터랑."

"응."


그러니까 나는 여기 원래 올 예정이 아니었으니까, 특별히 손님을 위해 청소한 게 아니라 원래 이렇게 깔끔하게 산다는 말이었다. 이케아에서 샀을 것이 분명한 흰색 우드 재질의 서랍장들. 협탁. 방 벽에 걸려있는 영화 포스터 몇 장. 원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그런가, 라고 했다. 응 그런 것 같은데. 조금 더 치킨을 뜯다가 원영이 문득 이렇게 말했다.


"언니 내 스토리 다 봤더라."

"어?"

"하나도 안 빼놓고."


웃는 얼굴은 능글맞은 건지, 아니면 불쾌했음을 일부러 웃으며 표현하고 있는건지 모호해서 나는 당황스러웠다. 바보처럼 어어, 소리만 내다가 겨우 말했다,


"미안."

"왜 미안해. 그러라고 말한 거 아닌데... 남들 것도 원래 많이 봐?"

"...그런 편인 것 같아."


업로드는 잘 안하지만, 남들 건 잘 보았다. 근데 그런거 원래 누가 다 보는지 확인하나. 침을 꿀꺽 삼켰다. 여름을 맞아 게을러진 노을이 이제야 느릿느릿 창밖으로 지고 있다. 온도 감지가 되는 방에서 에어컨이 자동으로 웅 소리를 내며 찬 바람을 뿜었다. 곧 원영이 다른 얘기로 방향을 틀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인턴에 관한 질문이었다. 나는 대답하면서도 연신 뚝딱거렸다. 어느덧 배가 불러서 젓가락을 놓았을 때였다.


"다음에는 답장도 좀 해줘. 보지만 말고."

"...응?"

"인스타. 나 약간 오기 생기던데. 언니가 다 보면서 하나도 답장 안하길래."

"그... 원래 답장 잘 안해. 보는 것만."

"차승훈한테는 답장했잖아."

"어?"

"걔가 무슨 카페 간거에 답장했잖아."

"....어떻게 알았어?"

"그냥 어제 걔랑 얘기하다가. 자랑하길래."

"......"

"언니 나랑 안 친하다고 했다며. 나 그것도 서운해."


어째 뭔가 단단히 잘못 걸린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원영은 표정이 풍부했다. 처음엔 분명 웃는 낯이었는데 이내 서운한 얼굴로 투덜거린다. 나는 언니랑 진짜 친하다고 생각했는데에. 늘어지는 말끝이 살짝 무서웠다. 나는 손까지 황급하게 내저으며 부정했다.


"그, 카페는 걔가 올린 케이크가 너무 맛있어보여서 어디냐고 물어본 거구. 너랑 안 친하다고 했던 건, 솔직히... 어..."


내가 이걸 왜 이렇게 부정하고 있어야 하지? 


"네가 워낙 친구들이 많으니까 나랑은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어."

"...다음부턴 친하다고 해줄 거지? 우리 이렇게 내 방에서 치킨도 먹었잖아 그지. 나 언니랑 친하다고 생각했다구, 진짜."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당연하지. 그제야 원영이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온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왜 이렇게 청문회 조지고 온 국회의원 같은지. 


"그리고 이거."


원영이 뒤에 놓아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로 묵직한 봉투를 받아들었다. 

봉투 안에 든 것들은 한국제 상비약들과 마스크팩이었다. 코감기, 목감기, 기침, 해열제 등 다양한 종류의 상비약을 확인하고 나는 고맙다기보다도 당황스런 기분이 되었다. 이런 다정함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저번에 약 없다고 그랬던 거 생각나서. 약은 한국 약이 더 좋은 것 같아, 나는."

"...그걸 기억했어? 감동인데."

"이 정돈 기본이지."


원영이 한 쪽 눈을 찡긋한다. 나는 원영의 인기가 절대 외모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다. 사소한 것을 놓치지 않는 친절. 감동적인 오지랖. 그런 것들이 합쳐져서 장원영, 하면 모르는 이가 없게 되어버린 것일까. 나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선물을 내 가방에 집어넣었다.


집에 가는 길은 원영이 위험하다며 차로 데려다주었다. 밤 10시가 넘어 캄캄해진 길거리에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한국이었으면 밤산책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을 여름밤이었다. 열어둔 창문 새로 바람이 솔솔 불어와 머리를 흩날렸다. 나는 운전을 하는 원영을 흘긋 돌아보았다. 전방을 주시하고 있던 얼굴이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 쪽을 돌아본다. 운전석의 창문도 열려있는 까닭에 때마침 바람이 불어 원영의 잔머리가 얼굴 위로 가볍게 흩뜨러진다. 나는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들어가. 그리고 다음부터는 진짜 친하다고 해주는거야. 내가 이렇게 데려다주기도 했잖아, 그치, 언니."

"알았어, 꼭 그럴게. 고마워. 들어가."


