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슈얼텐션. 성적 긴장감. 보통은 섹텐이라 통용되는 그것. 이십년 일생을 꽤 담백하게 살아온 우영에게는 다소 거리감 있는 단어였다. 걔를 만나기 이전까지는 그랬지. 일생 일대의 고민을 고작 에브리타임에 작성하고 있는 현재, 우영은 걔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까맣게 점멸되는 기분을 체험한다. 나 혼자만 이런 고민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거라면 나 너무 억울할 것 같애, 산아.


토독토독 작성한 글을 다섯 번이나 검토한 우영이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등록을 누른다. 고민의 대상이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게 다소 마음에 걸렸지만 인터넷 커뮤니티와 거리가 먼 우영에게는 에브리타임 외에 마땅한 선택지가 없었다. 제발제발 저에게 집단지성의 힘을 빌려주세요.



비밀게시판

우산대

익명 

너희는 친구한테 섹텐 느껴본적 있음?

아니 내 얘긴 아니고

내 엠비티아이가 ENFJ라서

실은 원래 내가 S엿는데

이번에 다시 검사해보니까 N이 나왔더라고

N이 약간 원래 상상력이 풍부하잖음??

그래서 그런지

나도 갑자기 이런게 궁금하길래 ㅇㅇ

걍 다른 사람들 생각도 궁금해서 올려봄



자극적인 제목 탓인지 글을 올린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두 개의 댓글이 달렸다.



익명1

친구한테 섹텐 느끼는거면 그건 친구가 아닌거 아님..??

익명2

나랑 내 남친 그랫는데 결국사귐ㅋㅋㅋㅋ



기대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코멘트 내용에 우영의 표정은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명확한 해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다들 자기 일처럼 고민 정도는 해볼 수 있는 거 아닌가. 이게 님들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걔랑 내 사이는 이것보다 서른다섯배 정도 복잡하고도 미묘한…… 익명 원투의 엠비티아이를 멋대로 _S__라 단정지은 정엔프제 군은 새롭게 달린 댓글을 확인한다.



익명3

정확히 섹텐이 뭘말하는거임? 어떻게 느꼈다는거?



아... 이걸 또 내가 구체적으로 상황을 설명해줘야 돼? 하면서도 우영의 손은 다시 토독거리기 시작했다. 



 익명(글쓴이)

그니까… 전에 얘 긱사 통금 지나서 내 자취방에서 재운 적 있단말임 바닥에서 자기 싫다길래 어쩔수없이 둘이 내 침대에서 잤는데 얘가 잠이 안온다고 자꾸 나를 쿡쿡 찔러댔단 말이지 그래서 복수할 생각으로 돌아누웠는데 그때 눈마주쳤을 때 뭔가 좀.. 이상했어


익명(글쓴이)

글고 내가 원래 친구들한테도 스킨십이 좀 많아서 얘한테도 장난칠 때가 많은데 얘 반응이 좀... 싫으면 그냥 질색하면서 밀어내면 되는데 견디듯이 받아주니까 자꾸 더 괴롭히게 돼 분명 나보다 키도 크고 몸도 좋은데 손목이나 허리같은데가 이상하게 가늘어서 자꾸 쥐어보고싶고...;;


↳ 익명3

ㅇㅇ본인얘기인거 잘들었음 내가 봐도 그거 친구 아닌것같은데 잘되면 후기 부탁ㅋㅋ

익명4

근데 읽다보니 이상한 부분이 좀 많은데 혹시 동성친구임?

익명(글쓴이) 

아이런씨발



다급하게 글을 지운 우영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쿡 찔렀다고 너무 허술하게 전부 불어버린 것이다. 설마 이 글을 최산이 봤을 확률은? 지금은 새벽 두 시에다가 오늘 우리는 1교시부터 전필이 있고 걔는 워낙 어디든 머리만 대면 바로 잠드는 애니까...... 아니 그럼 내 자취방에서는 왜 잠이 안 온다고 했던 건데? 도대체 왜? 그렇게 우영은 오늘도 의문을 잔뜩 품은 채 새벽 다섯 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섹텐네버라이 A

정우영 최산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다.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것들이 꿈이라는 공간에서나마 얼굴을 내밀고 목소리를 높이고. 마음속 깊은 곳에 꾹꾹 묻어둔 감정들이 지멋대로 새어나오는 거지. 