퍼블릭 파킹에 차를 대어놓고, 원영은 내게 신신당부를 했다. 진짜지. 진짜야. 나는 결국 세 번이나 확답을 하고나서야 문을 열고 나올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발걸음이 홀가분했다. 엔진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노란색 컨트리맨이 유유자적하게 파킹랏을 빠져나가고 있다. 열린 운전석 창문으로 나온 기나긴 팔이 내게 인사를 전한다. 나는 티라노 사우르스처럼 팔을 소심하게 흔들며 원영을 배웅했다.


내 방으로 들어와 곧장 침대 위로 엎어졌다. 술 한 잔 하지 않았는데, 몹시도 어지러웠다.




-


"너 왜 그걸 원영이한테 꼰질러? 진짜 어이없어."


속을 진정시키기 위한 아이스 커피는 오늘도 필수였다. 승훈이 머쓱하게 옆머리를 긁적였다. 승훈은 여름학기를 등록했기 때문에 매일 루이스 빌딩에 있었다. 그라운드 레벨에 아무 비어있는 테이블을 잡고 앉아 나는 대뜸 성질머리를 부렸다.


"그런 뉘앙스로 말한 게 아니었는데. 원영이도 엄청 웃었단 말이에요. 걔가 화내요?"

"화낸 건 아닌데 서운하다고 어쩌고."

"아, 장원영 원래 그래요. 맨날 서운하다고 오바쌈바하고. 걔 그거 하나도 안 서운할걸요?"

"....그래? 원래 그런다고?"

"네."


승훈이 자연스럽게 내 커피를 가져가 뚜껑 열고 한 입 마셨다. 보통 한 입 먹어도 되냐고 물어보는 게 먼저지 않나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아니었으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승훈이 콧김 한 번 뿜고는 부연설명했다.


"걔도 지 이쁜 거 알아서 콧대 장난 아니에요. 그냥 약간, 상처받은 강아지 전법이랄까... 그런 거예요, 그냥. 그렇게 서운한 척 피곤하게 굴어도 사람들은 장원영 좋아하니까. 누나도 쫄 필요 없어요."

"아니, 원영이가 그러는 거야. 어떻게 스토리 다 보면서 답장을 한 번 안해주냐고."

"말했잖아요. 인스타에 미친 애라고."


인스타에 미친 애라고 했었나. 그냥 인스타 많이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각설.


"근데 원래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요새 유독 많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그럼 다행이고. 아, 개쫄았네."

"걔 원래 그래요. 사람도 잘 챙기고."

"그래. 잘 챙기는 것 같더라."


그렇게 자명한 사실이라는 말이지. 그 선물도 분명 그런 호의의 표현일테다.


"그래서 누나 밥 먹었어요?"


점심을 먹기 전이어서 배가 고팠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스튜던트 센터 안에 있는 칙필레 앞으로 갔다. 메뉴는 늘 먹던 스파이시 치킨 샌드위치 밀. 감자튀김까지 야무지게 먹지 않으면 칙필레를 먹은 거라고 할 수 없다. 둘 다 음식을 받아와 앉았다. 별 시덥잖은 얘기를 하면서 먹고 있는데 문득, 정수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하이."


원영이었다. 이번엔 웬일로 혼자, 제 얼굴만한 헤드폰을 목에 걸고서. 승훈이 오 쓋, 깜짝이야 를 외쳤다.


"둘이 진짜 베프됐나보네?"

"오브 콜스."


승훈이 콜라를 빨며 당당하게 말했다. 원영의 눈썹이 살짝 꿈틀하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이었겠지 설마. 원영이 시선을 내게로 돌리더니 물었다.


"Same?"

"어....?"

"아니에요, 누나?"

"....."


마치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는 질문을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친하다고 하면, 원영이 할 말이 예상됐고("와, 나랑은 안친하다더니") 안 친하다고 하자니 승훈으로부터 원성 듣기("와, 진짜? 안 친한데 이렇게 단둘이 밥 먹어요?") 싫었다. 그래서 그냥.


"베프까지는 아니고, 알아가는 중이지."


그렇게 대답했다. 원영이 소리내어 웃는다. 알아가는 중이라니, 둘이 무슨 소개팅이라도 해? 깔깔. 그 웃음소리가 너무 기가 차다는 듯한 그거여서 나는 또 한 번 벙찌고. 승훈은 그럼 친하다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묻고. 아니 뭐 나보고 어쩌라고. 미국에서 오래 살면 다들 이렇게 되는거야 싶고. 나는 그냥 대답을 얼버무리며 샌드위치만 먹었다. 곧 승훈이 대화를 틀어, 원영에게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나 to go해서 도서관 가서 먹으려고."

"도서관은 왜. 너 수업도 안 듣잖아."

"가을 인턴 알아보려면 미리미리 해야지."

"어, 그래. 수고해라."


원영은 그러고 주문 줄에 가 섰다. 승훈은 그러고나서 내게 그래서 우리 친한 건 아니라는 거예요, 다시 물었고 나는 친하지, 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신경은 온통 원영이 내게 보냈었던 메세지에 가 있었다. 원영이 돌아서고 나서야 휴대폰을 확인하는 바람에 읽게 된 메세지였다. 원영이 우리에게 인사하기 고작 3분 전에 보내왔던.


[언니 혹시 랩실이야?]

[점심 아직 안 먹었으면]

[나 지금 칙필레 갈건데 뭐 사다줄까?]

[점심 먹었으면]

[아아?]

[ (。˃ ᵕ ˂ )b ]


이런 이모티콘은 어디서 복사해서 쓰는 거람. 나는 헤드폰을 쓰고 픽업존에 서있는 원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 가서, 문자 지금 봤다고 할까. 근데 뭐 그래봐야 바뀌는 것도 없겠지. 이제 봤네ㅋㅋㅋ 맛있게 먹어! 나는 식상한 답장을 보냈다. 알림을 봤는지 원영이 이 쪽을 돌아본다. 눈이 마주쳤고, 웃어주려고 했는데, 원영이 바로 다시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나는 웃다 말았다. 분명 꽤 무표정한 낯이었다.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결국 내가 보낸 답장은 읽씹당했고, 원영은 우리에게 인사 없이 곧바로 음식을 받아들곤 자리를 떴다. 나는 원영에게 다시 연락할 용기가 나지 않아 한참을 삼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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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알림이었다. 짐에서 운동을 하고 나서 피트니스 앱 요약 화면을 찍어올린 사진에 원영이 하트를 눌렀다. 그 때 찬바람 일으키며 스쳐지난 이후로 간만이었다. 스토리만 좋아요인가 했는데 디엠도 잇따라 온다.


[요즘 운동 자주 해?]

응 기말 때는 바빠서 못갔는데 방학땐 자주 하려고 노력중

[주로 어떤거 해?]

러닝이랑 웨이트?

[오 웨이트도 해? 멋있다]

잘 못해ㅋㅋㅋ


운동 후에 씻고 나와 랩실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오랜만에 하체를 했더니 걸음걸이가 제법 어정쩡했다. 한 번 열 내고 나오니 아무리 씻었어도 땀이 맺히는 건 금방이다.


[나도 웨이트 알려주면 안돼?]


원영의 늦은 답장이 온 건 내가 랩실에 도착해 땀을 식히고 있을 때였다. 나는 원영의 깡마른 몸을 떠올린다. 웨이트라. 5파운드는 들 수 있을까, 문득 걱정까지 된다.


할수있겠어?ㅋㅋㅋ

[당연하지 나 힘쎄]


아무래도 원영은 웨이트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을 것 같은데, 의외였다. 문득 스토리 창에 승훈도 제 운동 사진을 올린 것을 본다. 운동을 꾸준히 해왔다던 승훈은 짐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학생 트레이너 아르바이트를 하고있었다. 그 때 나와 마주쳤던 것도, 트레이닝 전에 가볍게 몸을 풀려다가 만난 거였다. 이따금 짐에 가면 승훈이 있었고, 강습 중이라 공짜 트레이닝은 못 받아도 이것저것 운동 상식을 물어보면 도사처럼 척척 알려주곤 했다.


좋아ㅋㅋ 승훈이한테도 물어볼까

[차승훈? 걔 왜?]

걔 운동 엄청 잘해서

트레이닝 전문이던데

나보다는 승훈이가 더 잘 알려줄걸


솔직히 말하면 약간의 거리낌이 있었다. 원영이 또 한 번 내게 내미는 손길에. 이것도, '원영다운' 모습이겠지. 

요며칠새 원영이 올리는 스토리는 그런 것들이었다. 한국에서 사온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상대방을 찍어 올린 것이나, 친구들과 맛있는 걸 먹고 활짝 웃으며 올린 사진이나, 제 집에서 음식을 대접하는 등의 사진들. 그런 것들을 보니까 역시나, 싶었던 거다. 그래서 나는 둘만의 거리를 좁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나만 또 기대했다가 상처받을 것 같아서.


[그래?ㅋㅋ관심없어서 몰랐네]

[그래그럼ㅋㅋ나중에 셋이 시간맞춰보자]


나중에 시간 맞춰보자, 라는 건 아무래도 급한 건 아니겠지. 나는 알겠다고, 나중에 승훈에게도 물어보겠다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원영이 오케이 이모티콘을 큼지막하게 보냈다.


"There's a home football game next week. Do you wanna go together?"

"다음 주에 홈 풋볼 경기 있던데 같이 갈래?"


그 날, 제이가 제안했다. 학교 경기장에서 열리는 스포츠 경기는 모두 공짜였다. 솔직히 말해서 풋볼 경기가 재밌는 줄은 전혀 모르겠지만, 그 들뜬 분위기나 경기장에서 먹는 맥주의 느낌이 좋았으므로 알겠다고 했다. 




-


경기 날, 제이와 함께 경기장에 들어섰다. 이번에도 제이 찬스로 병맥주 하나씩 들고 귀를 째는 응원 소리에 대충 발맞춰 놀았다. 우리 위치는 홈 팀 쪽 진영이 아니라 중간이어서, 지난번보다 경기가 좀 더 잘 보였다. 그새 익숙해진건지 아니면 위치 덕분인지, 저번보다 좀 더 경기가 재밌어서 나는 제법 환호하기도 했고, 박수도 쳤고, 신이 나서 몸을 들썩이기도 했다. 그건 나보다 맥주를 물처럼 들이킨 제이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문제였다. 신나서 방방 뛰는 우리 모습이 전광판에 잡혀버린 것이다.