그렇다면 나의 무의식은 온통 최산인 것인가?


강의 내내 졸던 우영은 결국 점심을 포기하겠노라 선언하고 남자휴게실로 향했다. 오후에도 강의가 두 개나 있는 걸 생각할 때 밥보다 잠을 채우는 게 먼저였다. 그렇게 잠깐 눈붙인 이 순간까지도 왜 내 꿈에는 최산이 나오는 건지. 지금 내가 쪽잠 청하는 것도 다 새벽까지 걔 생각 하느라 못 자서 그런 거 아냐. 우영은 억울함에 피라도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꿈에서 산은 우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너랑 같은 마음이야 우영아.


나랑 같은 마음이라고? 니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아는데?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너는 어떻게 아는데 산아.


복잡한 우영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꿈속의 산은 우영에게 다가왔다. 아주아주 천천히. 슬로우모션 효과라도 걸어놓은 것처럼. 그렇게 우영의 앞에 선 산이 우영의 목에 팔을 감는다. 그리고……


“영아 일어나. 곧 한시야.”


눈을 깜빡이니 보이는 하얀 천장과 코를 찌르는 남자휴게실 냄새. 아… 꿈이었구나 씨발. 


비몽사몽한 우영을 바라보는 산의 눈과 입이 매끄럽게 휘어진다. 잠 덜 깬 정우영 완전 바보 같애. 그러더니 여전히 침대에 등 붙이고 누운 우영을 안아서 일으키는 게 아닌가. 아까의 꿈과 오버랩되듯 느리게 재생되는 화면. 우영은 제게 다가오는 산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꽉 감아버렸다. 꿈이라는 공간에서 하염없이 헤매던 나를 현실로 끌어내는 것조차 왜 하필이면 너라서.


강의실에 들어서고도 쉽사리 정신이 돌아오지 않는 우영을 산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너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이마에 산의 손이 닿자 우영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몸을 쭉 뺐다. 산이 서운한 표정으로 우영에게서 떨어진다. 원래의 우영이라면 이 타이밍에서 오히려 산에게 얼굴을 들이밀어야 하지만…… 지금은 그게 안 됐다. 아니, 정확히 짚어야지. ‘요즘’은 도무지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하루 수업이 모두 끝나고 같이 피시방에 가자는 산에게 거절의 의사를 내비친 우영은 쏜살같이 집으로 귀가했다. 지금쯤 단단히 삐졌을 걸 아는데 먼저 연락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 복잡한 마음을, 꼬이꼬 꼬여버린 실타래를 깔끔히 풀기 전까지는 그럴 수 없었다.


침대에 정자세로 누워 ‘내가 최산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된 결정적 사건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던 우영은 몰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결국 꿈나라로 향했다. 시간이 흘러 까맣게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도.


그때, 고요함을 깨우는 우당탕탕 소리가 있었으니. 멀쩡한 초인종 두고 빌라가 떠나가라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우영은 화들짝 깨고 만다.


“야 정우영!!”

“……?”

“집에 있는 거 다 아니까 문 안 열면 죽는다!!!!”


이 목소리는 분명히 최산이다.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취한 최산. 꼬부랑거리는 발음에서 문을 열기 전부터 강렬한 알콜 기운을 감지한다. 크게 숨을 들이킨 우영이 문을 열자마자 산이 우영의 품으로 쏟아지듯 안긴다. 술냄새를 뚫고도 맡아지는 걔의 체취. 우영은 저까지 취하는 기분을 느낀다.


“너 요즘 자꾸 왜 그래?”

“……”

“막 나 피하잖아. 이제 나 싫어? 나랑 친하게 지내기 싫어?”