"Oh my god. So funny. Smile, Yujin. Smile."


취한 제이가 빨리 웃으라고 나를 닦달하다시피 했다. 이게 무슨. 보통 3초 정도 잡지 않나 싶은데 우리 얼굴은 10초 동안이나 전광판에 떠있었다. 관심받는 걸 그렇게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꽤 부끄러운 시간이었다. 주위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오오, 소리를 내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게 느껴진다. 괜히 머쓱한 기분에 휴대폰이나 확인하는데, 원영으로부터 오랜만에 메세지가 와있었다.


[언니도 경기 보러 왔구나?]


그 말인 즉슨, 원영도 이 경기장에 있다는 소리였다. 관중으로 가득찬 경기장에서 보일 리 만무했지만 나는 괜히 고개를 휙휙 돌려 원영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 원영이 있었다. 두 블럭 정도 떨어진 응원석 자리에, 그 길쭉한 다리를 오늘도 훤히 드러내고, 위에는 원영에겐 너무나 박시한 풋볼 유니폼 상의를 걸친 채, 지 친구들이랑 마찬가지로 방방 뛰고 있는 원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튀는 비주얼이라 찾는 것도 쉽구나 생각했다.


응ㅋㅋ 유니폼 샀어?


나는 저 멀리에서 원영이 휴대폰을 확인하는 모습을 본다. 원영 또한 고개를 홱홱 돌리며 나를 찾는 듯 했다. 이윽고 눈이 마주치고, 원영이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따라 손을 흔들었다. 원영이 휴대폰으로 자판을 친다.


[친구 꺼 뺏었어.]

이쁘다. 잘어울려.

[언니 같이 온 사람 남친?]

아니 그냥 클래스메이트.

[또 그냥 클래스메이트? 친구 아니고?]

아 친구도 맞지ㅋㅋ 암튼 남친 절대 ㄴㄴ 우웩


답장은 1이 생길 틈이 없이 둘 다 빠르게 이루어졌다. 원영이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잘 지냈어?]

그냥 뭐 똑같지ㅋㅋ너는?


웬일로 1이 생긴다. 고개를 들어보니 원영은 다시 친구들이랑 박장대소하며 경기를 향해 눈을 돌린 모습이다. 나는 잠시 그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나의 시선을 보았는지, 제이가 저 사람 비키 맞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 제이가 은밀하게 건넨 제안에 화들짝 놀랐다.


"Hey, can you hook me up with her?"

"야, 나 쟤 소개시켜주면 안돼?"


어쩐지 그 날 눈을 반짝반짝 빛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건 내가 싫다고 해봤자 제이가 끝도 없이 청해올 제안이었기에 결국 한 번 시도해보겠다고 대답했다. 대신 나는 원영이 현재 남자친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고, 만약 있다면 재빠르게 손 떼자고 했다. 마침 원영으로부터 답장도 때마침 도착했다.


[나도 맨날 똑같애 ㅎㅎ 인턴 구하는중]

혹시 경기 끝나고 약속 있어?

[아니 왜?]

괜찮으면 맥주 마실래?

[좋아!]


나는 동행이 있다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그 때 가서 밝혀야지. 그냥 무작정 가는거다. 무작정.


"This is Jay. And this is Vicky. Do you guys know each other? No? Maybe or maybe not..."


그래서 여기는, 이번엔 우리 집. 빌트모어 아파트 707호 다이닝 룸. 나는 제법 횡설수설하고 있다. 술 때문은 아니고...


경기는 34-26로 가뿐히 우리 학교가 승리했고, 종료 휘슬이 울리고 좀 더 방방 뛰다가 곧 원영과 접선해 이번엔 우리 집에 가서 먹자고 이끌었다. 웃고 있던 원영은 곧 펫마냥 쫄래쫄래 나를 따라온 제이를 보고 살짝 당황한 듯 보였다. 내 친군데 얘도 같이 먹자그래서, 괜찮아? 나의 물음에 끄덕이는 고갯짓도 어째 시원치 않았지만 일단은 원영의 차로 여기까지 오는데엔 성공했다. 다만 원영의 표정이 계속해서 뚱해 내가 이렇게 바보처럼 굴고 있는 것이다. 눈치코치 없는 제이 놈은 원영이 마냥 좋은지 헤벌쭉 웃으면서 주저리주저리 중이다. 그렇게 사교성 좋고 말 많은 장원영은 어디 갔는지 맥주만 연거푸 들이키면서 제이의 말에 기계처럼 응답하기만 했다. 그러다 제이가 잠시 화장실에 갔을 때였다.


"쟤도 같이 온다고 안했잖아." 

"어? 어어... 미안. 갑자기 끼겠다고 해서."

"처음부터 쟤가 나랑 같이 먹자고 했지?"

"......."

"언니 진짜 너무한다."


식은땀이 삐질 흐르는 듯했다. 뭐라도 변명해보려는데, 그보다 궁금증이 앞서는 게 코미디였다. 그래서 뭐가 너무한건데. 내가 말 없이 친구 데려온거? 근데 그 정도는, 그럴 수 있는 거 아닌가. 특히 미국에서는? 

솔직히 너무한 건 원영이었다. 분명 하드리쿼가 취향이 아니었던 나는 제이가 가져온(게임 끝나고 먹으려고 집에서부터 가방 속에 챙겨왔댄다. 미친 놈.) 캡틴 모건을 한 샷 시원하게 들이키고 될대로 되란 식으로 말해버렸다.


"네가 더 너무하거든?"

"....나? 내가? 내가 뭘."


그 때 마침 제이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바람에 우리는 더이상 한국어로 얘기할 수 없었다. 불콰하게 취한 제이가 둘이 무슨 얘기 했냐고 물은 직후에, 코리안은 참 부드럽고 듣기 좋다고 존나 느끼한 칭찬을 했다. 원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다른 한국인 친구 얘기를 했다고 눈 하나 깜짝 안하고 거짓말을 했다. 창과 방패. 다만 방패가 좀 더 단단한.


나는 제이가 꽤 취했음을 알았다. 그는 벌써 고등학교 때부터 원영을 알았다는 말을 세 번째 하고 있었다. 원영은 이 새끼 또 이런다는 듯한 가소로운 표정으로 들으며 이따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좀전에 괜히 그런 말을 했나, 초조한 마음으로 조금 빠른 템포로 술을 들이켰다. 어느새 머리가 살짝 헤롱거리고 원영의 얼굴이 살짝 모호하게 보이는 시점이 왔을 때, 다행히 나보다 더 취한 제이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아버리는 바람에 순간 정신이 들었다. 


"내가 뭐가 더 너무한데?"


마찬가지로 얼굴색이 조금 붉어진 원영이 나를 향해 물었다. 나는, 술기운에 조금 멍청해진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한동안 말을 골랐다. 원영은 차분하게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대가리 박은 제이의 코에서 고롱고롱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이 새끼 어떡하지. 내 집에서 재우기는 싫은데.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왜 말이 안나올까.


"너는...."


캡틴 모건 한 모금 더 축이고. 원영이 느긋한 얼굴로 팔짱을 낀다. 저런 모든 태도가 나를 더욱 아찔하게 했다.


"너무 다정해."

"........"

"너무, 잘해주고."

"...그게 왜 너무한데?"


나는 여기서 그만 말해야 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물었다. 더이상 말했다간...


"그게 왜 너무하냐구. 나는 언니 좋아서 잘해준건데."

"또, 또 그런다. 너 나만 좋아하는 거 아니잖아."


진짜. 그만해야 되는데.

느긋하던 얼굴의 원영은 이제 온데간데 없다. 찌푸려진 미간이, 그것마저 예뻐보인다. 


"엄청 친한 것처럼 굴고.... 나는 네가 나한테만, 어, 그러는 줄 알았어. 처음에는."

"......."

"근데 다른 사람들이랑 있는 거 보니까 아니더라구. 그래서, 아...."

"......."

"미안. 나 너무 취한 것 같아."

"......."

"...이제 그만 가줄래? 운전 못하겠으면... 내가 우버 불러줄게. 차는 내일 와서 가져가... 어차피 여기 주차 무료니까..."


횡설수설하는 나를 지그시 보던 원영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테이블을 빙 돌아 내 쪽으로 왔다. 나는 숨을 죽인 채 고개를 들어 원영을 바라보았다. 내 앞에 선 원영이 가만히 상체를 숙여 나와 가까이 눈을 맞추었다. 그동안 애써 부정해왔던 감정이 뒤늦게 폭발할 듯이 심장을 채찍질했다. 어지러워서 술잔만 꽉 쥐었다.


"내가 얼마나 더 플러팅해야돼?"

"....뭐?"

"언니 자주 가는 곳 일부러 찾아갔고. 밥 사줘. 차 태워줘. 밥 먹자고 꼬시고. 선물 사줘. 계속 연락해. 질투도 했는데. 그것 말고도 증거가 더 필요해?"

"......"

"뭐, 이런거면 되나?"


나는 섬찟한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역시 천천히 감기는 원영의 두 눈이었다. 

원영의 입술은 달았다. 원영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맡았던 과일의 향보다도 더. 금세라도 힘이 풀려 의자에서 넘어질 것만 같아서, 나는 한 손으로 테이블을 꽉 쥐었다. 원영의 혀가 노크하듯 나의 입술을 건드렸다. 열린 입술새로 얽혀들려는 순간, 원영이 입술을 떼고 몸을 꼿꼿하게 일으켰다. 나는 아마도 새빨개졌을 얼굴로 원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여전히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제이의 정수리로 시선을 옮겼다.


"어떡할래."

"...뭘?"


원영이 나지막히 웃으며 물었다.


"더 할거면 우리 집으로 갈래?"


그건 제안이 아니었다. 나의 마음에 대한 원영의 확인이었고, 당연히 대답은 yes였다.