“야, 내가 언제 피했다고……”

“누굴 바보로 아나… 너 요즘 맨날 나랑 거리 두잖아……”


히유우우.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뜨거운 숨을 쏟아낸 산이 우영의 어깨에 볼을 부빈다.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으면 그냥 말로 해 주라아.”

“……”

“너 자꾸 그러면 나 너무 속상해.”

“……”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 영이 너인 거 알잖아…”


우영의 속도 모르고 잽잽원투펀치를 날린 산은 본인의 임무가 끝났다는 듯 현관에서 기절했다. 불도 켜지 못한 방은 현관등이 꺼지자 다시 어둠에 잠식되었고 그 속에서 우영은 홀로 생각한다.


산아.

보통 친구 사이에 이런 걸로 이렇게 서운해하고 그러나?

나는 도대체 너랑 뭘 하고 싶은 걸까.

우리는 어쩌다 이런 위기에 봉착하게 된 거지.


우영은 천천히 테이프를 되감기 시작했다. 감정 변화의 첫 키프레임이 어디였는지 살펴보기 위해.





1.


우영이 산을 인식한 것은 입학 후 꽤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매일같이 과방에 출석해 오늘의 음주팟을 모집하는 우영과 달리 강의가 끝나면 쏜살같이 기숙사로 향하는 산은 카테고리부터가 달랐으니까. D:/인싸/정우영과 C:/아싸/최산에게 허락된 교집합은 같은 학과 동기가 전부였다. 그렇기에 사람 잘 기억하는 우영조차 산의 얼굴과 이름을 일치시키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산의 이름이 특이하지 않았더라면 우영은 지금까지도 산의 이름을 몰랐을 것이다. 출석 부르는 순간 외에는 볼 일 없는 애를 어떻게 외우겠어.  


이런 두 사람이 엮이게 된 이유는 다소 단순했는데 우영과 친한 여자 동기가 최산을 짝사랑했기 때문이다.


사건의 그날. 오늘따라 교수님 수업이 유난히 지루하고 재미없었다는 핑계로 김치전팟이 결성됐다. 대학생이란 원래 술 마실 건수 만들기가 공통 전공이니까. 간술로 1차만 하고 가자던 술자리는 닭발로 종목이 변경되어 2차가 되고 종국에는 투다리 김치우동으로 마무리하자며 3차가 되었다. 다음 날이 공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달린다는 것은 헤어지기 아쉬울 정도로 재밌다는 뜻. 그런 분위기에서 폭탄발언 하나쯤 터지는 거야 놀랍지도 않지. 그날의 메인 주인공은 A양이었고 A양은 반쯤 풀린 눈으로 고백했다. 나 우리 과에 좋아하는 애 생겼어, 라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그 시기의 새내기들답게 모두의 관심사와 고민은 전부 연애였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핫토픽은 역시 씨씨였기에 A양의 고백은 다른 폭탄발언보다 파급력이 다섯 배 정도 강했다. 뭐어어억?! 하며 뒤집어진 정우영 외 4인은 놀라는 것도 잠시 끊임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누구? 누군데? 언제부터 좋아했는데? 야 누군지 말해봐. 우리가 도와줄게. 설마 우리 중에 있는 건 아니지? 야 그건 아니다 미친 새끼야.


“그… 걔야.”

“아 누구!! 뜸들이지 말고 말하라고 얼른.”

“걔.”


“산이 있잖아. 최산.”


A양의 짝사랑 상대는 다름 아닌 최산이었다. 과에서 인싸라고 이름난 여섯 명이 모인 이 팟에서도 친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최산. 기숙사 사는 주제에 강의시간 외에는 학교에서 마주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걔.


너무 예상외의 인물이었기 때문일까 테이블에는 잠시 정적이 돌았다.


“왜?”


모두들 눈치만 살피고 있을 때 정적을 깬 것은 우영이었다. 정말로 왜 좋아하는지 궁금해서.