공교롭게도 원영의 룸메이트가 하필 여행 일정에 차질이 생겨 일찍 돌아왔다. 하마터면 키스하면서 들어갈 뻔했던 우리는 그 친구가 지 친구들이랑 거실에서 왁자지껄 술을 마시고 있는 걸 보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원영은 룸메이트를 향해 일찍 올거면 미리 말을 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불평했고, 앨리시아라는 이름의 그 친구는 호탕하게 쏘리, 디든 이븐 띵크 어바웃 잇, 하며 뻔뻔하게 응수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일단은 같이 자야지 싶어서 원영의 방으로 들어왔다. 


"아, 짜증나. 맨날 저런 식이야, 쟤는."


쌓인 게 많았는지 씩씩대며 거의 욕을 하기 직전의 얼굴이 되어버린다. 나는 살살 원영의 뺨을 문지르며 이윽고 키스했다. 콧김을 뿜어대던 원영은 이윽고 다른 이유로 달아오른 몸이 되어 나의 허리를 감싸왔다.


"언니 차승훈이랑 놀지마. 짜증나니까."

"응. 알았어."

"걔가 언니 좋아해. What the fuck. 주제도 모르고."


침대 위로 긴 머리를 흩뜨린 채, 갑자기 분노에 차서 말하는 원영이 귀여워 나는 크게 웃고 말았다. 웃지 마. 웃겨? 날이 선 목소리마저 귀엽기만 했다.


"나 걔한테 1도 관심 없어. 그냥 뭐랄까... 잔뜩 신난 기니피그 같아. 뽈뽈거리는게."

"미친. 그게 뭐야. 웃겨."


방 밖으로 계속해서 목소리가 시끄러웠다. 근데 여기 방음 잘 돼? 나는 물었고 원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쟤네 목소리 저렇게 다 들리잖아."


발그레한 얼굴로 슬픈 얘기를 전했다. 슬프게도 입소 첫날 서로 친구 데려오는 건 자유롭게 하자고 합의해서 뭐라고 할 구석도 없단다. 


"나는 네가 나한테 하는 것들... 다른 애들한테도 똑같이 하는 줄 알았어."


나는 유치한 질투를 뿜어내보았고, 옆에서 모로 누워있던 원영은 파항항 웃었다.


"도대체 어떤거?"

"밥 사주고, 선물 사다주고. 집에 초대하고..."

"밥 안 사줬는데. All bills were separate. 선물은 무슨 선물?"

"한국에서 가져온거."

"그거 다 걔네가 부탁한거야. 돈 주고. 내가 사주고 싶어서 사온 게 아니라. 언니한테만 그랬어. 그리고 집? 걔네 다 기숙사 살아서 엄청 자주 왔다가."

"....막 포옹도 자유롭게 하고."

"그건 오히려 걔네니까 할 수 있었던 거고."


원영이 팔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


"좋아하면 오히려 못하지. 바보냐."


나는 곧 바보처럼 웃으며 원영에게 입맞췄다. 우리는 연신 키스만 하다가, 노곤노곤 몰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사이좋게 꿈나라로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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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te]

[누가 찍어줬어?]


흥. 나는 귀여운 감정을 참지 못하고 콧김을 뿜으며 눈앞의 원영을 바라보았다. 


"누가 나 귀엽대."

"뭐. 누가."


짐짓 날이 선 대답에 나는 크게 웃었다. 그리고 화면을 돌려 원영을 향해 보여주었다.


"이 여자가. 어떡해? 차단해?"

"아니? 이쁜데. 연락해봐."

"뭐야. 질투해야지."

"저 정도 여자면 괜찮아."

"어이없어. 그럼 너도 나랑 비슷하게 생긴 다른 여자가 대쉬하면 받아줄거야?"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질문에, 원영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깡 소리나게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부릅뜬 눈으로 말했다.


"아니. 나는 언니 뿐이야."

"뭐야. 내로남불이 이상하게 됐잖아."


원영이 내로남불이 뭐냐고 물었다. 설명하다가, 듣다가, 결국 바보처럼 히히 웃는 우리가 있었다.


그 날 내 집에서 홀로 잠을 청한 제이는, 다행히 우리가 키스하는 걸 못봤는지, 다시금 원영에 대해서 내게 묻고 추근덕댔다. 나는 안타깝게도 네가 자는 동안 원영의 남자친구가 원영을 데리러 왔다고 했고, 너를 깨워 보낼 자신이 없어 나도 원영의 집으로 같이 가서 잤다고 전해줬다. 뭐, 100% 거짓말은 아니니까. 제이는 눈에 띄게 아쉬워했지만 아마도 그 상대가 나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하는 듯해서 다행이었다.

알아도 큰 상관은 없지만.


나는 승훈과의 연락을 정리했다. 사실 정리라고 말하기도 웃겼다. 엄연히 승훈 혼자 타는 썸이었으니까. 눈에 띄게 답장이 늦어지고 연락을 귀찮아하는 눈치를 내비치니, 제이랑 달리 눈치가 빠른 승훈은 내게 더 이상 시간을 내줄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하기사 이렇게 눈치가 빠른 애니 그동안 원영과 친하게 지냈을 수 있었을지도. 


원영은 예전만큼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았다. 업로드하는 횟수가 부쩍 줄었다. 그런데 원영의 말에 따르면 원래 이 정도로만 한다고 했다. 그동안은 내 반응이 궁금해 그렇게 시험삼아 올려본 것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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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점입가경이다. 선크림 안 발랐다간 얼굴이 금세 익었다. 늘 손가락 반 마디가 꽉 차게 쭉 짜서 얼굴에 펴발라야 했다. 일주일에 원영은 개념없는 룸메이트와의 집에 4일 정도, 내 집에 3일 정도 머물렀다. 어느 날 갑자기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가 고장나서, 원영이 꼭 더위 먹은 강아지처럼 헉헉대며 집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때 온 입꼬리와 눈꼬리를 아래로 내리며 칭얼대는 모습이 참을 수 없이 귀여웠다.


"에어컨. 에어컨, 언니이."

"알았어. 알았어."


그리고 알았다. 에어컨도 고장났다는 걸. 헐, 미안. 에어컨 고장났어. 엘리베이터랑 에어컨이랑 같은 전력기를 쓰는건지 뭔지 황당하기 그지없는 해프닝에, 원영은 결국 한숨 쉬며 창문 앞으로 다가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원영이 올 시간에 맞추어 파스타 준비를 하고 있던 나는 손질을 멈추고 그 뒤로 가 따라 앉았다. 원영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뭐야아.


"너 지금 진짜 귀여운데, 안으면 더워할 것 같아서 거리두는 중."

"You don't have to."


그러고나서 우리는 결국 키스하고 껴안고 별짓을 다했다. 더위가 사랑에 큰 장벽이 되지 않는 여름이었다.


원칙상 인턴 출근은 주5일이었지만, CS 특성상 리모트로 작업할 수 있어 캠을 틀고 일해도 되었다. 가끔 원영이 우리 집에 있을 때 원격으로 출근할 때면, 혹시나 소음이 방해될까 연신 까치발을 들고 걸어다니는 원영이 사랑스러워 나는 팔불출처럼 웃었다.


"오랜만에 학생회에서 행사 있던데. 다 공짜래."

"가야겠네, 오랜만에."


연애하면서 파티나 사람들 만나는 횟수가 부쩍 줄어든 원영이 오랜만에 그런 자리에 가고 싶다고 얘기를 꺼냈다. 브루어리 하나를 빌려서 먹고 마시는데 지원금이 나와서 돈을 낼 필요가 없다고 했다. 졸업생 선배님들이 기부금을 쾌척해주었다나. 한국인의 Jeong은 역시 만만세였다. 맥주 뽕을 뽑을 생각인지 원영은 차를 두고 가기로 했고, 우리는 그래서 우버를 타고 정해진 일시에 장소로 나갔다. 여기저기서 원영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하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장원영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너 살아있었어?"

"인스타도 잘 안올리던데."

"아, 요즘 인턴 준비한다고 바빠서."


원영은 능숙하게 거짓말을 하며 인사들을 받았다. 그렇지만 역시 100% 거짓말은 아니었다. 가을학기, 넓게는 봄학기 공고까지 확인하고 인턴 준비한다고 꽤 바쁘게 레쥬메를 다듬고 리모트 인터뷰 보느라 역시 바빴던 원영의 여름이었다.


우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맞은 편에 앉았다. 신기하게도 지난번 원영이 나를 초대했던 그 파티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많아서 크게 어색하진 않았다. 나는 두 테이블 떨어진 곳에 앉아있는 승훈을 알아보았다. 승훈도 이리저리 인사를 나누다가 나를 발견하곤 반갑게 웃었다. 원영은 다행히 그 모습을 못본 것 같았다.


맥주가 끝도 없이 리필되는 바람에 금세 취기가 돌았다. 잠시 쉬어가야겠다 싶어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일어섰다. 원영이 능청스레 같이 가자며 따라 일어섰다. 화장실은 2층에 있어 계단을 오르려는데 저 위에서 익숙한 인영이 내려오려다 우리를 발견하곤 아는척을 했다.


"아, 장원영. 누나."


동시에 고개를 돌려 승훈을 보았다. 원영이 오, 소리를 내며 오랜만이라며 손을 내밀었다. 승훈이 한달음에 다가와 손을 맞잡는다.


"잘 지냄? 바빴나봐. 안 보이던데. 연락도 잘 안되고."

"응, 나 열심히 살았어."

"누나는요? 잘 지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일 없었지 뭐. 승훈이 다행이네요, 하고 웃으며 우리를 스쳐갔다. 우리는 마저 계단을 올라갔다. 원영이 화장실 입구 문 앞에서 문득 내 손가락을 소심하게 잡았다.


"아니지?"

"...뭐가?"

"괜히 막 찝찝하다거나 미안하다거나 그런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


그 당당하고 매사에 자신감 넘치는 장원영이, 유독 소심하고 예민해질 때가.

나와 관련된 문제라는 게 여전히 못내 자랑스러운 걸 보면, 나는 유치한 사람이 맞는 것 같다.


"짜증나."

"갑자기? 뭐가?"

"됐어."

"뭐야, 왜 그래."