다른 애도 아니고 최산이라니…… 좋아할 만한 건수 자체가 있기 힘들지 않나? 학과 생활도 잘 안하는 데다 우영이 알기로 A와 최산은 제대로 대화를 해본 적도 없다. 누군가 말을 걸어도 응 or 아니로 응수하는 산은 학과 내에서 이미지 평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개강 초에는 싸가지 없다는 소문까지 돌았을 정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허우대 덕인지 여자애들은 꾸준히 관심 많아 보이긴 했지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때는 특별한 계기나 사건이 동반되는 게 마땅하잖아. 이름과 얼굴만 겨우 아는 과 동기를 좋아한다니. 어쩐지 우영에게는 쉽게 와닿지 않는 일이었다. 


“아니 그냐앙.. 잘생기기도 했구 실은 내가 그런 스타일 좋아하거든. 말없고 조용한 것도 내 이상형에 가까워서. 친해지고 싶은데 기회가 잘 없네.”


시무룩해진 A를 달래기 위해 테이블은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자기들이 도와주겠다며 팔을 걷고 나서는 오바스러운 액션까지. 그때 A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우영의 손을 붙든다. 우영아, 나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면 말이지.


그것은 바로바로


<A와 최산 이어주기 러브러브 프로젝트>

주연: A, 최산

조연: 정우영

줄거리: 상처받은 아기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A의 마음을 훔친 최산. A는 산으로 인한 상사병으로 사경을 헤맨다. A의 절친 우영은 이런 A를 위해 산에게 접근하고… (중략) 우영과 메가베스트프렌드가 된 산은 자연스럽게 A와도 친해지게 되는데… (또 중략) A와 산은 씨씨가 되어 행복한 대학생활을 하게 된다.



“잘 부탁할게 우영아!!”


어어…… 그니까 나는 지금 강제로 캐스팅당한 거지? 이중에 가장 친화력이 좋다는 이유 하나로? 개런티도 없이 말이야. 황당함에 혀를 내두르던 우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A의 부탁을 산뜻하게 수락했다. 원체 거절을 모르는 오지랖이라 그렇다.


모두들 프로젝트의 성공을 기원하며 촌스러운 건배사까지 저지를 때 우영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스무살에게 있어 연애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왜 다들 연애하려고 난리일까. 놀기 좋은 스무살에 왜 굳이 한 명한테 코 꿰이려고 하는 건지. 우영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심리였다. 





2.


생각과 반대로 책임감은 발동됐기에 우영은 다음날부터 행동을 개시했다. 평소처럼 강의실에 들어섰고 평소와 다르게 주변을 스캔했다. 머지않아 발견된 목표물에게로 전진한 우영은 능청스럽게 옆자리를 꿰찼다. 의자에 올려둔 산의 가방을 치워버리는 몰염치까지 저지르며.


“안녕?”

“어.. 안녕.”


무대뽀로 엉덩이 들이미는 것도 모자라서 뻔뻔스러운 인사까지. 산의 표정이 순식간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너 이거 혼자 들어? 미처 상황 파악이 안된 산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우영이 다시 한번 묻는다.


“옆자리 앉아도 되냐고. 혹시 누구 자리 맡아둔 거야?”

“아… 그건 아닌데.”

“그래? 그럼 나 오늘 여기 좀 앉을게. 친구들이랑 싸워서 나 혼자 앉아야 되거든.”


언뜻 보면 무례할 법한 태도에도 산의 표정에서는 당황과 난감 이외의 감정이 읽히질 않았다. 여기서 우영은 직감적으로 알아챈다. 얘 성격 완전 물렁하네. 우영이 펜과 종이가 없음을 눈치채곤 각 맞춰 노트를 찢어주는 세심함 같은 게 ‘얘 분명 싸가지 없다고 하지 않았나?’라는 의문을 들게 했다.


콜드아이즈이베이비일 줄 알았던 남자주인공이 알고 보니 속내 여린 아기고양이일 때, 시나리오는 뻔해지지만 그만큼 이야기 전개가 스무스해지는 것은 팩트. 정갈하게 각 맞춰 찢긴 종이 한 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우영이 펜을 들고는 온갖 질문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필기하라고 줬더니 필담으로 사용하는 것마저 뻔뻔 그 자체였다. 


종이에 질문을 끄적댄 우영이 산의 옆구리를 쿡쿡 건드렸다.