근데 이건 예상 밖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잔뜩 낮춰 물었다. 원영이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먼저 화장실로 들어간다. 나는 당황스런 마음에 따라 들어가지 못하고 멍청하게 발만 굴렀다. 원영이 다시 안에서 나왔을 때까지. 나는 원영을 붙잡았는데, 꼭 모래알이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가듯 원영의 손도 내 손을 쉽사리 빠져나갔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자리, 원영이 조금 전 나에게 심통을 부린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친구들과 대화하고 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맞은편에 앉았다. 다들 여름에 뭐했는지 근황에 대한 얘기와, 가을에 무슨 수업을 듣는지, 취업계획은 어떻게 되어가는지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느라 바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는 동안 원영은 결국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맥주를 본의 아니게 많이 들이킨 탓에 제법 올라간 취기로 원영에게 언제 갈 거냐고 물었다. 원영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슬슬 갈 거라고 했다. 나는 같이 나가자고 제안했고, 잠깐 대답을 보류하던 원영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2차도 있는데 벌써 가냐는 친구들의 원성을 뒤로 하고 우리는 브루어리를 나왔다. 뒤에서는 둘이 언제 저렇게 친해졌냐고 누군가 소근대는 소리도 들렸다.


"왜 화났는지 말해주면 안돼?"


우버에 타서 물었다. 우리 집에 가지 않겠냐는 제안은 거절당했기에, 목적지는 원영의 집 다음 나의 집이었다. 원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두 눈과 코와 입술을 당장이라도 쓰다듬고 싶었다.


"화 안났어."


나는 우버기사에게 중간 목적지를 지워달라고 요청했다. 원영이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지금 뭐하는 거냐고 내게 그랬다. 


"너는 네 멋대로 짜증내놓고 나는 내 멋대로 하면 안돼?"

"뭐?"

"그렇잖아. 내가 뭘했다고 그렇게 화가 났는데?"

"......"

"뭐, 차승훈 말을 씹었어야 됐어? 그것도 아니면 걔 보는 앞에서 너한테 키스라도 할 걸 그랬나?"

"...Jeez."

"나 걔랑 연락 안한지 한참 됐어. 내가 너 좋아하는거 알면서 왜 그래?"

"........"

"내 어떤 점이 너를 불안하게 했어? 내가 너한테 해주는 것들이 부족해?"


가끔식은 이 곳이 미국이어서 다행이라고 여겨질 때가 있다. 우버 기사 같은 완벽한 제3자가 우리의 대답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까. 그래도 제법 분위기가 심각하다는 것은 느꼈는지, 히스패닉 계열의 그가 이따금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가만히 원영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원영의 입술은 옴싹달싹하더니 곧 말을 삼킬 뿐이었다. 그리고 그냥 언니 마음대로 하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우버 기사에게 중간 목적지는 삭제라고 다시금 상기시켰다.


근데 그 와중에 웃긴 건, 우리는 내 방에 들어오자마자 키스했다는 것이다. 나는 원영의 뒤통수가 혹여 다치기라도 할까 벽과 머리 사이에 손을 넣어주어야 했다. 그만큼 제법 격렬했다. 잠깐 숨을 골라야겠다고 입술을 뗀 원영의 두 눈을 나는 노려보다시피 보았다. 원영도 지기 싫은지, 숨을 고르면서도 나의 눈은 곧이곧대로 응시했다.


"왜 화났냐고."


싸우는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가끔씩은 있었다. 거진 다 시덥잖은 이유에서 파생되는 것이었지만. 그래서 이 상황도, 사실 비슷한 상황들이 이전에 몇 번 있긴 했다. 원영이 나의 품을 빠져나와 방 안을 서성였다. 나는 참을성 있게 대답을 기다린다. 그리고 드디어 원영의 목소리가 방에 울렸다. 조금은 물기를 머금은 채로.


"그냥 가끔씩은 좀 감당이 안돼. 우리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것도 아니고, 나는 그냥 처음부터 언니가 좋았거든? 느낌이라는 게 왔단 말이야."

"응, 그래서."

"유치한 거 아는데 첫눈에 반했어. 딱 그거였어. 그동안 이런 말 한적 없지. 어. 쪽팔려서 그랬어. 나만 너무 언니한테 안달난 것처럼 보일까봐."

"......."

"적당히 도도한 척 하면서 연애하고 싶어서 말 안했다고. 근데 아까 저런 거에도 빡치는 거 보면, 내가 언니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그래서 가끔씩은,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감정에 북받쳐 마구 문장을 뱉어대는 원영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냥 냅다 안아버렸다.


"원영아."

"....어."

"제이가 아직도 가끔씩 너 얘기 하거든? 주제도 모르는 양키 새끼가..."

"......"

"그럴 때마다 걔 죽여버리고 싶어."

"......"

"내가 총이 없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

"너만 그런 거 아니라고. 그니까... 키스해도 돼?"


한참을 키스하고 나서 알았다. 에어컨이 또 고장났다는 걸. 좆같은 아파트. 이사가든지 해야지. 원영과 둘이 살 수 있는 투베드로. 에어컨이 고장난 이상 오늘의 밤을 이겨낼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한국의 이열치열을 북미 대륙 한가운데에서 뿜어대며, 우리는 연신 서로를 찾고, 응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