너 이거 다음에도 수업 있어?

(끄덕)

혹시 서양미술사?

(끄덕끄덕)

아 너도 그거 듣는구낭ㅎㅎ 나도 그거 듣는데 같이 점심먹을래?

(머뭇)

니 좋아하는 음식 뭐야?

(입모양으로) 고기..

니 고기 좋아해?? 야 나도 고기 개좋아해서 집에 수비드머신도 잇음ㅋㅋㅋㅋ


그렇게 옆구리 찌르기를 열두 번 정도 반복하자 산의 미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이따 밥 먹을 때 물어봐도 되니까 제발 그만해……”


이 말을 끝으로 산의 옆구리는 평화를 되찾았으나 이는 잠깐의 평화였을 뿐 전쟁의 불씨가 되고 만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우영에게 붙들려 단골이라는 두루치기집에 갔다가, 함께 오후 교양을 들었다가, 기숙사 들어가려는 걸 붙잡혀 강제로 피시방에 질질 끌려가고, 어쩌다보니 삼겹살에 소주까지. 헤롱거리는 산을 친절히 기숙사까지 데려다준 우영이 묻는다. 오늘 나랑 논 거 재밌었지. 가물가물한 눈가를 고쳐 뜬 산이 가만히 우영을 응시한다. 이때 우영은 답지 않은 긴장감을 느꼈는데, 아직 감정의 스펙트럼이 좁은 우영은 이 긴장의 근원을 그저 시나리오 진행에 대한 부담감으로 치부하고 만다. 이 긴장감이 추후 불러올 파도를 모르고.


“솔직히 말하자면.”

“……”

“너 재밌어… 같이 있으면 자꾸 웃게 돼서 좋아.”


알콜로 푹 젖은 마음에 살랑살랑 내려앉는 이 말이 잊을 수 없는 어떤 한순간이 되어버릴 줄도 모르고.





3.


대망의 디데이. 


며칠 동안 산을 수없이 찔러대며 낯가림을 해제시킨 우영은 어느새 최산 사용법을 터득했고, 그 중에도 ‘최산을 어떻게 구워삶아야 하는가’에 대한 항목은 A4 한 페이지를 채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작전 당일. A와 친구들이 있는 술자리에 산을 데려가야 하는 임무를 맡은 우영은 대뜸 떼를 쓰기 시작했다. 오늘 우리 과 애들 술 마신다는데 같이 가주면 안 돼? 응 안 돼. 왜애애애애액.


“너 안 가면 나두 못 간다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

“우리 이제 하나라고 했잖아아. 너 없는 자리에 내가 왜 가냐.”


산의 팔에 엉겨 붙으며 잉잉 볼을 비비자 진절머리를 친다. 허나 꿋꿋함으로 중무장한 우영은 필사적으로 산에게 매달렸다. 팔에 우영을 매단 채 질질 끌듯이 언덕을 올라가던 산이 한숨을 내쉰다. 그에 잠깐 주춤한 우영이 슬그머니 떨어지자 산이 입을 연다. 알겠어 이번만이야.


입이 댓 발 튀어나온 최산을 데리고 익숙한 포차 안으로 들어가자 그보다도 익숙한 멤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와 같은 김치전팟에 딱 최산만 추가된 라인업. 야 산아산아산아. 우리 전부 너랑 엄청 친해지고 싶었어. 너 처음처럼 마시냐 참이슬 마시냐. 산의 등장과 동시에 소란스러워진 테이블을 바라보며 정우영은 곁에 선 최산을 힐끔 쳐다봤다. 막상 데리고 오긴 했는데 왜 자꾸 얘 눈치를 살피게 되는지. 며칠 같이 다녔다고 최산의 보호자라도 된 듯이 구는 자신이 너무도 이질적이었다.


술자리는 몹시 지루했다. 기다리던 최산의 등장에도 A는 뚝딱거리기 바빴고 오히려 관람객들만 성화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우영은 가만히 산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냈다. 기숙사에서 낮잠이나 자고 싶다며 툴툴대던 입술이 꾹 다물려 있었다. 겨우 해제시켜놓은 낯가림이 다시 발동한 것 같았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A와 산을 본격적으로 엮기 위해 술게임이 시작됐다. 예상대로 산은 술게임에 취약했지만 예상을 비껴간 사실 하나. 대놓고 엮어주는 분위기에도 산이 대쪽같이 꿋꿋했다는 점이다. A와의 러브샷 제안에 A의 술잔까지 본인이 가져가는 철벽 아닌 철벽으로 A의 멘탈은 로그아웃되고 만다.


흡연자인 우영이 담타를 마치고 들어왔을 때 산은 온데간데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 한 시. 가장 주량이 센 우영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거나하게 취한 것처럼 보였다. 최산은 어디 갔지? 튀었나? 산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주변을 샅샅이 뒤지던 우영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혹시가 역시가 되는 순간. 화장실 벽에 기대 있는 산을 발견하고 우영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산아.”

“……”

“많이 취했어? 슬슬 갈래?”

“… 못 가.”

“뭐라고?”

“열두 시 지나서 기숙사 못 간다고오.”


너 때문에 이게 뭐야. 다들 술게임 완전.. 완전 잘해서 나 자꾸 술 마시고. 나 소주 별로 안 좋아하는데. 나 걸리면 니가 다 마셔준다더니 거짓말쟁이. 너 진짜 밉다. 중얼대던 산이 댓 발 튀어나온 입술로 우영을 원망스럽게 바라본다. 꾹 말려들어가 있던 아까의 그 입술과 교차되는 광경. 우영은 마음이 울렁이는 걸 느낀다. 오늘 계속 밑잔 깔아서 취했을 리가 없는데.


취한 동기들을 모두 집에 보낸 뒤 우영과 산은 근처 24시 할리스로 향했다. 자취생인 우영은 걸어서 15분 거리인 자기 집에 가자며 산을 설득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아직 집은 부담스럽다 이건가? 혼자 피시방에 가면 된다는 산을 타박하다가—이제와 생각해보니 다 큰 남자애가 새벽에 혼자 피시방에 가는 게 어때서?— 결국 타협한 것이 카페였다.


나란히 음료를 시키고 마주 앉자 산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우영을 바라봤다. 왜? 고개를 갸웃거리는 우영을 바라보던 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

“응 말해.”


혹시 오늘 술자리에서 A와 엮은 게 너무 티 났나? 불편했을 수도 있지. 기분 나빴을지도 모르는 거고. 산의 성정을 생각한다면 그런 관심이 부담스러울 법도…..


“친구들이랑 화해한 거야?”

“엉?”

“니가 그랬었잖아. 친구들이랑 싸웠다고…”


아.

머리를 한 대 맞은듯한 기분에 우영의 표정이 굳는다.


“오늘 술자리에서 화해한 거면 다행이고…”

“……”

“그럼 이제… 다음 주부터는 다시 걔네랑 다닐 거야?”


그니까 최산은… 우영이 친구들이랑 싸워서 같이 앉을 수가 없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은 거였다. 천성적인 낯가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이랑 싸웠다’는 말이 신경 쓰여서 며칠 동안 같이 밥도 먹어주고 수업도 들어주고 심지어 술자리까지 동행해준 것이다. 그러다가 우영이 친구들이랑 화해한 것 같으니 ‘이젠 나랑 같이 수업 안 듣고 같이 밥 안 먹을 거냐’고 묻는 바보. 대놓고 물을 용기는 없어 요점을 빙빙 도는 주제에 걔의 눈빛은 너무도 투명해서……


우영은 이제야 깨닫는 것이다. 학기 중간이 되도록 최산과 친한 애가 한 명도 없었던 이유를. 누르면 누르는 대로 푹 들어가는 가판대 복숭아처럼 구는 게 지금까지 걔를 둘러싼 방어력은 그저 ‘친해질 거 아니면 누르지 마십시오’였음을. 


작전에 대한 사명감보다 호기심이 앞서기 시작한 걸 부정할 수 없었다.